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화천 학습관. 농촌지역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화천 학습관. 농촌지역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뉴스 좀 보자."
"안 돼. 연속극 봐야 해! 이따 자정뉴스 보면 되잖아. 또 지상파방송 뉴스는 편파적이라 안 본다며? 보고 싶으면 인터넷으로 검색해."

오후 9시. 아내와 심심치 않게 TV 채널을 두고 다툰다. 심지어 "TV를 내 돈으로 샀니, 네 돈으로 샀니"하는 초등학교 수준의 말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휴일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야구라도 볼라치면 우리 부부의 대화는 한층 더 저속해진다. 

우리 집엔 올해 고3인 입시생 아들이 하나 있다. 그런데 부모라는 사람은 서로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법석이다. 이게 과연 수험생 부모가 할 짓인가.

실오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의 수험생 부모들

오는 11월 7일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채 3개월도 남지 않았다. 수험생들에겐 한시가 금쪽같다. 전국적으로 입시설명회 및 대규모 박람회도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단다. 또 학부모들은 고액의 입시컨설팅도 마다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자녀의 대학 진학을 위한 사주(四柱)를 봐주는 역술인도 있다는 웃지 못 할 뉴스가 등장할 정도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대이리 길옆에 위치한 미륵바위. 해마다 9월과 10월경,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찾아 절을 한다. 이 바위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조선말엽 이 마을에 장아무개라는 선비가 살았었단다. 그 선비는 습관처럼 이 바위에 정성을 들였다. 그 때문인지는 선비는 후에 장원급제했고, 그 입소문을 타고 요즘 이곳을 찾는 수험생 부모들이 부쩍 많아졌다.
미륵바위. 언제부터 수헙생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곳으로 변했다.
 미륵바위. 언제부터 수헙생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곳으로 변했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2012년 우리나라의 사교육비가 19조 원이 넘는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렇게 높은 사교육비 대부분은 도심지 학생들에 해당된단다. 농촌마을 수험생 부모들은 빈부 격차에 대한 괴리감도 느낀다.    

"난 집에서 제대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네. 집사람은 (나보고) 집에 오지 말고 회사 기숙사에서 자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아이 얼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

나와 같은 고3 수험생을 둔 서울에 사는 친구의 넋두리다. 직장일로 술을 마셨을 때는 집안 출입이 완전히 금지된다. 아니 봉쇄된단다. 회사 인근 여관에서 자고 나면 다음날 그의 아내가 속옷과 넥타이 등을 가져다 준단다.

"덥다고 우리끼리 어디 놀러 가면 애가 신경 쓰지 않겠어요?" 

그 친구는 금년도 찜통 무더위에도 가까운 계곡 한 번 가지 못했다고 했다. 부모도 고3인 아이와 똑같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부모로서 최소한의 도리 아니냐는 것이 그의 아내 이론이기 때문이란다. 에어컨이라도 틀면 "아이가 지금 학원에서 땀을 흘리며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당신 생각이 있는 사람이냐"는 핀잔을 듣는다. 이런 핀잔을 듣기 싫어 온몸에 땀띠가 범벅이 되어도 선풍기로 견딘다고 했다. 

내 아들도 올해 고3 수험생이다. 그런데 아내와 나는 TV를 보겠다고 쌈박질이다. 아들이 대학을 포기할 정도로 공부를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시골학교지만 1등과 2등을 오르락내리락 할 정도이고, 수능모의평가에서도 늘 상위권을 유지한다. 그런데 부모라는 사람들은 '야구를 보겠다고, 연속극을 보겠다'고 치졸한 싸움을 한다. 어찌된 일일까.

시골 군의 어쩔 수 없는 선택, '화천 학습관'

화천 학습관 아이들. 외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문화도 배운다.
 화천 학습관 아이들. 외국인들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문화도 배운다.
ⓒ 신광태

관련사진보기


"인구감소 원인이 뭔지 생각해 봅시다."

