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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께서 자주 발걸음을 하셨다는 운길산. 그곳에서 양수리 방면을 찍은 사진이다.  운좋게도 날씨가 정말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 하늘에 구름이 참 멋지다!
▲ 운길산 다산 선생께서 자주 발걸음을 하셨다는 운길산. 그곳에서 양수리 방면을 찍은 사진이다. 운좋게도 날씨가 정말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 하늘에 구름이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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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테마여행

우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필자의 이런 질문에 당황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해봤다. 나는 다산 선생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나? 다산 선생의 저작은 많이 읽어보았는가?

필자는 역사트레킹 인터넷 카페의 주인장이다. 우리 카페는 역사유물 탐방과 트레킹이 결합된 고품격(?)의 도보여행 카페다. 그래서 가입할 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흥미로웠던 것은 다른 역사인물보다 압도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쟁쟁한 역사인물들을 물리치고, 다산 선생이 우리카페 회원들이 제일 존경하는 역사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퀴즈의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 카페의 회원수는 겨우 8명에 불과하니까.

기사 앞 부분부터 싱거운 소리를 한다고 질책을 가하실 독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런 소리를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생가인 여유당에서는 저렇게 선비적인 풍모로 여생을 보내셨을 것 같다. 뒤쪽의 나무가 선생의 상과 잘 어울린다.
▲ 다산 정약용 선생상 생가인 여유당에서는 저렇게 선비적인 풍모로 여생을 보내셨을 것 같다. 뒤쪽의 나무가 선생의 상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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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문학관은 세 개에 이른다. 강원도 원주, 경남 하동과 통영이 바로 그곳이다. 동학혁명기념관도 마찬가지다. 전북 정읍과 전주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장내리 집회가 열렸던 충북 보은에도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렇듯 동일한 테마를 가졌지만 각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기념관 혹은 기념공원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이번에는 원주 토지 문학관에 갔다면, 다음에는 통영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하는 식이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박경리'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진 곳이라, 두 곳의 일대일 비교도 가능할지 모른다. 자동차 있으면서 질질 끄는 거 싫어하는 분이라면 당일치기로 테마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식의 테마 탐방은 무척 흥그런 테마 탐방은 무척 흥미로운 여행일 수 있다.

필자의 테마 탐방은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다. 다산 선생의 유적지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오랫동안 유배돼 있던 전남 강진이고, 또 하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생가다. 하나를 더 하자면 수원 화성도 다산 테마 탐방에 포함된다.

다산길은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도보여행길이다. 아마 이 길을 다산선생도 걸으시지 않으셨을까?
▲ 다산길 다산길은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도보여행길이다. 아마 이 길을 다산선생도 걸으시지 않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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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자형 여행

2010년 여름 당시 필자는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여행은 제주도를 거쳐 고흥 나로호 우주센터에서 종료됐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L자형 여행 당시 필자는 제주도→완도→해남→강진 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던 도요새의 고장 강진. 하지만 강진은 내게 '다산 정약용'의 고장으로 더 많이 기억됐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1801년에 있는 신유박해로 인해 억울하게 유배길에 올라야 했지만 다산은 그 황량한 유배지를 하나의 작은 '규장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강진의 다산 초당을 자전거 여행코스로 잡았던 것이다.

목민심서
▲ 목민심서 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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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당시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 혁명을 전파했던 1799년. 당시 조선의 조정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당연히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했으면 '승복'해야 할 텐데 벽파는 그렇지 못했다. 꼼수를 썼던 것이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형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낙향하게 된다. 그렇게 정약용이 한양을 등지고 낙향한 후 두 달도 안 돼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승하하게 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강진의 다산초당. 이 현판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 다산초당 강진의 다산초당. 이 현판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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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정약용도 유배길에 나서게 됐는데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이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남양주의 다산 선생이 의관을 갖추고 계셨다면 강진에 있는 다산 선생은 서민적인 풍모를 보이고 있다.
▲ 강진의 다산 선생 상 남양주의 다산 선생이 의관을 갖추고 계셨다면 강진에 있는 다산 선생은 서민적인 풍모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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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다산유물전시관

필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다산유물전시관이었다.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한 다산유물전시관은 만덕산 아래에 있었다. 다산초당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다산초당에 닿을 수 있다.

