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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15 선거에서 광범위한 부정선거가 발생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아 생계고통이 극심한 그때였지만 '부정선거만은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는 널리 퍼졌다. 최초 시위는 마산에서 발생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던 이날, 경찰의 첫 발포가 있었다. 16명이 죽고 72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위험한 선택'

하지만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담화를 통해 "공산당 개입과 지령에 의한 시위"라며 이념 공세를 폈고 그 증거로 숨진 시위 학생의 호주머니에서 불온 문서가 나왔다고 선전했다. 시위는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시위 학생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불온 문서는 당시 경찰이 진실을 조작하기 위해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와 경찰의 발포, 그리고 공산당 개입 의혹으로 어수선하던 그때, 사람들은 한 고등학생의 행방을 찾았다. 시위 도중 사라진 17살의 남학생이었다. 4월 11일, 마침내 실종된 학생이 발견됐다. 마산항 앞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건져진 그는 당시 마산상고 1학년에 재학중이었던 김주열이었다. 당시 김주열의 주검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상태였다.

사람들의 분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양태로 번져갔다.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에서 '살인정권 타도'라는 구호가 등장한 것이다. 김주열의 죽음은 분노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촉발점이 되었다. 마침내 12년간 장기독재하던 이승만 정권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4월 18일 발생한 고대생 항의시위 습격 사건이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이 이정재 등 깡패들을 동원하여 고대 시위 학생들을 상대로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게 된 이 사건을 기화로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국민의 분노가 수습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되자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부정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시위에 나선 국민을 향해 경찰이 총격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하지만 총구를 통해 부정한 권력을 지키려했던 최인규의 마지막 저항은 끝내 국민의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고 발포 명령자였던 최인규는 이후 사형대에서 마지막 숨을 내려놓았다.

국정원의 관권 부정선거 의혹으로 촉발된 국회 국정조사가 '사실상' 파행으로 문을 닫았다. 2012년 12월 12일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으로 불거진 이 사건은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상처를 남기며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청문회 초유의 '증인 선서 거부 사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16일 오후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를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16일 오후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를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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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전개 과정에서 매우 불행한 여러 선례가 확대 재생산되어 가는 양태를 보이고 있다. 시작은 국정원 직원의 '셀프 감금' 논란이었고 불행한 선례의 대미는 국정원 국조 청문회에 출석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증인 선서 거부'였다.

중간 과정에서 벌어진 선례 역시 파격적이었다. 대선을 3일 앞둔 2012년 12월 16일 밤 11시에 있었던 서울 경찰청의 국정원 댓글사건 중간 수사결과 발표 역시 대한민국 선거사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비극'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3·15 부정선거 이후 부정선거의 진실을 은폐하고자 경찰이 전면에 나선 두번째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이뿐인가. 부정선거에 개입한 현직 국정원 직원을 보호한다며 청문회에 가림막이 설치되고 그 안에서 국민적 의혹 대상자가 모범 답안을 가지고 같은 말만 되풀이한 것은 부끄러운 역사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최대 압권은 원세훈과 김용판이 보여준 '증인 선서 거부'였다. 필자는 이들의 증언선서 거부를 지켜보며 불현듯 지난 3·15 부정선거 당시 국민의 심장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린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떠올렸다. 3·15 선거는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그런데 당시 자유당 정권과 최인규를 위시한 이승만 내각은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오히려 "공산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며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의 항의 시위를 호도했다.

지금의 새누리당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정원의 관권 부정선거를 여전히 부인하고 오히려 오히려 '20대 국정원 여직원 인권 유린 사건'이라 명명하고 있다. 나아가 새누리당 원내대변인 신의진 의원은 지난 4월 24일 브리핑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해 "민주당은 북한과 종북 세력이 하는 주장을 똑같이 하고 있다"며 극단적 이념 공세를 편 바 있다.

제1공화국 시절의 이승만 대통령과 곽영주 경무관. 왼쪽으로부터 최인규 내무장관, 김정렬 국방장관, 이강석 소위(이승만의 양아들), 이 대통령, 곽 경무관(양산 든 이).
 제1공화국 시절의 이승만 대통령과 곽영주 경무관. 왼쪽으로부터 최인규 내무장관, 김정렬 국방장관, 이강석 소위(이승만의 양아들), 이 대통령, 곽 경무관(양산 든 이).

다시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돌아가 보자.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이승만은 '대통령 하야'라는 파국만은 피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린 4월 12일에도 국무회의에 참석한 최인규 등은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공산 계열의 책동"이며 "1차로 민주당이 선동했고 2차로 공산당이 선동한 듯하다"고 보고했다.

힘으로 진실을 억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29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서야 진실은 밝혀졌다.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미국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부정선거의 핵심이었던 부통령 후보 이기붕 일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정치 깡패로 동원되었던 임화수와 이정재 등은 모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끝으로 국민에게 발포를 명령한 내무부장관 최인규 역시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 사형대에 서야 했다. 제1공화국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국민 50.1% "국정원 선거 개입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 봐도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은 더 이상 의혹이 아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부정선거가 아니라고 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선거 운동을 하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묻고 싶다. 이같은 방식으로 국정원이 재차 개입해서 다음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패배한다 해도 결과에 승복하겠는가? 새누리당이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현재까지 나온 검찰 수사 결과 발표와 국정원 국조를 통해 확인된 사실만 봐도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는 <중앙일보>가 국정조사 청문회 직후인 20일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7%포인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정치공작·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 17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정치공작·대선개입 규탄 제8차 범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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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문회 결과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있었다"고 답한 국민은 50.1%였다. 과반이 넘는 국민이 국정원의 선거 개입에 동의한 것이다. 반면 "동의할 수 없다"는 답은 27.1%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 모른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진짜 바보'들이다. 또한 관권 부정선거에 대한 진실 규명은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났다는 것을.

박근혜 대통령, 기회를 놓쳤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국정원 국조는 민주당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이번 국조는 오히려 국정원의 관권 부정선거와 관련하여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가 어떤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이같은 부정선거에 어떤 관여 사실이 있는지 그 의혹을 밝히는 자리가 되어야 했다. 이를 통해 박 대통령은 국민 속에 자리 잡은 부정선거 의혹 시비를 떨쳐야 했다. 그래야 진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인정받고 정권의 정통성 역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원지인 국정원이 부정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NLL 대화록을 공개하고 본질을 훼손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새누리당 역시 이를 받아 국정원 국조를 의도적인 파행으로 몰아갔고 결국 원하는대로 국정원 국조는 파행속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 역시 자신에게 쏠리는 '국민적 의혹' 해소는 고사하고 부정선거 의혹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는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 '득이 아니라 불행'으로 남을 것이다. 남은 임기 내내, 그리고 이 의혹에 대한 해명 없이 설령 임기를 모두 마친다 해도 그에게 드리워진 '부정선거 수혜 의혹'은 영원한 주홍글씨로 따라다닐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모든 정점에 원세훈과 김용판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로 내몬 것 역시 국민의 뜻과 달리 부정선거 책임자 처벌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임을 명심해야 한다.

더 이상 국민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방관할 때마다 국민의 분노는 폭발 발화점을 향해 타들어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민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의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국민에게 제대로 된 해명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에게 대통령 직에서 하야 하며 이승만이 남긴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것을 권한다.

"그렇게 망측스러운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이 없지. 불의를 보면은 일어나야 해."


태그:#국정원 국조, #3.15 부정선거, #증인 선서 거부,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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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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