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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시위 둘째 날이었던 지난 6월 28일 사용한 피켓. 첫째 날에 비해 좀더 '과격한' 글을 실었다. 무척 조심스러웠지만, 용기를 냈다.
 1인 시위 둘째 날이었던 지난 6월 28일 사용한 피켓. 첫째 날에 비해 좀더 '과격한' 글을 실었다. 무척 조심스러웠지만, 용기를 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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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으로 글을 쓸 때부터 뭐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신상이 '털렸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모두 발을 끊었다고 해도 누리꾼들의 번뜩이는 안테나를 벗어나진 못하리라 여겼던 터다. 최근 기사에서 현직 교사라는 걸 밝혔으니, 이메일 주소와 지역, 학교 이름을 찾아내는 건 그들에게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관련기사 : 이게 교사가 할 짓? 학생들 앞에서 부끄럽기 싫었다).

개인 신상이 까발려져서가 아니라, 댓글이나 메일·전화로 신상에 대한 조롱을 들어야 하는 게 화나서 다시 자판 앞에 앉았다. "전교조 조합원이지?" "종북 좌파지?"라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별 느낌도 없지만, 다짜고짜 던지는 "너 '홍어'지?"라는 물음에는 모니터와 수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이는 곧, "고향이 전라도지?"라는 질문이다. 댓글이나 메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엊그제는 어떤 남자로부터 학교 전화로 이런 '조롱'을 듣기도 했다. "겁 없이 교문 앞에서 '1인 시위'하는 걸 보니, 글을 읽기도 전에 전라도 교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라도 사람들은 참 유별난 족속들"이라 혀를 끌끌 차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언제부턴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말은 '천형'이 돼버렸다.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더 가혹하고 맹목적인 편견이 또 있을까 싶다. 기실 지인들 중에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 받는 것조차 꺼려하게 됐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편견이 기성세대를 넘어 아이들에게조차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형이 돼버린 말, "전라도 출신"... 아이들도 고통받고 있다

며칠 전 한국사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1811년 일어난 '관서농민전쟁(홍경래의 난)' 부분을 수업하고 있었다. 중요한 내용이라고 강조하며 그 발발 원인을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아이의 입에서 이런 '엉뚱한' 얘기가 튀어나왔다.

"서북지방민에 대한 차별대우로 인해 농민봉기가 일어났다는 거군요. 당시 서북지방인 평안도가 요즘의 전라도였던 모양이네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노라니,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고, 심지어 맞장구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

불과 10대인 아이들이 고향이 전라도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런 인식이 생겨난 건 분명 아닐 게다. 이곳저곳에서 자주 듣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밴 것일 테다. 처음엔 억울한 마음에 상대방에게 화를 내지만, 나중엔 그것이 자괴감으로 변해 결국에는 전라도 출신임을 되레 자책하게 된다.

진도를 나가다 말고, 전라도 차별 얘기를 하다가 아까운 수업시간을 다 보냈다. 아이들이 지역 차별을 직접 느낀 건, 예상했던 대로, 주로 '일베'를 통해서였지만, 주변 친척 얘기를 앞다퉈하는 걸 보니 이미 차별 받고 있다는 '현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기성세대가 문제였다. 그들의 입을 통해 '도제식'으로 전승된 것이다. 아이들이 쏟아낸 얘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제 이모는 대학을 서울로 가더니, 한두 해 만에 서울 사람 다 됐어요. 전라도 사투리를 아예 잊어버렸는지, 명절 때 집에 가족들끼리 모여 있어도 서울말만 해요. 엄청나게 서울말을 연습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투리가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전라도 사람이라고 괜히 손가락질 받을까봐 두려워서라고 하더라고요."

"아빠, 엄마는 예전부터 그러셨어요. 전라도에서 태어나 출세하려면, 다른 지역 사람들 하는 것의 최소 두세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해서는 절대 높은 자리에 오를 없대요. 전라도에서 태어난 죄라면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며 그랬다면서요? 전라도 사람을 관직에 등용하지 말라고. 중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그때부터 전라도 차별은 대놓고 시작됐다고."