2003년 화천군 인구가 2만 명대로 하락했다. 자칫 자치단체 존망 위기까지 몰렸다. 당시 정갑철 화천군수는 인구 늘리기 방안보다 인구감소 원인분석에 나섰다.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도심지로 이사를 가는 학생들과 그 부모들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

"제도적 뒷받침을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정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제도적 뒷받침을 한단 말인가. 지역 유지들과 공무원들이 수십 차례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학습관을 만들자"는 의견으로 집약됐다. 학습관은 기숙형 학습공간이다. 즉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면 집으로 귀가하는 대신 학습관이란 곳에서 식사를 하고 늦은 밤까지 입시공부 매진할 수 있도록 하고, 그곳에서 잠을 자고 다시 학교로 등교하는 시스템이다.

과목은 아이들이 가장 부담을 갖는 과목인 국어와 영어, 수학 위주로 한정하고, 대도시에서 우수한 강사들을 섭외했다. 강사들은 어떻게 하든 학생들의 실력을 어느 정도까지 올려놓아야 한다는 부담을 안아야 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의 실력 향상을 꾀했다.

그런데 문제는 학습관 여건상 화천지역에 있는 4개 고등학교 전교생 입교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거다. 6개월마다 학습관 입교생을 포함해 전교생들이 입교시험을 치르도록 제도화했다. 중학교 3학년생부터 고3까지 시험을 통해 학년마다 상위 15등까지 입교자격이 주어진다.

학습관에 입교한 학생들의 부모는 쾌재를 불렀다. 식비만 내면 별도의 학원비 등 사교육비가 전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집에서 눈치를 볼 일도 없다.

입교한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집에 다녀간다. 지나친 스파르타식 교육이 아니냐는 말도 들렸다. (학습관 선생들의) 지나친 성과의식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현장학습, 유명인 초청 교양강좌, 군부대 체험 등 다양한 교과로 변경되기도 했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 오후엔 전원 귀가하는 시스템으로 구조를 바꿨다.

지역여건이 이렇게 바뀌자 (아이의 교육을 위해 초등학교 때)외지로 아이를 전학시켰던 부모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무조건 도시로 나가면 공부를 잘할 거라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많지는 않지만 도심지에서 산골 학교로 유학을 오는 역현상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나름의 성공...그러나 학교가 아니라 '학습관'이라니

2013년 8월 현제 화천군 인구는 2만5000명을 넘어섰다. 학습관 운영을 통한 인구증가 시책은 나름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씁쓸한 면도 있다. 학교라는 교육기관 외에 학습관이란 기형적 구조가 생겨나야 하는 현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여전히 학부모들과 수험생들의 혼선만 조장하는 정책만 쏟아낸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본고사가 있던 1970년대. 그때부터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문제점은 늘 제기되었고, 교육당국은 그에 따른 대책을 발표해 왔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과 크게 변한 게 없는 듯하다. 몇 십년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으면 특단의 대책이 나올 만도 한데, 이렇다 할 뾰족한 대안도 없다.

"인마, 뭐하냐? 통닭 시켜 놓았으니까, 나와서 TV보면서 먹자"
"공부해야 되는데..."
"공부는 지금까지 많이 했으면 됐어. 나와"

일요일 저녁 학습관에서 돌아온 아들 녀석을 TV앞에 앉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능시험일. 이게 수험생 부모가 아이에게 할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아이가 건강한 사고를 하고 입시에 부담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깟 인류대가 뭔 대수인가.

다음 주말엔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미루었던 가족여행을 동해안으로 결정했다. 물론 아들에겐 수험서 등을 일체 가져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다. 내 아이에게 만큼은 입시준비 기간이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 아닌 '낭만의 추억'으로 기억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태그:#화천학습관, #수학능력시험, #입시, #화천군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밝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오마이뉴스...10만인 클럽으로 오십시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