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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곳입니다. 시장은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입니다. 우리에게 시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연재 '전통시장 고군분투기'는 기자를 지망하는 청년들이 시장을 직접 체험하며 느낀 점들을 다룰 것입니다. 장소는 서울의 전통시장 30곳입니다. 취재 원칙은 하나입니다. '시장 문을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 기자 말

연탄불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등어.
 연탄불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등어.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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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사람들이 상가에서 밥을 먹기 위해 몰려나온다.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반면에 점심시간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게를 비울 수 없는 까닭에 주로 배달시켜 먹는다. 손님 한 사람이라도 놓치면 아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밥을 배달하는 식당의 하루는 어떨까? 지난 14일, 동대문종합시장 먹자골목에서 하루를 함께했다.

평화시장을 지나 청계천 전태일 다리를 건너면 동대문종합시장이 나타난다. 이 근방은 1970년대 어두웠던 한국 노동사와 관계가 깊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며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한 지 한 달 뒤인 1970년 12월에 동대문종합시장이 세워졌다. 수많은 노동자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조그마한 골목에 모여들었다. 골목은 점점 커지며 지금의 200m 남짓한 먹자골목이 됐다. 지금은 각종 맛집이 들어서 근처 상인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먹자골목에 들어서면 연탄불에 고기와 생선 굽는 자욱한 연기와 구미 당기는 냄새가 행인의 발걸음을 잡는다. 골목 중간에 위치한 '숙이네'는 배달과 내부 장사를 함께 하는 가게다. 점심 배달은 하루 매출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나머지 60%는 가게로 찾아오는 인근 상인들이 채워준다.

일과 중 체육관 가는 사장님

동이 튼 오전 6시 30분, 원민섭(55) 사장이 가게 불을 켠다. 가게 내부를 청소하고 전날 씻어둔 쌀을 밥솥에 안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좁은 골목 사이로 채소 장수가 손수레를 끌고 식당마다 주문한 채소를 배달한다. 뒤이어 생선과 달걀이 도착한다. 재료의 상태를 꼼꼼히 살핀다. 그 후 배달된 채소를 다듬고 갈치의 지느러미와 내장을 손질한다. 그러는 사이 옆 가게 상인들도 하나둘 가게 문을 연다.

"어제 잘 들어갔어? 몸은 좀 어때? 피곤해서 오늘 지각했구먼!"

가게 앞을 지나는 주변의 상인들과 인사를 나눈다. 원 사장의 손과 입은 쉴 틈이 없다. 상인들끼리 아침부터 이야깃거리가 많다. 비슷한 업종인 식당이 밀집돼있어 서로 경쟁이 심할 줄 알았지만, 산악회를 구성해 일요일마다 함께 등산하러 다닌다. 상인들은 지난 산행의 뒷이야기를 하며 재료 손질의 무료함을 달랜다.

재료 손질을 끝내고 원 사장이 어디론가 급하게 간다. 부족한 재료를 사기 위해 근처 채소가게로 향한다. 양손 가득 재료를 구매해 가게로 돌아오니 직원들이 출근해있다. '숙이네'는 모두 다섯 명이 일한다. 조그마한 가게에서 다섯 명의 업무는 주방에서 설거지와 뚝배기를 끓이는 일, 가게 내부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 주문 전화를 받는 일, 음식을 배달하는 일, 가게 앞에서 생선을 굽는 일, 총 다섯 가지 분야로 분업화되어 있다. 주변 가게의 인원 구성도 비슷하다.

"저 체육관 좀 다녀올게요. 한 시간 후에 봅시다."

밥과 밑반찬을 만들고 장사 준비가 되자 원 사장이 가게 근처 체육관을 간다. 시장을 취재하며 일하는 도중 사장이 운동하러 가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원 사장이 가게를 비운 사이 밖에선 생선 초벌구이를 하고 있다. 초벌을 하는 이유는 생선의 기름기가 빠지는 것과 딱딱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생선을 굽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뜨거운 연탄불 앞에서 생선이 부서지지 않게 구워야 하기 때문이다.

생선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구수한 밥 냄새가 풍기는 오전 10시 30분, 운동을 끝낸 원 사장이 돌아왔다. 장사 준비를 끝낸 직원들과 아침 식사를 한다. 소박한 밥상이지만 점심 장사를 위해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 식사를 끝낸 원 사장이 가게 구석에서 직원들과 휴식을 취한다. 마치 폭풍 전야 같은 분위기다. 오전 11시, 오늘의 첫 배달 전화벨이 울렸다.

정신없는 점심시간, 이곳은 전쟁터

점심 장사 전 원 사장의 표정은 밝다.
 점심 장사 전 원 사장의 표정은 밝다.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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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종합시장 먹자골목에선 밥상이 날아다닌다.
 동대문종합시장 먹자골목에선 밥상이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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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둘! 삼치구이 하나!"

