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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북한 김일성 주석은 CNN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제1차 핵위기(1993년)가 불거진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김 주석은 뜻밖의 말을 쏟아냈다. "미국에 가서 낚시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고 싶다, 핵무기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전쟁을 원하는 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등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김 주석은 그 말을 다 지키지 못하고 그해 여름 사망한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손자 김정은도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은 영국 외교관을 인용해 지난 4월 김정은 제1비서가 "오바마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2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과 함께 농구 경기를 관람한 데니스 로드먼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지난 6월 7~8일의 미중 정상회담 무렵부터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원하는 북한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계속 포착됐다. 급기야 지난 6월 16일 일요일, 휴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국방위원회 명의로 북미 고위급 회담을 공식 제의했다.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 담화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우리 수령님(김일성)과 우리 장군님(김정일)의 유훈"이라고 밝히면서 북미 고위급 회담 의제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문제, 미국이 추진 중인 '핵 없는 세계 건설' 문제 등도 폭넓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회담 일시와 장소를 "미국이 편리한 대로 정하면 될 것"이라고 하며 '통 큰 제안'을 했다. 미국에 공을 넘긴 것이다. 지난해 12월 로켓발사에 이어 올해 2월 핵실험, 3월과 4월에 계속된 대남위협 및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등 일련의 호전적 조치를 반전시킬 듯이 보이는 '대회전'의 움직임이었다.

북한의 대화 제의... 미지근한 미국 반응

지난 6월 북한이 미국에 고위급 회담 제의를 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싸늘했다.
 지난 6월 북한이 미국에 고위급 회담 제의를 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싸늘했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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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발표 당시 워싱턴은 6월 15일 토요일 오후 8시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헤이든 대변인은 그날 밤 "발표 내용이 있으면 알려주겠다"는 통상적인 답변만 한국 특파원들에게 남겼다. 월요일 조간을 위해 일요일에 정상 근무하는 한국 언론사의 기자들만 한반도 남쪽에서 6월 16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과거 2010년 9월 28일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할 때 북한은 오전 1시에 김정은의 대장 진급 소식을, 오전 4시에 그의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임명 소식을 타전했다. 당시 미국 워싱턴은 각각 오전 11시, 오후 2시로써 업무가 한창이던 때였다. 다분히 미국을 의식한 발표 시각이었다.

그때를 생각한다면 미국 현지 시각으로 토요일 저녁에 맞춰 발표된 지난 6월 북미 고위급 회담 제의는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는 우스개소리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미국의 공식 반응도 북한의 회담 제의 다음 날 "북한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할 것이며,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등의) 의무를 준수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주기를 바란다"며 싸늘하게 나왔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북한의 최대 외교 목표는 북미 직접대화 및 관계정상화다. 생존을 위해 쉽게 포기할 북한이 아니다. 북미 고위급 회담제의 직후인 6월 19일 북중 전략대화에서도 북한은 북미 대화 성사를 위해 중국의 역할을 요청하고,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활동공간을 넓혀주기 위해 협조 의사를 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이 6자회담 카드 들고 나온 까닭

한중 정상회담 직후 중국 외교부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긍정적 환경 조성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당사국들이 6자회담을 조속히 재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월 27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는 모습
 한중 정상회담 직후 중국 외교부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긍정적 환경 조성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당사국들이 6자회담을 조속히 재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월 27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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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7일부터 있었던 한중 정상회담 직후 중국 외교부가 공식 성명을 통해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긍정적 환경 조성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당사국들이 6자회담을 조속히 재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고 발표한 메시지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국내 언론에서는 대부분 한중 정상이 북한 핵 불용에 대해 인식을 같이 했다는 데에 방점을 찍었지만 대부분의 외신은 중국 측 반응과 한국 측 반응을 각각 따로 소개하며 중국 측의 6자회담 재개 의지를 전하는 데 비중을 뒀다.

중국이 새삼스럽게 6자회담 카드를 들고 나오는 데에는 기본적인 계산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장국으로서 북한의 협조가 확보되지 않는데 성급하게 6자회담 재개론을 강력히 제기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도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해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지만 북한도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위해 중국에 기대하는 바가 크기에 그만큼 협조할 가능성도 높다.

