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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입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입구.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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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숲에 다시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다. 하지만 좀처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더 이상 주저할 게 무언가? 가을이 다 가고 나뭇잎이 모두 다 떨어져 내리기 전에 자작나무숲에 다녀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자작나무숲은 그 숲을 다녀간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자작나무숲을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그 숲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

강원도에서 자작나무숲을 처음 본 것은 지지난해 겨울이었다. 그 해 겨울, 산을 뒤덮은 하얀 눈을 밟으며 태백산 천제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그곳에서 우연히 자작나무숲과 마주쳤다. 산 중턱 등산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자작나무숲은 첫 인상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새하얀 눈 속에 그 눈빛만큼이나 하얀 나무들이 줄줄이 서 있는 풍경이 사뭇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앞서 보아온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등산로마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깊은 산 속에서, 그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무들마저 하얀 색을 띠고 있는 풍경이라니…. 아이들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다. 그 풍경이 한순간 나로 하여금 현실적인 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산에 오르기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넋을 잃었다.

숲 안에 빽빽히 들어서 있는 자작나무들.
 숲 안에 빽빽히 들어서 있는 자작나무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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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을 내려온 뒤, 그 후로도 한동안 그 자작나무숲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얀 색을 볼 때마다 눈 속에 곧게 서 있던 자작나무들이 떠올랐다. 그러던 지난해 늦가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서 다시 그 자작나무숲과 마주쳤다. 미술관 뒷마당에 심어 가꾼 지 얼마 안 돼, 아직 어린 티가 풀풀 나는 그곳의 자작나무숲은 장성한 자작나무숲에서 풍겨 나오는 고상한 기운을 느끼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그곳의 자작나무숲은 그 이전까지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 하나를 더 가르쳐주었다. 가을에 보는 자작나무숲은 겨울에 보는 자작나무숲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을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는 자작나무 잎은 은은한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 풍경이 마치 거대한 은빛 촛대에 노랗게 일렁이는 촛불을 밝혀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곳에 그런 모양을 한 은빛 촛대가 수백 개가 늘어서 있었다.

자작나무숲은 그처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박수근 미술관에 있는 자작나무숲을 다녀온 이후로는 또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다. 가을이 되어 단풍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자작나무숲이 황금빛으로 물든 광경을 만끽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큰 맘 먹고 찾아간 곳이 바로 자작나무 군락지로 유명한, 인제군 원대리에 있는 '명품 자작나무숲'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탐방로 일부. 하늘을 온통 노랗게 물들인 자작나무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탐방로 일부. 하늘을 온통 노랗게 물들인 자작나무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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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자작나무 단풍

원대리의 자작나무숲에는
지작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여행객.
 지작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여행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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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자작나무숲에 왜 하필이면 '속삭이는'이라는 수식어를 가져다 붙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이 자작나무숲을 찾아가 보면 알 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나무들이 허공중에서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나무도 나무지만, 그 소리도 어딘가 모르게 예사롭지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강원도에는 자작나무숲이 여러 군데 있다. 인제, 횡성, 홍천, 태백 등에 군락지가 형성돼 있다. 그중에 한 곳이, 이곳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다. 이 숲은 다른 군락지에 비해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한다.

자작나무 밀집도도 꽤 높은 편이다. 수령이 30년에서 50년 가까이 되는 자작나무가 90만 그루 이상 자라고 있다. 숲 속에 빽빽이 꽂혀 있는 자작나무들이 장관이다. 나무 끝은 왜 또 그렇게 높은지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봐야만 한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은 단풍이 어느새 절정을 넘어섰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 소리가 마치 바닷가 백사장을 쓸고 지나가는 파도 소리 같다. 노란색 단풍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면서, 숲은 점점 더 빠르게 조락의 계절을 맞고 있다. 그나마 옅은 색을 띤 단풍이 더욱 더 옅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자작나무 숲만이 가지고 있는 은은한 단풍 빛은 여전히 살아 있다.

자작나무 단풍잎은 같은 노란색인데도 은행나무 잎보다는 좀 더 옅은 빛을 띠고 있다. 그래서 자작나무 단풍은 멀리서 보면, 산자락에 마치 수채화를 그리려는 생각으로 여기 저기 살짝살짝 붓질을 해놓은 것 같이 보인다. 침엽수림이 여전히 푸른 상태로 남아 있거나, 다른 활엽수들이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작나무는 가을날에 잎이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것에서마저 '독존'을 고수하고 있다.

자작나무숲 탐방로를 걸어가는 여행객들.
 자작나무숲 탐방로를 걸어가는 여행객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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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는 그저 그 앞에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자작나무는 은박지로 감싸놓은 것 같이 반짝이는 하얀색 나무껍질과 하늘을 찌를 듯 가늘고 곧게 뻗은 몸통이 보통 고고한 게 아니다. 겉모습부터, 검은 색이나 잿빛을 띠고 있는 나무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 모습에서 신비한 기운마저 풍긴다. 그런 나무들이 떼를 지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아무런 특색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풍경을 보여줄 리가 없다.

