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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겉그림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겉그림
ⓒ 교육공동체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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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조직인가. 만약 당신이 학교는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다면, 당신은 학교에 대해 비교적 '훌륭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과거에 비교적 '인간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교를 다녔을 가능성이 높고, 당신 자녀 또한 지금 다니는 학교가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당신이 학교를 조직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학창 시절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당신의 자녀가 매일 등교하는 학교 역시 그다지 탐탁치 않게 다가올 것이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쫓아내거나 내치는 법도 없다. 대표적인 공동체의 하나인 '가족'을 떠올려 보라. 한 가족 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이 내쳐지는 일은 아주 특수한 경우에나 일어난다. 하지만 조직은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대다수의 조직은 조직원을 결코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조직이 제일 먼저 손보는 대상은 그 조직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학교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하지만 실제 대다수의 학교는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조직의 원리에 따라 작동된다. 문제를 일으킨 학교 구성원, 가령 학교폭력(이하 학폭)에 연루되어 학교 '명예'에 먹칠을 한 학생들을 학교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생각해 보라. 학폭 사건에 휘말린 학생들은, 그들이 가해자가 되었든 피해자가 되었든 자퇴나 전학 권고를 받는 식으로 학교에서 배제되거나 축출당한다. 학교가 그들을 끝까지 품는 경우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대한민국의 많은 학교가 끊임없이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사실 자체가, 학교가 냉혹한 조직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진짜 공동체는 굳이 그런 목표를 내세우지 않는다. 학교폭력을 포함하여 오늘날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모색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라야,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에게 가차없이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학교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위선을 떠는 학교의 맨 얼굴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길이겠기 때문이다.

학교가 폭력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에서 9명의 공동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진짜 문제는 '학교 폭력'이 아니라 '폭력 학교'이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교육 평론지인 <오늘의 교육> 2012년 3·4월호부터 세 번에 걸쳐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그 특집 기획의 주제는 "누가 진짜 일진인가"였다. 학교 안의 학생 '일진'이 아니라 숨어 있는 진짜 '일진'과 그 메커니즘을 밝혀 보자는 취지였을 게다. 공동 저자로 참여한 이들 속에 현장 교사뿐만 아니라 인권 운동가나 교육 활동가들이 두루 포진한 배경도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학폭의 진짜 '일진'은 누구일까. "학교, 폭력의 숙주"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으로 책머리를 열고 있는 이계삼 선생의 글 일부를 살펴보자.

'학교가 지금 아이들의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 본다. 한번 생각해 보자. 학교가 없다면 학교폭력이 지금처럼 막강해질 수 있었을까? 대개 사람들은 학교가 아이들 사이의 폭력을 막아 주거나 폭력성을 제어해 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학교가 그런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학교가 폭력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다. 학교가 없다면, 학교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당위가 없다면, 학교가 아이들의 일상을 이렇게 강력하게 묶어 놓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지금보다는 훨씬 덜 폭력적일 것이다. (30쪽)

이계삼 선생의 문제 의식은, 한 마디로 학폭의 인식론적 회로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보자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학폭 문제를 풀기 어려운 것은 인식론적 좌표를 정립하기가 어려운 데에 있다. 그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이고, 원인 제공자가 해결사를 자처하며, 미디어는 대중의 불안 심리에 편승하여 가해자 아이들을 손쉽게 '괴물'로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초, 세상을 들썩이게 한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의 가해 학생이 얼굴을 목도리로 둘둘 감은 채 형사들에게 끌려갈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인공노할 패륜아나 '쓰레기'로 바라보았던 풍경들을 그려 보자.

일진, 일진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일진이 누구인가. 2012년, 어느 청소년인권 연수 자리에 참가한 교사들이 이렇게 정리했다고 한다. 이 나라 최고 일진은 '이명박, 조현오, 이주호'라고. 일진들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제일 위에 있는 일진들이 피라미드 제일 아래에 있는 일진들을 두드려 잡겠다는 꼴이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 분야 최고 실세였던 이주호가 일제 고사의 전도사를 자임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망쳐 놓았다. 그런데, 이주호의 고향인 대구에서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중학생이 일제고사 보는 날 아침에 자살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36쪽)

'빵셔틀'이 도움이 필요해서 '부탁한' 것?

