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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연락하는 법이 없는 동창 녀석의 전화, "이번 주말 평택에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평택엔 동창 부부가 산다. 부부가 동창이니 우리 둘이서 집으로 놀러 가도 부담이 없다. 딸이 15살인데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우리와도 곧잘 어울린다.

이 세 명의 가족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70%쯤을 섭렵했다. '비박'도 서슴지 않는다는 그들의 등산 제안을 애써 외면하던 나와 내 친구는 그들 부부의 집으로 놀러 가기를 몇 번 하다가 결국은 지난 여름, 설악산 대승령을 시작으로 산행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우리 다섯은 독수리 오형제처럼 산에도 가고 저녁이면 어울려 이런 저런 얘기와 함께 술을 푼다. 얘기 중에 비박이란 말이 나왔다. "비박이 왜 비박(非泊)이야? 잠을 자긴 자니까 산에서 하는 숙박이니 산박(山泊)이라고 하면 좋을 것을" 내가 궁금해하자 부부가 답한다. "'비박(bivouac)'은 한자말이 아니고 야영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다. 사실, 산에서 잘 일 없는 나는 몰라도 되는 말이다.

은티마을 유래비와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 16그루의 경치가 그만이다.
▲ 희양산 입구 은티마을 유래비와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 16그루의 경치가 그만이다.
ⓒ 정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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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의 백두대간 29구간 희양산

산행 날짜는 지난 19일 토요일로 결정됐다. 동창 부부가 우리 초보들과 동반 산행을 위해 결정한 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여러 구간 중 하나라는 희양산! 백두대간의 한 부분이란 말에 흥미가 생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한반도 등줄기를 말하는 것 아닌가. 왠지 거창하다.

평택의 가족은 그들대로 출발하기로 하고, 경기도 광주에서 만난 친구와 나는 동창부부가 일러준 주소지로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출발했다. 우리는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호법 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여주휴게소를 지나 충주 방향의 중부내륙 고속도로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영동고속도로가 정체다. 토요일 오전의 쾌청한 날씨다. 그럼 그렇지.

별 수 없이 중부고속도로를 내쳐 달렸다. 일죽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국도변 휴게소에서 싸간 달걀과 음료로 아침을 대신하고 충주와 수안보를 지나 괴산까지 달려보니 이렇게 가는 편이 거리 차이도 별로 없고,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 보다 경제적이다. 좌우로 충북 내륙의 산골짜기에서 내뿜는 절경도 감상할 수 있다.

광주서 출발한 지 두 시간 반쯤 만에, 우린 '은티마을'이라 불리는 희양산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가 희양산 자락의 주소다. 마을 입구엔 소나무 16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이 마을의 유래가 새겨진 바위가 버티고 섰다.

산자락이 행정구역상 괴산에 속해 있고, 희양산 정상은 경북 문경에 속한다. 등산 안내를 위한 조감도에는 '충주국유림관리소'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희양산은 행정구역 상으로 여기저기 걸쳐 있는 동네다. 막걸리 집 아주머니 말투는 경상도 말씨 같기도 하고 충청도? 아니, 강원도 말씨 같기도 한 것을 보니 산사람들에게 행정구역은 의미가 없다.

이 봉우리들의 연결구간이 백두대간 29구간이라고 한다.
 이 봉우리들의 연결구간이 백두대간 29구간이라고 한다.
ⓒ 정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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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에서 왠 아주머니가 주차할 곳을 안내한다. 호객행위인가 싶어 망설였지만 이내 둘이 먼저 도착할 것을 예상한 동창 부부가 숙식을 예약한 것이다. 아주머니는 아무도 없는 산자락에 도착해 있는 우리 두 남자를 보고 단박에 알아 보신 거다. 막걸리와 두부김치에 노닥거리고 있자니 평택의 가족이 도착한다.