전국에 아름다운 숲이 여러 군데 있다. 그 중에서 자작나무숲처럼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숲도 드물다. 이 숲을 '명품'으로 부르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 '명품 자작나무숲'이라고 하니까, '또 아무 데나 명품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인다'며 코웃음을 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요즘은 아무 데서나 명품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쓴다. 그러다 보니, 그 말의 진실성마저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이곳의 자작나무숲은 다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자작나무로 만든 움막.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자작나무로 만든 움막.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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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숲은 흔치 않다. 이 숲은 마음을 비우기에 딱 좋은 곳이다. 잡념이 사라진다. 최근에는 이 숲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조금 소란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이 숲은 사람들이 다 차지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다 품어 안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넉넉하다. 숲은 여전히 자유롭다. 사람들은 그 안을 그냥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작나무숲은 또 사람들을 동심에 젖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때마침 도시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단체로 소풍을 나왔다. 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아이들 눈엔 이 숲이 하얀 색 나무 궁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숲 속 여기저기에서 동심에 빠진 어른들이 터트리는 웃음과 감탄 소리가 들린다. 이 숲에 명품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자작나무숲 탐방로에서 서서 기념 촬영을 하는 여행객들.
 자작나무숲 탐방로에서 서서 기념 촬영을 하는 여행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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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만 3km, 등산이 하듯이 찾아가야 하는 자작나무숲

자작나무숲 찾아가는 길가에 서둘러 핀 진달래꽃. 꽃은 피었지만, 잎은 곧 낙엽이 되어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자작나무숲 찾아가는 길가에 서둘러 핀 진달래꽃. 꽃은 피었지만, 잎은 곧 낙엽이 되어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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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안에는 3개의 탐방로가 있다. 탐방로 전체 길이는 3.5km에 달한다. 자작나무숲에는 일부 낙엽송 숲이 포함되어 있다. 낙엽송은 가을 단풍철이 되면 자작나무 잎만큼이나 옅은 노란 색을 띤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낙엽송 군락지이고 또 어디서 어디까지가 자작나무 군락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낙엽송보다는 자작나무가 상대적으로 더 옅은 노란색을 띠고 있다. 낙엽송을 보고 자작나무숲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을 찾아가려면 미리 몇 가지 알고 가는 게 좋다. 자작나무숲은 비교적 깊은 산 속에 있다. 이곳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용차를 이용한다. 대중교통 등 다른 교통편을 이용하는 게 쉽지 않다. 숲 주변에 따로 주차장이 마련돼 있지 않다.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많은 것치고는 이렇다 할 편의시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행객들은 할 수 없이 숲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 2차선 도로변에 차를 댈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곳 도로변에는 늘 자동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 줄이 심할 땐, 몇 백 미터가 될 때도 있다고 한다. 입구에 산불 예방을 위해 등산객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산림감시초소가 있다. 산림감시초소에서는 숲으로 들어가는 자동차들도 통제한다. 숲 안쪽으로는 숲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펜션을 방문하는 차량이나, 유아숲체험원을 찾아가는 어린이집 차량 등 특수한 용무가 있는 차들 외에는 출입을 할 수 없다.

자작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붉은 단풍나무.
 자작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붉은 단풍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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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감시초소가 있는 곳에서 자작나무 숲까지는 3km 가량 떨어져 있다. 임도를 따라서 제법 긴 거리를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이 길은 산책 삼아 올라가기에는 좀 버거운 편이다. 경사가 급한 구간도 많이 나온다. 산길 3km는 평지 3km와는 완전히 다르다. 처음부터 아예 3km를 산길을 따라서 등산을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따라서 이곳을 여행하는 데는 일상복보다는 등산복을 입고 가는 게 좋다.

자작나무숲 위로 바람이 비교적 많이 부는 편이다. 게다가 늦가을이나 겨울철 산 속에서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질 수도 있다. 보온에 신경을 써야 한다. 겨울에는 산길에 눈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 아이젠은 필수다. 산림초소 안쪽은 산과 나무뿐이다. 필요한 물건은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산림감시초소 아래에 작은 가게가 하나 있다. 간단한 먹을거리와 음료수를 살 수 있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자작나무 숲 입구까지 올라가야 한다.

길은 흙길과 시멘트로 포장한 길이 번갈아 나온다. 그런데 이곳의 자작나무숲은 11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 출입이 통제된다. 이 기간에는 특히 산불이 일어날 위험성이 높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다. 12월 15일 이후에는 국유림관리소의 판단에 따라서 출입 통제 기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출입 통제 기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먼 길을 떠나 헛걸음을 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촘촘히 박힌 나무들 사이로 얼핏 얼핏 여행객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촘촘히 박힌 나무들 사이로 얼핏 얼핏 여행객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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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에서 볼 수 있는 가을 단풍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하지만 자작나무숲을 여행하는 데 굳이 내년 가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겨울에 보는 자작나무숲은 가을에 보는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나뭇잎이 모두 다 떨어지고 난 하얀 자작나무숲에 새하얀 눈이 내려 쌓이는 광경이 장관이다. 그 광경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한겨울에 하얀 색 일색인 자작나무가 너무 추워 보이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가녀린 느낌마저도 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자작나무는 수피에 기름기가 많아 불에 잘 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자작나무라는 이름은 나무가 불에 탈 때, '자작자작'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작나무는 차가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속은 매우 따듯한 나무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자작나무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자작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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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자작나무, #인제,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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