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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과 비문 통해 한자문화권임을 다시 한 번 절감

 

티엔무 사원(Chùa Thiên Mụ, 天姥寺)은 흐엉강 상류에 있다. 전에는 배를 타고 갔지만, 이제는 버스로도 갈 수 있다. 길은 강변 북로를 따라 이어진다. 10분도 안 걸려 버스는 티엔무 사원 앞 주차장에 내린다. 이곳에는 선착장도 있어 배를 타고 오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우리는 티엔무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의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자 네 개의 정문 기둥이 우릴 맞이한다. 기둥에는 불경 구절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계단을 오르면 8각형의 7층 석탑이 나타난다. 이 탑의 이름은 복연보탑(福緣寶塔, Tháp Phước Duyên)이며 높이가 21.24m다. 복된 인연, 의미가 참 좋다. 이 탑은 1844년 처음 지어졌고, 1904년 태풍으로 훼손되었다가 1907년 다시 지어졌다. 탑문 좌우에는 법을 담은 비(法雨)와 법신의 구름(身雲)에 대한 한문 문구가 새겨져 있다.

 

'법을 담은 비가 널리 내려, 초목과 곤충이 골고루 혜택을 받는다, 법신의 구름이 곳곳에 가득해, 허공세계에 광명이 비친다.' 그런데 이 탑의 내부를 볼 수 없는 게 유감이다. 탑의 오른쪽에는 복연보탑비가 있다. 귀부 위에 탑신이 있고, 그 위에 이수 형태의 덮개가 있다. 중국적이고 동양적인 양식이다. 이 탑비에는 탑의 유래에 대한 글이 적혀 있다. 탑비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티엔무 사원 사적비로 향하게 된다.

 

짙은 색 대리석으로 복연보탑과 천왕문 사이에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천모산(天姥山) 영모사(靈姥寺)를 건립하고, 7층 보탑을 세웠으며 큰 종을 주조해 걸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밥상 형태의 기단 위에 비신과 이수를 일체형으로 만들어 얹었다. 비신의 사면에 날개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수의 한 가운데 태극문양이 보인다. 이 비석 역시 동양적이다. 비석 뒤로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전이 있다. 그런데 그 사천왕이 우리나라처럼 크고 무섭지 않다.

 

천왕전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본전인 대웅전으로 가게 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가운데 칸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바깥 칸에 두 분 부처님이 더 있다. 한 분은 신통지승(神通智勝)이라고 썼고, 다른 분은 광운자심(廣運慈心)이라고 썼다. 다른 공간에는 16나한이 있다. 이들은 모두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어 서로 교감하기가 어렵다. 절 옆으로는 요사채 형태의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 오스틴(Austin)이라는 구형 자동차가 한 대 전시되어 있다.  

 

티엔무 사원이 더 유명해진 이유

 

이 자동차가 베트남 불교계의 지도자였던 틱쾅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 스님이 고딘디엠(Ngô Đình Diệm) 정부의 불교 탄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당시 사이공까지 타고 갔던 승용차다. 1963년 6월 11일 스님은 350명의 승려와 함께 시위를 벌이며 종교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틱쾅득 스님은  분신을 선택한다. 그는 사전에 작성한 선언서를 통해 베트남 정부에 네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 베트남 불교도의 열망을 조금이나마 들어 달라. 둘째 부처님의 자비로 베트남 불교는 영원할 것이다. 셋째 승려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투옥하는 일은 말아 달라. 넷째 베트남의 평화를 기원한다. 그는 순교를 통해 탄압받는 베트남 불교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현장에 있던 뉴욕타임스 특파원 할버스탐(David Halberstam)에 의해서였다.

 

"몸으로부터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몸은 천천히 흔들리며 오그라들었다. 그의 머리는 검게 그을려 숯덩이처럼 변했다. 공중에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의 몸이 그렇게나 빨리 타는지 미처 몰랐다. 나는 이곳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의 흐느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소리쳤고, 너무나 당황해서 메모 하거나 물어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그는 불타는 동안 꼼짝도 안 했고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의 몸이 보여주는 평정함은 주변에서 울부짖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해 11월 쿠데타에 의해 고딘디엠 정부가 무너졌다. 그 후 구엔반티우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냉전의 여파로 1965년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후 10년간 베트남은 정말 어려운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틱쾅득 스님과 티엔무 사원의 인연으로 오스틴 승용차가 이곳에 전시되었고, 그로 인해 티엔무 사원이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절 뒤로는 넓은 정원이 있고, 그곳에는 보라색 연꽃이 한창이다. 그리고 정원 뒤로는 5층 석탑이 있다. 역시 8각형으로 틱동하우(Thích Đôn Hậu)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설명은 없다. 우리는 들어갔던 길과 다른 길을 통해 절을 빠져 나온다. 절 내부는 전체적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다. 나무도 비교적 오래 되어 보이고 잔디도 잘 가꿨다. 그리고 곳곳에 분재 또는 화분이 있어 정돈된 느낌이다. 베트남의 절은 중국의 절보다 훨씬 친근감이 든다.