다산유물기념관은 다산과 관련된 유물과 서적들이 전시돼 있었다. 다산이 500권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기록한 만큼 기념관은 다산 선생이 기술한 책들로 가득했다. 다산이 직접 기록한 책이 아닌 필사본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옛 고서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남양주 다산문화의 거리에 있다. 강진 다산유물전시관에도 실내에 거중기 모형이 있지만 남양주에 있는 거중기가 좀 더 나아 보인다.
▲ 거중기 남양주 다산문화의 거리에 있다. 강진 다산유물전시관에도 실내에 거중기 모형이 있지만 남양주에 있는 거중기가 좀 더 나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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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서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중가도설>이었다. <기중가도설>은 중국의 <기기도설>을 토대로 다산 선생이 저술한 것인데 한마디로 기중기설계도였다. 수원 화성 축조 시, 다산이 기중기를 제작해 큰 성과를 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기중가도설>에는 그런 기중기의 도면이 직접 그려져 있었다. 꼼꼼하게 그려진 설계도를 보니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그 밖에도 다산유물기념관에는 볼거리가 풍부했다. 공짜로 입장해 본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이 꽤 많았다.

다산유물기념관 위쪽으로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은 큰 석상에다 다산의 어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난 그 어록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하나하나가 다 울림이 큰 말씀들이었다. 마치 세상의 지혜들을 다 압축시켜 놓은 듯했다. 다르게 보면 따분한 '도덕선생님' 같은 글귀들에 하품을 내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어록들은 내게 죽비소리처럼 큰 깨우침을 줬다.

강진 다산유물전시관 한쪽에는 다산초당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 있었다. 다산초당은 크게 동암과 서암으로 나뉘었다. 동암은 다산 선생이 기거하는 처소였고, 서암은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 장소였다.
▲ 동암에서 저술중인 다산 강진 다산유물전시관 한쪽에는 다산초당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 있었다. 다산초당은 크게 동암과 서암으로 나뉘었다. 동암은 다산 선생이 기거하는 처소였고, 서암은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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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다산초당은 만덕산 중턱 부근에 위치에 있었다. 필자가 방문하기 전날 남부 지방 일원에 비가 내려서인지 다산 초당이 있는 만덕산의 숲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강진읍내에 갈 때 건넜다는 시냇물도 유량이 풍부했다.

다산초당은 생각보다 비좁았다. 그리고 무척 소박했다. 하긴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유배지였지 여름 별장이 아니지 않은가? 유배지가 '대궐' 같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것이다. 초당에서 만덕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천일각에 올라서니 아름다운 강진만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사실 천일각은 정약용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정자였지만 차후에 다산 선생의 뜻을 받들어 건립했다고 한다.

드넓게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다산은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강진만 상공을 유유히 날아오르는 백로들을 바라보면서 고향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유배생활을 한탄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른다. 강진보다도 더 먼, 흑산도 땅에 유배됐다 그 곳에서 임종을 맞이한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비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본래 천일각은 전남 강진 다산초당 부근에 있었다. 하지만 다산의 멋을 살리자는 의미로 다산문화의 거리에 천일각을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 경기 남양주의 천일각 본래 천일각은 전남 강진 다산초당 부근에 있었다. 하지만 다산의 멋을 살리자는 의미로 다산문화의 거리에 천일각을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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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과 차를 마시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날 지붕 달린 오두막에다 텐트를 쳤기에 폭우가 쏟아져도 큰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다산기념관 공원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결정했다.

