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살인자의 기억법> 책표지.
 <살인자의 기억법> 책표지.
ⓒ 문학동네

관련사진보기

소설가는 창작할 때 보통 캐릭터를 설정해 놓고 그를 사건 위에 올려놓은 후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받아 적거나 묘사하고 혹은 시작과 중간 끝까지 사건을 확실히 해 놓고 그 틀 안에 캐릭터의 행동을 제한시킨다.

개인적으로 캐릭터를 공들여 만든 후 디테일한 사건들은 캐릭터에 의지해 써내려가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들의 작품에는 흡사 옆집에 살고 있는 듯한 생 경함을 가져다 주는  캐릭터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는 이러한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준다. 작가는 "한 인물이 등장했기에 그 인물을 따랐고" 그 결과 이 세상 어딘가에 숨 쉬고 살아있을 법한 주인공을 탄생시켰다.

최근 기억부터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이자 연쇄살인범이었던 일흔 살의 김병수. 연쇄살인범답게 그는 무엇을 보든지 참 독특하게 읽어낸다. 한 예로 그가 미당의 시 <신부>(첫날밤 자세 그대로 신랑을 기다리던 신부가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자세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신랑이 그녀를 건드리자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읽어낸다.

"나는 그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었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시체. 그걸 어떻게 달리 읽겠는가?"

이건 작가가 머릿속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대사가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캐릭터와 혼연일체 해야 나올 수 있는 살아있는 대사이다. 혹자는 작가는 왜 그렇게 '살인자'에 혹은 '죽음'에 집착하느냐에 볼매스러운 이야기를 던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메타포일 뿐이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전달해줄 캐릭터를 선택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김병수의 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본의아니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공포를 느끼는 김병수의 모습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을 느낀다. 나는 적어도 시간은 그보다는 많이 갖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초기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나오는 캐릭터 '자살 안내인'의 이야기에 반했던 사람이라면 이번 작품에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만큼 김병수가 내뱉는 말에도 위트와 인용과 비유가 아주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 이는 모 인터뷰에서 작가가 밝혔듯이 소설을 쓸 때 스토리는 다 설정하지 않아도 인물에 대해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한 덕분이다.

주인공이 읽었을 법한 책들을 쌓아놓고 소설을 쓰기에 가능한 것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다가 쉴 때는 그 책들을 읽으며 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소설에 넣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불경이라던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같은 철학서 아니면 <오딧세이아>같은 서사시를 읽는 김병수의 모습이다.

"수조에 손을 넣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물고기를 건져내야 할 때의 기분"을 자아내는 인지검사 따위를 받으며 김병수는 언어를 포착하고 끝내 살해한다고 시인에 대한 정의에 코웃음을 치며 생각보다 번다라고 구질구질한 작업이 '살인'임을 밝힌다. 또 데려다 키운 딸아이가 왕따당하는 것이 못내 안쓰러워 연쇄살인범도 해결할 수 없는 일. '여중생의 왕따'임을 목록 화하며 애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나면 증후군이 하나 따라 나오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비유를 써서 말하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더욱이 좋은 작품을 보면 뭐라도 쓰지 않으면 안절부절하게 되는 건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고민하던 화두를 넌지시 던져주기 때문은 아닐까? 이번에 나를 이끈 사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을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고 욕도 안하는 김병수에게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향해 그건 위험한 사고방식이다라고 힐난하던 그다. 평소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나에게 인생에 답은 없다고 힐난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겹쳐 오는 듯한 착각이 들어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인생이기에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 하나하나에 답을 부여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버릇이라는 것은 알지만 고치기가 힘든 고질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김병수는 그래도 과거의 시간도 앞으로의 시간도 모두 지켜낼 자유가 너에게는 있지 않는가 다독여주는 것 같다.

남들이 우려하듯이 살인연쇄범, 알츠하이머 병, 시간이라는 소재 때문에 어둡고 칙칙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는 초중반에서는 김병수의 똘끼어린 생각으로 독자를 웃겨대다가 후반을 넘어가서는 미스테리로 장르를 바꿔대며 끝까지 독자를 긴장시킨다. 기억을 왜곡하거나 잃어버리는 주인공 김병수의 맹점을 제대로 이용하는 작가의 재기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꼬리를 문다.

덧붙이는 글 |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은이) | 문학동네 | 2013년 7월
개인블로그, sns에도 올렸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2013)


태그:#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