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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 번쯤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받는 순간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강남 아니면 홍대. 집 앞 공원에 잠시 산책 나온 듯 무심한 옷차림. 하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한 순간 표정은 환하게 풀어지고 만다. 그리운 것을 만난 모든 이가 그러하듯이.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온 지 십 년이 넘었다. 열 한 명의 자원봉사자. 우리는 모두 어렸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는 나이였다. 9·11 테러 후 일 년. 수도 카불은 미군정 치하였지만 그 외의 지역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각자 유서를 작성하고 길을 떠났다. 2주라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곳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전쟁과 가난으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가을 운동회를 열어주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

사막에 가본 적이 있는가? 낮에는 한없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신비한 황톳빛 벌판. 밤이면 온통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눈부신 별세계. 건조 지역이라서 구름도 스모그도 없는 그 밤하늘 아래 서면, 지구가 은하계라는 엄청난 별들의 바다 한복판에 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땅 위의 현실은 정반대. 아프간은 1979년 구 소련의 침공 이후 전쟁이 끊이지 않은 나라였다. 부서진 탱크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낯선 땅은 지뢰가 묻혀 있을까봐 밟을 수 없는 곳. 외형이 제대로 남아있는 건물이 거의 없어, 대부분의 집은 문틀만 남은 벽을 천으로 가리고 산다. 우리는 그들의 전통 의상을 사 입고 차량으로 이동할 때는 커튼을 꼭꼭 쳤다. 외국인으로서 겪을 위험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였다.

낯선 땅, 자원봉사자들끼리 서로만을 의지하며 2주를 버티는 동안 싹튼 동료애. 지구 어딘가에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매일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을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아무 조건 없이 돕는 일 자체가 가져다주는 충만감.

그때 나는 봉사가 지닌 위대한 힘을 깨달았다. 진심을 다해 봉사를 해본 사람은 안다. 봉사란 베푸는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받는 일이다. 세상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뿌듯한 충족감, 내가 살아있는 이유에 대한 해답을.

그곳에 다녀온 후, 나는 나를 더 이상 행복하게 하지 않는 직장 생활을 끝내고 진보 인터넷 언론 기자가 되었다. 집회·기자회견 현장을 쉴 새 없이 누볐고, 매일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세상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가슴 뛰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나 다른 이들의 시선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삶이었다.

일상의 패턴을 깨고 싶지 않은 안이함. 낯설고 위험한 땅에 대한 두려움. 그곳으로 가지 않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랬다면 내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한 그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쯤 만난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일 년이 2, 3년이 되거나 오 년, 십 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단 모여 앉으면 시간의 간격은 사라지고 다 함께 그때 그곳의 추억으로 되돌아간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쯤 그것을 용기 내어 선택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늘 내 가슴은 새롭게 차오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는 그저 이 순간이 얼마나 멋지고 소중한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그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아프간 비자를 기다리며 머물던 파키스탄 국경도시 페샤와르에서 찍은 사진.
 아프간 비자를 기다리며 머물던 파키스탄 국경도시 페샤와르에서 찍은 사진.
ⓒ 카불의 가을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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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식량닷컴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아프가니스탄, #자원봉사, #가을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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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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