학교폭력은 단순히 일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폭력은 단순히 일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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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상층의 '진골 일진'들이 하층에 있는 '노예 일진'들을 때려잡는 방식은 무엇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제도적인 '폭력'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학폭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세분화하는 방법을 쓴다. 다음은 최근 몇 년 사이 학교폭력예방및대책에관한법률상의 '학교폭력' 개념에 포함된 행위 유형들을 정리한 것이다(이 책 51, 52쪽 참조).

(가) 2009년 5월 8일: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 ․ 유인, 명예훼손 ․ 모욕, 공갈, 강요 및 성폭력, 따돌림, 정보 통신망을 이용한 음란 ․ 폭력 정보 등에 의하여 신체 ․ 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
(나) 2012년 1월 26일: 상해, 폭행, … 강요 ․ 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이하 (가)와 같음]
(다) 2012년 3월 21일: 상해, 폭행, … 강요 ․ 강제적인 심부름 및 성폭력,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이하 (가)와 같음]

(나), (다)를 보면, (가)에 없던 '강제적인 심부름'이나 '사이버 따돌림' 등이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배경에 '빵셔틀'과 같은 새로운 학폭 유형이 당시에 사회적인 파문을 불러왔던 저간의 상황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렇게 '행위'로 열거한다고 해서 학폭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공동 저자 중의 한 명인 조영선 경인고 교사는, 행위로 열거하는 형태의 폭력에 대한 정의가 지속된다면 학교폭력예방및대책에관한법률은 매년 정의를 확장하기 위해 개정되어야 할 것이고, 정의만으로 수백 개의 조항을 갖춰야 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런 방식으로 폭력을 정의했을 때, 법적인 정의 속에 포함되지 않은 폭력 행위가 법망을 빠져나갈 가능성을 차단할 수 없고, 권력자들의 폭력, 정책과 제도가 저지르는 폭력은 가려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백번 양보하여 '행위'만으로 학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학폭 가해자들의 행위가 문제의 '행위'인지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에게서 금품을 갈취한 학생들은 돈을 '빼앗은' 게 아니라 '빌렸다'고 말한다. 심한 폭행을 저질러 놓고도 피해자가 맞을 만한 '나쁜' 짓을 했거나 '장난'으로 때린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빵셔틀'을 도움이 필요해서 '부탁한'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경우 피해 학생들이 가해자들의 폭력적인 행동에 대해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학폭, '괴물' 같은 일부 아이들만의 문제 아니다

그렇다면 학폭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저자들은 이 책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저자들의 말마따나, 그들은 섣부른 대안보다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어떤 생각과 질서가 폭력이 깃들기 쉽게 만드는지 성찰하는 것이 그나마 학교폭력을 대하는 가장 성실한 자세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어 있는 '폭력 학교'의 메커니즘을 깨닫고, 그에 맞서는 힘을 기르기 위한 태도는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저자들이 제안하는 게 몇 가지 있다.

첫째, 폭력이 용인되는 갑을관계 돌아보기. 가령 '엄친아'와 '엄친딸'이 정말 그들이 잘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잘난 사람으로 만든 기준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흔히 객관적으로 정당화하는 차별의 근거들이 역사적으로 지배층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차별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학생들이 서로를 평등한 관계로 만드는 인권의 언어로 주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폭력을 하면 징계를 받는다"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상처 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학생들에게 참여와 자치를 보장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학교의 '권력'을 나누는 일이다. 학생들의 참여와 자치는 무엇보다도 학교나 교사가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또 교칙이나 학급 규칙을 하나 마련하더라도, 조금 시끄럽고 번거롭지만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는 일 등이 매우 중요하다. 학교와 교사의 태도 변화가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학폭 문제를 '괴물' 같은 일부 아이들만의 문제로 국한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학폭은 폭력에 물든 '일진'이나 인성이 고약하게 비뚤어진 일부 '못된' 아이들만이 저지르는 게 결코 아니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딩', '고딩'들이다. '패륜아'처럼 취급 받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회원들이 평범한 10대나 보통의 20~30대 회사원인 것처럼 말이다. 학폭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한낱 외 8인 공저 | 교육공동체 벗 | 2013. 6. 15 | 331쪽 | 1만 5천 원)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 학교폭력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들

하승우.조영선.이계삼 외 지음, 교육공동체벗(2013)


태그:#<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학교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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