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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인기배우 마를린 몬로가 한국전선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1954. 2. 16.)..
 당대 최고의 인기배우 마를린 몬로가 한국전선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1954. 2. 1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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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인연

"고마워요. 나는 그런 줄도 몰랐지요."
"아무튼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천만 다행이우."
"나도 그때 준기 동생 땀 냄새가 생각나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깊은 인연이에요."
"깊은 인연?"
"그렇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섹스도 이렇게 자연스러운지도."
"덩말 기렇군요. 순희 씨."
"당신, 날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워요."

그들은 그때부터 서로 간 누이, 동생이라는 말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서로 '당신' '자기' '씨'라고 불렀다. 남녀간의 섹스는 두 사람의 거리를 좁히는 묘약이었다.

"내레 이제는 죽어도 돟수(좋소)."
"싫어요. 나에게 이런 기쁨을 가르쳐 주고…."
"순희 씨는 이제부턴 다시 내레 애인이야요. 긴데 당신이 떠나면 앞으루 만날 수도 없디 않수."
"미국으로 오세요."
"메라구(뭐라고), 미국으로."

순희는 눈을 깜빡거렸다.

마를린 몬로가 한국전선 위문공연을 하고자 무대로 나오고 있다(1954. 2. 16.).
 마를린 몬로가 한국전선 위문공연을 하고자 무대로 나오고 있다(1954. 2. 16.).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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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추

"거 먼 미국 땅을."
"당신의 그 열정이라면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어요."
"길쎄."
"도전해 보세요. 이 순희를 만나고 싶다면."
"생각해 보겠수,"

"근데 고추는 역시 조선고추가 맵고 맛있더군요."
"머이?"
"조선고추가 맵고 맛있다고요. 조선사람은 역시 조선고추를 먹어야 하나 봐요. 아주 속이 시원해요. 당신 고추 맛이 맵고 좋더라고요."

순희는 준기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정말?"
"비행기 값이 아깝지 않네요."
"내레 당신 몸 냄새가 기막히누만."
"정말?"
"기럼, 아주 죽여주누만. 내레 여태까디 당신 기다린 보람이 이서야. 내레 당신의 거(그) 몸 냄새를 닞디 못해 스무 해를 넘게 남넉(남녘) 땅에서 당신을 찾아 헤맸디."
"죄송해요. 대한문에 나가지 않아서."
"내레 모를 사연이 있었을 테지."
"나는 당신이 포로송환 때 북으로 간 줄 알았지요. 당신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하셨잖아요."
"기랬지. 긴데 포로 송환심사대에 들어가니끼니 불효막심하게도 오마니 얼굴보다 당신 얼굴이 먼저 떠오르더구만. 기래 백지에다 'S(에스)' 자를 썼디."
"전 그런 줄을 까마득히 몰랐어요." 

여군들의 집체훈련
 여군들의 집체훈련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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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긴데 대한문에서 스무 해나 허탕을 테도(쳐도) 언젠가는 당신이 꼭 나타날 것만 같아 해마다 빠트리디 안쿠 꾸준히 나갔디."
"바보."
"내레 바보가 아니야요. 이렇게 만났으니 기다린 보람이 있잖수."
"이번에 만나지 못했어도 내년에도 나갈 예정이었어요."
"기럼, 기게 내 삶의 전분데. 나가구 말구."
"당신은 진짜 바보."
"메라구?"
"진짜로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요."
"머이?"

그들의 몸은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온통 땀으로 젖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끝나자 순희가 품속에서 속삭였다.

"아주 시원했어요. 귀이개로 구석구석의 귀지를 청소하듯 말이야요. 당신 침술이 아주 끝내 주네요."
"나두 꽉 막힌 콧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야요."

교실이 불타버린 빈 터에서 수업을 받는 어린이들(서울 은평, 1950. 10.)
 교실이 불타버린 빈 터에서 수업을 받는 어린이들(서울 은평, 1950. 10.)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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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순희는 히죽 웃고는 준기의 품을 빠져나간 뒤 머리맡에 놓인 포트의 물을 반이나 마시고 욕실로 들어갔다. 순희가 욕실에서 나온 뒤 준기도 욕실을 다녀왔다. 

"당신, 이 좋은 솜씨를 그동안 어찌 묵히며 살았어요?"
"언젠가는 당신을 만날 줄 알고 기때 쓰려구 마냥 묵히며 기다렛디."
"네?"
"오래된 산삼일수록 좋다디요."
"고마워요. 지난날 당신은 생명의 은인이었는데, 이제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네요. "
"나두 마찬가지야요."
"사실 나. 몇 해 전부터 우울증이 심했어요. 근데 당신이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자 거짓말처럼 사라지더라고요."
"나를 만나 이제 우울증이 사라젯다믄 다행입네다."
"그런가 봐요."

그들은 다시 열락의 강을 노 저어 거슬러 올라갔다. 24년간의 긴 기다림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그들이 가는 물길에는 여울도 나오고 폭포도 나왔다. 그 강을 다 거슬러 오르자 비경의 산이 나타났다. 그들은 산을 오른 뒤 정상에서 '야호!'를 외쳤다.

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구미 시가지와 낙동강(2004. 12. 1.)
 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구미 시가지와 낙동강(2004. 12.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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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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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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