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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채식의 신화(The Vegetarian Myth)>
▲ 리어 키스의 <채식의 배신> 원제는 <채식의 신화(The Vegetarian Myth)>
ⓒ 부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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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채식의 신화>(The Vegetarian Myth)라는 원제목을 <채식의 배신>으로 바꿔서 출판한 출판사에게 화가 났다. 물론 시장성을 고려해서 이렇게 번역했겠지만 <채식의 배신>이라니….

책을 읽지 않고도 채식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제목이 아닌가? 하지만 채식주의라는 관념 자체에 집착함으로써 빠질 수 있는 오류를 생각하면 <채식의 배신>이라는 제목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조건이 있다. "도그마적인"이나 "교조적인" 채식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는 것. 

사람들이 채식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생명을 해치지 않으려고 채식하는 사람도 있지만, 건강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도 있고, 환경을 위해 채식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관심사는 동물을 해치지 않기 위한 소위 '윤리적 채식주의'다.

윤리적 채식주의로 통칭되는 채식주의도 자세히 보면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잡식 위주 사회에서 가장 쉬운 실천 방안으로서 눈에 보이는 고깃덩이를 먹지 않는 '비덩주의'로부터, 식물의 생명마저 해치지 않기 위해 열매만 먹는 '프루테리아니즘(Fruitarianism)'까지 다양하다.   

현재까지는 잡식이 주류인 사회에서 나는 비덩주의든 프루테리아니즘이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행동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모든 실천이 값지다고 생각한다.   

다만 채식주의자임을 자처하며 살아온 지난 3년을 돌아봤을 때, 윤리적 채식주의자라면 알아두었으면 하는 엄연한 진실을 언급하고 싶은데, "아무리 완벽한 채식주의라도 일체의 살생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채식의 배신>은 채식주의를 윤리적 채식주의, 환경을 위한 채식주의, 영양학적 채식주의로 나누어 비판했다. 이 책에서 제기된 영양학적 채식주의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영양 전문가가 아니라서 전문적인 반론을 제기할 입장이 못되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완전 채식주의자들이 전세계적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오늘날 채식주의는 그것을 지지하는 무수한 영양, 의료 전문가들에 의해 과학으로 정립, 발전되고 있고 게다가 건강이라는 것이 오로지 먹는 것에만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에 집착할수록 건강해질 수 없다"는 어느 채식 의료인의 말마따나 건강이나 컨디션은 주관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즉각적인 건강상의 이점을 바라며 채식을 하면 그만큼 실망할 확률도 높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나 자신이 평생 먹어온 동물의 숫자를 생각해보면, 동물성 식품을 끊음으로써 예방할 수 있는 동물의 고통은 실로 엄청나다. 그리고 나 자신의 실천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도 채식을 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몇 배의 동물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맷 볼이라는 미국의 동물권익옹호 활동가는 "채식이 대다수의 이름난 동물보호 캠페인보다 훨씬 많은 동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며, "채식주의 전파는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가장 많은 동물을 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러한 의견에서 좀 더 나아가서, 브루스 프리드리히라는 활동가는 채식주의자인 내가 다른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다리를 놓아야 할 곳에 장벽을 쌓음으로써 동물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채식주의는 동물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인데, 나는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리어 키스의 <채식의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리어 키스가 <채식의 배신>에서 거론한 채식주의의 신화는 "채식주의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어 키스와 같이 이런 이상을 품고 채식주의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리어 키스는 곡식을 재배하는 농기구에 수많은 소형 동물이 희생된다는 사실, 농사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그곳에 서식하던 동물을 죽이는 행위라는 사실을 근거로 채식주의가 생명과 환경을 해치지 않는다는 자신의 믿음이 허구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면서, 결국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느끼는 생명이므로 자신은 동물, 식물을 구별하지 않고 둘 다 먹겠다고 말한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이상을 전제로 시작했기에 언젠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주의'였다. 그런 주의를 20년 동안이나 지속했다는 실천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브루스 프리드리히는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피터 싱어 저, 시대의창 출판사)에 수록된 <카네기에게 배우는 효과적인 운동 전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채식주의가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지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님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중략)…우리는 무언가를 소비할 때마다 동물을 서식처에서 쫓아내거나 동물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비유기농 작물에 뿌리는 농약은 새를 죽인다. 유기농에 쓰는 퇴비는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된다. 자전거 타이어, 심지어 가죽으로 만들지 않은 신발의 고무에도 동물 성분이 소량 들어 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동물 학대에 공모하고 있다. 완전 채식주의자가 순수하다거나 눈에 보이는 동물 성분을 모두 거부한다고 해서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완전채식주의라 할지라도 전혀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위선이자 오만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권한 음식에 미량의 동물성 성분이 들어 있어 거절하는 완전채식주의자, 고기와 같은 철판에 구운 야채마저 고기 기름이 묻었다며 먹지 않아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채식주의자는 (적어도 자기 만족이 아닌 동물을 위해 채식을 한다면) 그런 자신의 행동이 정말로 동물에게 도움을 주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채식주의자 중에는 고통을 감소시키는 일보다는 성분 목록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채식주의는 종교가 아니다. 채식주의의 목적은 고통을 줄이는 데 있다. 육식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유장(우유 성분)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니 빵을 먹지 않겠다고 말한다거나, 레스토랑 메뉴에 베지버거가 있는 것을 보고 웨이터에게 성분을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여러분은 채식주의를 더 어려운 일로 만들었으며 채식주의자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에게 벽을 쌓은 것이다. 이것은 육식을 조금 하는 것보다 동물에게 훨씬 큰 피해를 주는 일이다.