막바지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 산자락 고추밭 풍경 막바지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 정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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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약간 지나서 출발한 산행은 즐거웠다. 날씨가 참 좋았기 때문이다. 습도도 낮고 햇빛도 알맞았으며 산그늘이 그윽했다. 특히 산속에서 보는 초록빛 잎사귀들 사이 사이 울긋불긋한 잎들의 빛깔은 아름답다. 녹색과 빨강 그리고 햇빛의 조화로 눈이 즐겁다.

단풍놀이, 이름없는 산이라도 괜찮아

산골의 물이 말라 흙 바닥이 미끄럽긴 했으나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올라갔다가 올라간 그 길 그대로 내려올 작정이었다. 그래서 희양산 정상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 그 옆 시루봉을 겨냥했다. 헌데 왠일인지 시루봉으로 진입하는 길을 놓친 모양이다.

희양산 정상도 시루봉 꼭대기도 아닌 그 근방 어느 봉우리에 오른 것이다. 등산객이 많지 않은 산이다 보니 가지마다 묶인 리본을 보고 오르던 우리가 이리가도 저리가도 아무런 상관없는 갈래길에서 '사선봉(四仙奉)'을 택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시루봉도 다음 기회에. 아무래도 오르기 전 막걸리 탓이리라. 산행 전 술은 금물!

빨강 초록의 조화가 경이롭다. 이럴 때 고급 사진기의 필요성을 느낀다. 스마트폰 사진으로는 빛의 오묘함을 표현할 길이 없다.
 빨강 초록의 조화가 경이롭다. 이럴 때 고급 사진기의 필요성을 느낀다. 스마트폰 사진으로는 빛의 오묘함을 표현할 길이 없다.
ⓒ 정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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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사선봉'이라고 나무에 붙은 간이 푯말은 '해발 964미터'라고 적혀 있다. 산자락에서 시작되는 총 산행 시간을 왕복 네 시간쯤 예상하면 될 것 같다. 산봉우리에서 싸가지고 간 막걸리와 도토리묵을 먹었는데 그 맛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사선봉 정상이다. 봉우리가 여러 개여서인지 환경을 생각해서인지 흔한 바위 표식하나 없다.
 사선봉 정상이다. 봉우리가 여러 개여서인지 환경을 생각해서인지 흔한 바위 표식하나 없다.
ⓒ 정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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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수리 오형제는 부부가 예약한 이 가게에서 두 끼(김치찌개, 청국장, 고들빼기, 김 등의 화려한 반찬 포함)를 먹고, 아주머니가 직접 담갔다는 막걸리 여섯 주전자(약 2리터들이)를 도토리 묵, 감자전 등의 안주거리와 함께 마셨다.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제공한 이층 방은 공짜다.

장삿속을 드러내지 않는 아주머니와의 대화가 마냥 즐겁다. 처음 부부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가게 앞을 지나고 있던 부부의 하산 길에 느닷없이 나타난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어여 쩌기 가서 우리 아저씨 좀 불러다 줘, 비오니께 꼬추 걷어야 혀, 월렁!"했단다. 아주머니에겐 이웃이 곧 가족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던가, 직장 생활에 찌든 나와 친구에게 동창 부부와 딸은 밝고 맑은 느낌을 전한다. 그 기(氣)를 받아 도시 속에서 또 한 달을 버티기로 한다. 다음 달은 연락이 끊긴 친구를 찾아 남쪽 지방의 산을 찾을 작정이다. 신산(辛酸)한 삶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어 주는 곳은 산 속뿐이다.

날씨가 이번 주가 지나면 꽤 추워질 거라고 한다. 아무래도 단풍구경을 하려면 이번 주말이 올해의 마지막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등산화와 모자 그리고 가벼운 옷가지면 족하니 말이다.

희양산을 권한다. 중부고속도록를 타다 국도를 타고 가면 길도 막히지 않고 그 산엔 등산객도 많지 않으니 북적거리는 걸 싫어하는 이들에게도 괜찮다.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 출발하면 사선봉에 도착할 수도 있다. 물론, 금주하시고 희양산으로 접어드시길!


태그:#희양산, #사선봉,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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