중국이 6월 말 한중정상회담이나 7월 초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6자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한 것은 6자회담 의장국 지위를 활용해 역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중국의 이해 관계와 이에 협조하며 대화 국면을 조성해 북미 직접대화의 징검다리를 놓아보려는 북한의 의중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아울러 최근 북중 관계도 지난 7월 27일 북한의 '전승절' 행사에 중국이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최고위급인 리위안차오 국가 부주석을 대표로 파견하면서 지난 3차 핵실험 이후 소원해진 관계가 상당 부분 복원됐다고 평가되고 있다.

김정은, 한밤중에라도 오바마에게 먼저 전화를

김정은 제1비서, 퇴근 전에 국제전화 한 통화만 하면 된다. 깜짝 발표나 전화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다.
 김정은 제1비서, 퇴근 전에 국제전화 한 통화만 하면 된다. 깜짝 발표나 전화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다.
ⓒ rgb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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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전방위적인 대화공세에 이제 공은 형식상 미국으로 넘어간 듯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은 급한 것이 없어 보인다. 산적한 국내문제로 유권자들이 고립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미국 내 정치 상황에다가 리비아의 카다피를 처단하고, 빈 라덴을 사살해 수장시킨 바 있는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서도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내부적으로 검토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더군다나 북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당사국이자 관련 동맹국인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며 국제적 위상도 상당히 성장한 나라다. 미국이 국내 정치 사정·외교관계의 우선순위 등으로 직접 나서기 힘든 상황에서는 한국에 남북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북한 문제를 '위탁관리'를 하며 북미 직접대화는 자연스레 피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국제전략연구소(CSIS)는 지난 4월, 50년간의 북한의 외교대화패턴을 '협상국면 2개월 내에 다른 위기를 발생시킨 후 5~6개월 내 외교적 보상을 받는 벼랑 끝 전술'로 분석·정리하며 비판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북한의 도발적 행동을 바라보는 미국 정부 및 민간의 인식은 상당 부분 CSIS의 연구 결과와 유사하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 관리들이 "과거의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나쁜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 않겠다"고 종종 공언하는 것도 이에 기초한다. 또한 올해 북한 '전승절' 행사(7월 27일) 참석차 방북한 시리아 대표단을 김정은 제1비서가 따로 접견했다는 소식은 워싱턴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미국은 북한과 시리아의 오랜 미사일 수출협력관계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 제1비서가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비핵화' 유훈을 이루기 위해 북미대화를 성사시키고 이를 위해 미국에 직접 가서 할아버지 대신 낚시를 하든,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를 하든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앉아서 오바마 대통령의 전화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한다. 비핵화와 관계정상화 등 오갈 수 있는 대화주제를 가지고 전화를 걸어야 할 것이다.

물론 비핵화 다음에는 미국이 인권이나 기타 문제를 걸고넘어져 북미 수교를 해주지 않을 것이라 의심하는 북한 입장에서 쉽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지도자라면 쉽지 않은 일,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도 도전하며 역사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생활은 '인민적'이지도 않은 스위스 유학생 출신이면서 가식적으로 인민복을 입고 다니고 20세기적 할아버지 방식이나 쫓아가려는 행동은 결국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못할 것이다. 자존심도 좋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먼저 전화해서 인사를 건넬 줄도 알아야 한다.

'3AM Moment'라는 말이 있다. 중대한 외교·안보 사항에 대해서는 한밤중 지구 반대편에서 걸려온 전화도 받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을 묘사하는 비유다. 미국 대통령은 오전 3시라도 전화를 받는다. 워싱턴 시각이 오전 3시라면 평양은 오후 5시다. 김정은 제1비서, 퇴근 전에 국제전화 한 통화만 하면 된다. 깜짝 발표나 전화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정대진님은 팟캐스트 '남북상열지사' 진행자이며 코리아연구원 협동연구원·북한통일학대학원연구협의회 대표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 누리집(knsi.org)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오바마, #김정은, #북미수교, #비핵화, #6자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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