완전 채식주의자 중에는 설탕이나 맥주 따위의 성분 표시를 읽어보며 이것이 진짜 완전 채식주의 음식인지 따지는 사람도 있다. 라벨 접착제 때문에 맥주를 시키지 못하겠다거나 소량의 천연 버터 향 때문에 빵을 못 먹겠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아무런 고통도 가하지 않았다고 위선을 떠는 것에 더해 비채식주의자에게 '완전 채식주의자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신념에 철저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잡식이 주류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한 치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고 게다가 타인에게 불편을 주기까지 하는 채식이라면, 그것이 과연 동물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가 적은 이유는 잡식이 주류인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로 살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지만 특정 음식을 끊을 수 없어서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 음식만 허용하는 선에서 채식을 시작해 보라고 융통성을 발휘하기보다 완벽을 강요하는 행동은 동물을 돕기보다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행동이다.

채식이든 동물의 털가죽으로 만든 제품 안 쓰기든,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실천에 완벽을 가정하는 한, 더 나아가 그런 실천이 그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는 교만에 기초하는 한, "식물도 생명인데 왜 먹냐?"라든지 "이것 저것 따지면 먹을 것 입을 것 하나도 없다"는 반박에 대꾸할 수 없다.

동물을 위한 일상의 실천이 소수의 동물보호론자만의 것으로 인식되는 한 사람들은 동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방관하기 마련이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 부당한 처사에 항거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채식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동물을 대단히 위하는 특별한 사람"으로 칭찬받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건지 생각해봐야 한다.    

<채식의 배신>의 리어 키스와 같이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비현실적인 전제에서 시작한 채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녀가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자신의 채식주의 도그마를 채식주의 전체로 투사했다는 점이고, 채식주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국내 출판사가 이 책을 채식주의에 대한 중대한 진실이라도 설파한 것처럼 선전했다는 점이 매우 아쉽지만.

꼭 채식주의뿐만이 아니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시도조차 못하고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 어떤 자신과의 싸움이든지 간에 목적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승률을 높여나가는 것이 아닐까?


채식의 배신 - 불편해도 알아야 할 채식주의의 두 얼굴

리어 키스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2013)


태그:#리어 키스, #채식의 배신 , #부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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