점심께에는 비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오후가 되니 다시 빗줄기가 거세졌다. 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밥을 지어 먹었다. 그러다 식곤증 때문인지 아니면 거듭된 여행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슬며시 눈이 감겼다. 잠결에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인가?

"누구요? 어느 문중의 과객인지 모르겠으나 일어나 보구려."

누구지? 이 거센 빗줄기 속에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뉘신데, 어떻게 여기 만덕산까지 찾아 오셨소?"
"누구세요? 관리인이세요?"
"난 다산이라 하오. 지금은 이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오."
"예, 정말 다산 선생님이세요? 정말 그 정약용 선생님이 맞으세요?"
"그렇소. 내가 다산이오. 자자, 우리 이럴게 아니라 차를 한 잔 듭시다. 이 고장에서 나는 차는 향기가 은은하기로 유명하지."

그러면서 다산 선생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를 차를 한 잔 건네주셨다. 그리고는 내게 그 먼 천리길을 어떻게 해서 왔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자전거를 가리키며 저것을 타고 왔다고 했고, 수원을 거쳐서 왔다고 대답했다. 역시 과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그랬는지, 다산 선생은 내 철TB를 유심히 살펴보셨다.

"화성을 거쳐 오셨다고? 그럼 성곽은 어떻소. 온전히 잘 있는 거요?"

필자가 꿈 속에서 이 사진을 보여드리자 다산 선생은 무척 흡족한 미소를 띄우셨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판단은 독자의 몫!
▲ 수원 화성 필자가 꿈 속에서 이 사진을 보여드리자 다산 선생은 무척 흡족한 미소를 띄우셨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판단은 독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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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디지털카메라에 담아놓은 수원성 관련 사진들을 다산 선생께 보여드렸다. 수원의 도시화로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셨지만, 그래도 수원성의 굳건한 모습을 바라보시며 흡족한 미소를 띠셨다.

"다산 선생님. 그 길고긴 유배 생활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귀양 보낸 사람들이 밉지 않으세요?"

다산 선생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 소리는 이제 다 부질없는 소리.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오."
"그래도 18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그건 그렇지. 고독했지. 외로웠지. 하지만 이렇게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온 방랑객과 차를 함께 마시고 있지 않은가. 그걸로 족한 거지."
"선생님도 무척 외로우셨군요."
"그랬지. 하지만 고독감이 밀려올 때마다 난 저 멀리 바다를 보면서 외로움을 실어 보냈다오. 그리고 시를 짓고 문장을 썼다오. 유배기간이 괴로운 시간인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살찌우는 좋은 시간이었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소. 또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도 있고. 내가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했다면 그 수많은 경집과 문집들을 어떻게 저술했겠소. 여기가 내 유배지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내 도서관이 아니겠소? 그렇게 내가 서책을 썼으니 후세 사람도 나를 알아보는 것이겠고. 그대도 나를 알아주어서 발길을 이 곳으로 돌리지 않았나?"
"그건 그렇죠."

선생께서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자 이제 나는 처소로 돌아가 봐야겠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인 듯싶네. 아참, 혹시 자네 경기도 마현이라는 곳을 아나? 내가 그곳에 여유당이라는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곳인데."
"아, 양수리 근처요. 알지요. 거기에 선생님의 이름을 딴 트레킹 코스도 있어요. 뒤쪽에 있는 운길산도 풍경이 수려한 곳이고요."
"잘 알고 있구먼. 그럼 그 곳에도 한 번 와주시게. 거기서도 한 번 보고 싶네."
"예?"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하고 번개가 내리쳤다. 그 소리에 눈이 떠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좀 전까지 내 앞에 계셨던 다산 선생도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꿈을 꾼 것이다. 아주 생생한 꿈이었다. 시공간을 넘어, 마치 다산 선생과 직접 다과를 했던 것처럼 아주 생생했다. 마치 입속에서는 은은한 차향이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최근에 다산문화의 거리 앞쪽에 대규모의 연꽃 공원이 들어섰다. 화사한 연꽃들이 피어 있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연꽃밭 앞쪽으로는 한강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는 야영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 연꽃공원 최근에 다산문화의 거리 앞쪽에 대규모의 연꽃 공원이 들어섰다. 화사한 연꽃들이 피어 있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연꽃밭 앞쪽으로는 한강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는 야영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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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