"야구광인 저희 작은 아빠는 롯데에 근무하는데도, 기아 타이거즈의 열성 팬이에요. 경기에서 기아가 지면 술을 드시는데, 특히 삼성이나 롯데에 지면 집안 분위기조차 험악해진다고 사촌 형이 그러더라고요. 기아가 우승을 해야 전라도의 한이 풀린다나요."

"어디선가 들었는데요. 군대에서도 전라도가 고향이라고 하면, '깽'이 들어왔다며 무시하고 다짜고짜 군기부터 잡는다고 하던데요. 결혼을 할 때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색안경 끼고 본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저희 삼촌은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노량진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그곳에서 사법고시나 임용고시, 공무원시험 등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절반 이상은 전라도 출신이라고 하더라고요. 삼촌이 그랬어요. 전라도 출신에다 그나마 지방대 출신이면, 취직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라고."

끝종이 울렸는데도 아이들의 '증언'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그것이 반드시 '인(In)서울(대학을 서울로 진학한다는 뜻)'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라고 말했다. 곧, 차별 받는 걸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전라도를 떠야겠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 앞에서 고작 해줄 수 있는 말이란 '요즘엔 그렇지 않아' 정도였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편견이 더 굳은 편견을 낳고, 세대를 넘어 피해자들의 자책으로 귀결되는 이러한 현실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됐을까.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전라도에서 태어난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이들이 시나브로 늘고 있다. 자녀가 부모 잘못 만났다고 탓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나마 예전보다는 좋아졌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할까.

영화 <거룩한 계보> 중 한 장면. 이 영화의 주인공 치성(정재영 분)은 전라도 '조직 세계'를 꽉 쥐고 있던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거룩한 계보> 중 한 장면. 이 영화의 주인공 치성(정재영 분)은 전라도 '조직 세계'를 꽉 쥐고 있던 인물로 그려진다.
ⓒ Kn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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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악역은 모두 전라도 출신이 도맡다시피 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약방의 감초 격으로, 꼭 필요한 조연이었을지언정 그들의 캐릭터는 하나같이 배신을 일삼고, 비열하며 악랄했다. 지금이야 지역 차별을 공공연히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됐지만, 그 이미지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인터넷 등에서 '전라도 놈들은 언젠가 등에 비수를 꽂는다며 절대 믿지 말라'는 폭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나치의 선전 장관이었던 괴벨스의 선동을 능가하는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넷을 부유하고, 인터넷이 놀이터인 아이들의 머리를 가랑비가 옷 젖게 하듯 물들이고 있다. 과거에 비해 훨씬 교묘해졌다고나 할까.

물론, 그 말의 근거를 대라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이들은 없다. 인터넷이라는 익명에 숨은 탓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과 '운 좋게' 술자리에서 만난다 해도 근거를 듣기란 어렵다. 그저 "주변에서 다 그러더라"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두리뭉실한 답변뿐이다.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 단죄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이번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에서 보듯, 국가기관이 나서서 이런 폭언들을 퍼뜨리고 편견을 조장했다는 점이다. 이는 오로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지역 갈등을 조장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며, 종국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등장했지만, 선거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전라도 사람들은 얘 어른 할 것 없이, 선거철 지역 갈등 조장으로 인한 전라도 차별과 고립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고, 그것을 악용한 정치인들에 대한 처벌이 결국엔 유야무야되는 걸 익히 봐온 터다. 도마 위에 올려져 난도질당하는 시련도 한두 번이지, 이러한 일이 이어지다보니 전라도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열패감 같은 심각한 상처가 남았다.

따라서 이번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를 지켜보는 전라도 사람들의 반응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민주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인 선거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온갖 쌍욕을 써가며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고 지역 갈등을 부추긴 국정원의 행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태그:#국정원 선거 개입, #전라도 차별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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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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