주문이 들어오자 직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양철 쟁반에 밥과 반찬, 뚝배기와 생선 접시가 준비된다. 모두 차려진 쟁반의 무게는 약 3kg이다. 쟁반이 3개가 겹쳐지면 총 9kg을 들고 가는 셈이다. 원 사장은 어깨에 쟁반을 메고 잰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걸어간다.

무게가 상당하지만 걸음을 재촉하는 이유가 있다. '시간이 곧 돈'인 상인들을 위함이다. 보통 주문을 받고 10~15분이면 밥을 배달시킨 상인의 가게에 도착한다. 상인들은 손님들을 상대하거나 각자의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원 사장은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과 음식을 놔두고 곧바로 다음 가게로 이동한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미로 같은 상가 내부를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간다. 원 사장이 장사 준비를 마치고 체육관을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달을 하다 보면 어깨와 팔꿈치 무릎에 무리가 온다. 병원에 갈 시간이 없으니 운동으로 부상을 예방하는 것이다.

생선을 구울 때 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
 생선을 구울 때 나오는 연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
ⓒ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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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니 가게 안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직접 찾아와 식사하는 손님들이 가득한 가운데 주문 전화는 쉴 새 없이 걸려온다. 가게 밖은 생선 굽는 연기가 더욱 짙어진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도 있다. 원 사장은 계속 배달을 나간다. 잠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일 틈이 없다. 모두들 오전에 장사 준비를 할 때와는 표정이 다르다.

"바쁠 때는 직원들도 배달 갑니다. 하지만 웬만해선 제가 가요."

원 사장은 동평화시장에서 25년 동안 청바지 도매를 했다. 경기가 어려워지며 청바지 장사를 접고 주변의 권유로 지금의 식당을 인수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원 사장은 직접배달을 한다.

배달하다 보면 힘든 점도 있다. 정신이 없다 보니 밥 개수가 틀릴 때도 있고 반찬이 잘못 배달될 때도 있다. 그럴 땐 가게까지 뛰어서 갔다 온다. 손님의 입맛이 각각 다르다보니 맛의 기준을 정하는 것 역시 힘들다. 가장 힘든 점은 동대문종합시장의 규제다.

규제 때문에 배달량도 눈에 띄게 줄었다. 동대문종합시장은 A, B, C, D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D동만 외부 음식 반입이 가능하다. A, B, C동은 상인회에서 상권 보호와 위생상의 이유로 각 동에 위치한 식당에서만 식사할 수 있다. 임대가 아닌 개인 소유형태가 많은 D동은 규제에서 그나마 자유롭다.

힘들어도 견디는 이유, 가족 그리고 동료

늦은 점심은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다.
 늦은 점심은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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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2시 30분이 되자 먹자골목이 한산해진다. 손님이 없다고 끝이 아니다. 배달 나간 쟁반과 음식값을 회수해야 한다. 밥을 시킨 상인과 배달하는 상인 모두 바쁜 까닭에 밥값 지급은 조금 한가할 때 이뤄진다. 배달할 때와는 달리 원 사장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식기와 밥값 회수가 끝나니 오후 4시다. 가게 직원들도 고단한 점심장사가 끝나자 다 같이 모여 늦은 점심을 먹는다. 하루 중 두 번째로 앉아서 쉬는 시간이다. 밥을 먹는 직원들의 표정은 밝다.

동대문종합시장이 오후 5시면 문을 닫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날 배달은 끝났다. 가게는 저녁 장사 준비를 한다. 점심 장사 때 더러워진 주방을 정비하고 부족한 물품을 채워 넣는다. 오전에 고장이 난 출입문을 고칠 시간도 이 시간뿐이다. 출장 수리를 불렀지만 문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말에 걱정이다.

이 소식을 듣고 골목 초입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백낙정(55)씨가 공구와 부품을 들고 와서 문을 뚝딱 고쳤다.

"최고야 최고! 맥가이버가 따로 없구먼."

부드럽게 움직이는 출입문을 보고 원 사장의 표정이 밝아진다. 가게 이곳저곳을 살핀 후 원 사장의 고단한 하루가 끝난다. "배달이 힘들어 보이는데, 아픈 곳은 없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원 사장은 어깨에 붙인 파스를 보여주며 "마이 아파"라고 웃으며 철 지난 유행어를 던진다.

원 사장은 보통 오후 6시에 아내와 교대하고 퇴근한다. 오늘은 옆 가게에서 먹자골목 산악회 정기모임이 있다고 한다. 그는 한마디 말을 하고 가게에서 나갔다.

"힘들어도 가족과 주변 상인들이 있어서 버팁니다. 특히 주변에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아주 좋아요. 여기에는 그 외엔 없습니다."

먹자골목에 어스름이 깔리고 점심시간과는 다른 활기를 띤다. 노동을 끝낸 사람들이 모여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은 정겹다. 사람 사는 맛을 느끼고 싶다면 동대문종합시장 먹자골목으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는 김진석 사진작가가 기획하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재학 중인 안형준(29), 임경호(29), 박기석(27) 3명이 취재를 진행합니다.



태그:#동대문, #동대문종합시장, #먹자골목, #전태일, #생선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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