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파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른바 국정원 발 '물타기'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물타기'는 본래 '물을 타서 농도를 묽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물타기'가 정치용어로 사용되면, 궁지에 몰린 정치 집단이 국면을 유리하게 전환하기 위해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정치공작을 의미하게 된다. 정권은 '물타기'를 통해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여론을 호도하여 위기 탈출을 꾀한다. '물타기'는 흔히 '물타기 전술', '물타기 공작' 등으로 사용된다.

국정원은 국정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대규모 '심리전단'을 운영하면서 국내 정치에 개입하고 여론을 조작해왔다. 국내 정치, 특히 대통령 선거에 대한 정치공작 사실이 뚜렷해지자, 존립 위기에 몰린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것도 모자라 느닷없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국회의원 등 당원들을 이른바 '내란예비음모' 혐의를 씌워 체포하였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국정원의 공안정국 조성에 적극 호응하여, 아예 이석기 의원의 제명안까지 제출하였으며 이제는 통합진보당 해산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위기에 몰린 정권과 집권여당이 합세하여 정당 해산까지 무리하게 요구하고 나서자, 이들의 행각이 전형적인 '물타기' 공작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펼쳐지는 정치공작의 본질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유신정권 당시인 1974년 4월 3일 발생했던 '민청학련 사건'을 재조명해본다.

반 유신 투쟁으로 위기 맞은 박정희 정권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 동아PDF

관련사진보기


'민청학련 사건'이란 1974년 4월 3일, 유신독재정권에서 선포한 '긴급조치 4호'에 의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1974년 4월은 박정희 유신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이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민청학련 사건이 이른바 '물타기 공작'으로써 어떻게 유신독재정권의 연장에 이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민청학련 사건은 유신 체제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유신 헌법을 선포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개악하는 한편, 대통령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자신의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특히 박정희는 유신 헌법을 통해 대통령이 국회 해산권 및 법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하여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독점한 데 이어, 이른바 '긴급조치'라는 무소불위의 권력까지 쥐게 되었다.

유신 헌법 제53조에 의하면, '긴급조치'는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이다. 한 마디로 유신 체제는 초법적 발상의 결과물이었으며, 국민의 기본권마저 제약하면서 종신집권을 꾀하려는 박정희의 구상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유신독재체제는 존립기반이 취약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 헌법의 내용과 유신체제 수립 과정에 대해 국민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내기란 불가능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수립을 강행하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한국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었고,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일체의 논의와 주장을 금지시켰다.

여기에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던 야권 정치인, 김대중의 존재 역시 박정희 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94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된 박정희는 유력한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희대의 인권유린을 자행하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 유신 투쟁을 전개하던 김대중의 납치는 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의 반 유신 투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한국 정치 지형은 유신 체제의 등장으로 유신이냐, 반 유신이냐의 대결로 펼쳐지게 되었다.

1973년 9월, 개강과 더불어 고조되기 시작한 대학생들의 투쟁은 사회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으며 파문을 일으켰다. 장준하, 백기완, 함석헌, 지학순, 윤보선 등 지식인·종교인과 야당인사들은 대학생들의 투쟁에 보조를 맞춰 유신헌법 개헌을 위한 '100만인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정적을 제거하여 종신 집권을 꿈꾸다 오히려 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연달아 발표하여 반독재 투쟁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모든 행위도 금지"하였다. 또한 긴급조치 1호는 이에 대한 방송, 출판, 보도 역시 금지하였다. 긴급조치 2호는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인사를 처벌하기 위한 비상군법회의 설치 방안과 사건 수사를 위한 중앙정보부장의 지위, 역할을 규정하여 중앙정보부 주도의 공안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 조치 1호를 위반한 혐의로 유신헌법 개정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한 고 장준하 선생을 체포하였으나, 반독재 투쟁은 오히려 더욱 확산되어 갔다. 당시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은 교내에서 지하신문 발행과 동맹휴학 등의 방법으로 전환되었고, 종교계 일각에서는 일부 지식인과 교회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비밀 개헌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국면 전환 시도

이러한 가운데 1974년 4월 3일 느닷없이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 정권은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확증을 포착하였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수사를 주도했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무려 1024명을 조사하였고, 180명을 구속 기소하였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검거 선풍이 몰아치면서, '유신 vs. 반 유신'의 대결구도를 순식간에 '자유대한 vs. 친북용공'의 구도로 전환하려 시도했다. 박정희정권은 등장부터 '반공 이데올로기'를 집권 기반으로 삼은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체제 대결을 펼치고 있는 엄중한 시기에 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는 친북 용공'이라는 식의 전형적인 정치공세를 펼쳐 그들에게 유리한 정치국면을 형성하는데 민청학련 사건을 이용했다.

중앙정보부는 수사 과정에서 이들이 북한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한국 사회에 반공분위기를 조성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이 "1973년 12월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계의 지하공산세력, 재일조총련 계열,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용공세력, 국내의 반정부인사 및 그리스도교인 중 일부 반정부 세력과 결탁, 4월 3일을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 혁명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보부는 특히 체포된 인사들 중 '인혁당 사건' 관련자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 8명에 대해 사형 확정 후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당시 수감된 많은 인사들은 1975년 2월 15일, 국내외의 거센 비난에 직면한 박정희정권의 정치적 판단에 의하여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보부의 사건 수사가 별다른 물증도 없이 진술에 의존했으며, 그 진술조차 잔악한 고문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5년 12월에 이르러, 민청학련 사건은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재조사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으로 결론 나고 말았다. 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된 것이었음이 역사적으로 확증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을 돌아보았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물타기 공작'의 특징은 ① 시기적으로 정권의 위기가 심각하게 도래한 때에 발생한다는 점 ② 내용적으로 북한과의 연계를 강조한다는 점 ③ 별다른 물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무리하게 수사를 강행한다는 점 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물타기 공작'은 정권이 느끼는 위기의 강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즉, 정권의 위기가 심각할수록, '물타기 공작'의 특징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민청학련 사건은 유신독재에 항거한 정당한 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과 연계시켜 국면 전환을 시도한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 '유신 최대의 조작극'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현대판 민청학련' 사건으로 결론날 것

2013년 하반기, 박근혜정권이 느닷없이 제기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예비음모 주장을 민청학련 사건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국정원이 주장한 이석기 국회의원 등 통합진보당 당원들의 혐의 내용은 여전히 국정원이 매수한 프락치의 녹취록에만 근거하고 있을 뿐, 이렇다 할 물증은 전혀 없다.

또한, 내용적으로 보아도 혐의자들이 이른바 '종북세력'임을 강조하며 북한과의 연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마저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국정원은 내란예비음모라는 혐의사실의 입증이 어려워지자 '여적죄'라는 다른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타진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수사가 무리하게 진행된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박근혜정권이 느끼고 있는 위기와 다급함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여 여론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권의 정당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국면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국면 전환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국정원이 주장하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예비음모 혐의가 '물타기 공작'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결국 국정원의 주장은 현대판 민청학련 사건으로 결론 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훈 기자는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입니다.



태그:#물타기, #민청학련, #통합진보당, #이석기
댓글1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