 

석인상도 뾰족 삿갓을 쓰고 있다

 

우리는 이제 다음 행선지인 카이딘 황릉(Lăng Khải Định)으로 간다. 카이딘 황릉은 흐엉강을 따라 올라간 다음 투안 다리를 건너가면 된다. 차에서 내리니 계단과 삼문(三門)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계단을 따라 네 개의 난간이 있고, 그 위에 용 부조가 자리 잡고 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꿈틀거리며 내려오는 모습이다. 생동감이 있는 몸체에, 앞발로는 여의주를 감싸고 있다. 우리는 오른쪽 계단을 통해 황릉 영역으로 들어간다. 황릉은 가로 48.5m, 세로 117m의 긴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 철문을 들어가면 평지가 나온다. 이곳에는 양쪽으로 재실(齋室)이 있다. 여기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 석상(石像) 영역에 이를 수 있다. 계단의 끝에는 패방 형식의 문이 있다. 패방을 지나면 좌우로 석상들을 볼 수 있다. 문인석, 무인석, 시종석, 동물석상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문인석은 도포를 입고 무인석은 칼을 들고 있다. 그 뒤에 있는 시종들은 뾰족 삿갓을 쓰고 있다. 이들 석상 옆에는 커다란 코끼리와 말이 서 있다. 사후 세계의 황제가 나들이할 때 타고 다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당 가운데는 응릉비(Bi đình Ứng Lăng, 應陵碑)가 있다. 응릉은 카이딘 황제릉의 능호다. 내용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비를 2층의 건물이 감싸고 있는데, 건축 양식이 서양식이다. 그렇지만 기와형식의 지붕과 조각 그리고 장식은 동양적이다. 조각은 대부분 용(龍)이고, 기쁠 희(喜)자도 보인다. 여기서 다시 2층의 계단을 올라야 사후 안식처인 계성전(啓成殿)에 이르게 된다. 계성전은 카이딘 황제의 동상과 위패가 모셔진 일종의 장제전이다.

 

계성전 내부는 서양식 궁전이다. 바닥은 대리석이고 벽에는 타일을 붙였다. 그렇지만 벽에 장식된 문양이나 동식물은 동양적이다. 궁전의 한쪽에는 황제가 사용할 그릇과 다기가 진열되어 있다. 철과 도자기로 만들었다. 계성전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실이 세 부분으로 나눠진 제실을 이루고, 후실은 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실 가운데 제단이 있고, 한 가운데 위패 대신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앞에 타일로 장식한 화려한 제단과 향로가 있다. 이곳에는 카이딘 황제의 황동 좌상도 있다.

 

카이딘 황제는 어떤 사람인가?

 

카이딘(Khải Định, 啓定: 1885-1925)은 응유엔 황조의 12번째 황제다. 1916년 31살의 나이로 황제에 등극했다. 1920년부터 자신의 능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그 능은 아들인 바오다이(Bảo Đại, 保大)에 의해 1931년 완성되었다. 카이딘은 자신의 능뿐 아니라 궁전을 새로 짓는 등 토목사업을 벌여 백성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프랑스의 눈치를 보는 정치를 했다. 그래선지 남아 있는 사진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

 

그는 정치보다는 건축, 의상과 메이크업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또한 1922년 5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개최된 박람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으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판추 트린(Phan Chu Trinh) 같은 사람은 황제의 7가지 죄를 열거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지식인들로부터 조롱을 받으며 살았다.

 

카이딘 황제는 통치 기간 내내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12명의 부인을 두었음에도 자식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 아들이 바오다이로 13대 황제가 되었다. 1945년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이 물러나고, 베트남이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응유엔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카이딘 황릉을 나오면서 나는 외화내빈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외관은 화려하지만 내실은 없었던 응유엔 황조의 역사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태그:#테엔무 사원, #복연보탑, #틱쾅득 스님, #카이딘 황릉, #계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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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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