2013년 6월 30일, 필자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문화의 거리를 방문했다. 3년 전 꿈 속에서 만난 다산 선생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너무 늦은 방문이었다. 3년 전의 일은 둘째치고서라도 다산 생가 방문은 미리미리 했어야 하지 않나?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면서! 중앙선의 복선화로 접근성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던가. 물론 변명거리가 있긴 있다. 다산 생가를 방문하려고 할 때마다 꼭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먼 남도 땅에서는 쉽게 만나주시더니만 정작 수도권에서는 그림자도 안 보여주실라나?'

다산 생가를 방문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중앙선 팔당역까지 전철을 타고 간 후 능내리행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다. 그러다 능내역에서 하차한 후 도보로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보는 팔당댐 일대의 경치가 일품이다. 능내역은 중앙선 복선화로 현재 폐역이 됐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다산문화의 거리에 있었다. 문화의 거리는 강진에 있는 유물전시관보다 좀 더 세련된 느낌이었다. 더 규모도 있었다. 2009년에 실학박물관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거칠게 이야기해서 강진의 다산 유적은 남도의 멋이 녹아든 것처럼 고즈넉했고, 남양주의 다산 유적은 좀 더 정돈된 모습이었다. 물론 이런 비교는 전적으로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다산 선생의 묘. 생가인 여유당 위쪽에 선생은 고이 잠드셨다. 필자가 참배를 했을 때는 한 여름이어서 그런지 나무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가면 시원스럽게 양수리 유역이 조망된다. 마치 다산초당에서 아름다운 강진만을 시원스럽게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 다산 정약용의 묘 다산 선생의 묘. 생가인 여유당 위쪽에 선생은 고이 잠드셨다. 필자가 참배를 했을 때는 한 여름이어서 그런지 나무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가면 시원스럽게 양수리 유역이 조망된다. 마치 다산초당에서 아름다운 강진만을 시원스럽게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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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이나 남양주나 풍광만큼은 '용호상박'을 이룬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다산초당 위쪽 천일각에 올라서면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그 뒤쪽으로는 천관산이 둘러져 있다. 그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남양주도 마찬가지다. 다산 선생이 자주 올랐다는 운길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수도권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 큰 물길을 이룬 양수리가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다산 선생은 강진에 있을 때는 마현(다산 생가가 있는 곳의 옛 지명)을 그리워했고, 여유당에 있을 때는 다산초당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다산선생의 묘는 여유당 위쪽에 있었다. 소나무들이 늘어선 모습이 마치 제자들이 늘어 서서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필자도 저 소나무들처럼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혹시 너무 '껑뚱'하다고, 꾸짖지나 않으실까? 하지만 필자는  이미 제자일지 모른다. 그동안 다산 선생의 저서를 읽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읽을 생각이니까.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된 것을 기념하여 묘소와 여유당 일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줍고 왔다. 그렇게 해 '나의 정약용 테마 탐방'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실학박물관 앞쪽에 전시되어 있다. 이 홍이포는 명나라 시대 포르투갈에서 수입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연안 방어용으로 장착됐다고 한다. 홍이포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후금이 이 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전투에서도 쓰였다고 한다.
▲ 홍이포 실학박물관 앞쪽에 전시되어 있다. 이 홍이포는 명나라 시대 포르투갈에서 수입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연안 방어용으로 장착됐다고 한다. 홍이포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후금이 이 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전투에서도 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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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 다음블로그에도 게재를 합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태그:#정약용, #다산, #다산초당, #여유당, #다산문화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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