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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유업이 자사 대리점 업주들에게 회사 제품을 부당하게 강매하는 이른바 '밀어내기'와 불법 리베이트를 요구해 물의를 빚었다(자료사진).
▲ 편의점, "남양유업 제품 안 판다" 남양유업이 자사 대리점 업주들에게 회사 제품을 부당하게 강매하는 이른바 '밀어내기'와 불법 리베이트를 요구해 물의를 빚었다(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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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증이 없어서 그렇지 공공연한 사실이었던 '갑을(甲乙)' 관계에 대한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남양유업 대리점주들의 증언에 이어 대기업과 하청업체, 사장과 사원, 가맹주와 편의점주, 편의점주와 알바생, 재단 이사장과 교수 등 다양한 '을'들의 불공정 거래관행에 대한 증언과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큰 주목을 받은 배상면주가의 경우처럼 무리한 밀어내기 영업의 실상에 저항하는 을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을 관계'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었고, 나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벌써 30여 년 전이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지만, 힘없는 을을 처참한 지경으로 내모는 비뚤어진 '갑을 문화'의 단면은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이때가 더 심했다.

"아... 삼촌! 또 빵인가요?"
"야! 남들은 먹고 싶어도 못 먹어! 이것들이 호강하는 줄 모르네?"

하루 종일 빵 먹는 게 호사라고?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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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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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그러니까 지금으로 부터 30여년 전) 내가 중학생일 때다. 몇 년 째 삼촌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의심스런 빵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유효기간 지난 빵은 지긋지긋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젠 정말 제대로 된 빵을 먹고 싶다'. 하지만 삼촌은 '복에 겨운 소리하지 말라'며 오늘도 유효기간이 지나 반품된 빵을 몇 상자나 우리 집에 놓고 갔다.

처음엔 하루 종일 빵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새벽에 대도시에서 만들어져 시골로 몇 시간을 부지런히 달려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호사였다. 하지만 나에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삼촌의 빵 사업 후 2~3년이 지나자 외할머니 댁의 돼지와 개밥은 1년 내내 유효기간 지난 빵이었다. 돼지우리에는 두엄냄새보다 빵 냄새가 더 났으니까. 아마 요즘 같으면 '녹돈'(녹차먹인 돼지)에 이은 '빵돈'(빵먹인 돼지)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조카들의 간식도 1년 내내 유효기간이 지나거나 임박한 빵이었다.

중동건설 붐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외삼촌은 건설 근로자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이역만리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비지땀을 흘린 끝에 많은 돈을 벌어 돌아왔다. 하지만 소위 '노가다'로 폄하되곤 하는 토목 직업으로는 안정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더구나 벌어온 돈을 지키기는 더 어려웠다.

삼촌은 여기저기 투자할 곳을 찾던 중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특별히 배운 게 없어도 동네 구멍가게에 빵만 부지런히 배달해도 20~30%의 큰 마진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유혹에 그만 거금을 들여 덜컥 특약점 계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그때가 바로 198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변변한 먹을거리가 없던 도시에서는 빵이 최고의 간식이었다, 제과와 제빵을 주로 영위하던 국내 유수의 기업들은 앞다투어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리점 또는 특약점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보통 우유나 음료 등 유통기한이 짧고 냉장보관이 필요한 제품을 취급하는 곳을 대리점이라 부르고, 라면이나 과자 등 상온보관 제품을 취급하는 곳을 특약점이라고 불렀다. 모두 한 개 업체의 제품만 취급하기로 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다.

애초부터 남지 않는 장사... 삼촌은 결국

삼촌은 특약점 계약 후 처음 1~2년은 그런대로 장사를 했다. 무조건 본사의 빵만 취급하는 형태로 계약이 이뤄졌고, 삼촌은 매달 수백만 원어치의 빵류를 호남공장에서 직접 납품받아 왔다. 여기에 20%선의 유통마진을 붙여 슈퍼나 매점에 다시 납품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일을 했던 걸까? 성실하고 부지런한 탓에 빵을 받는 거래처가 늘어가고 물량과 매출액이 늘면서부터는 오히려 경영이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마진에서 사무실 임대료와 경리사원 인건비, 차량유지비, 각종 공과금 등을 빼면 실제 삼촌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몇 십만 원 안팎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본사가 반품을 모두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거래처에서 반품한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다시 본사에 반품해달라고 요청하면 일부만 반품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결국 새벽부터 빵을 부지런히 돌려봐야 반품 받은 빵을 울며 겨자먹기로 떠안아야 하니 애초부터 남지 않은 장사였다.

특약점 업주에게 재고를 떠넘기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가게에 마진이 많이 남는다고 유혹하며 틈새 상품을 권할 수밖에 없었다. 본사의 눈을 속여 가며 타사의 마진이 좋은 상품을 가게에 팔았고, 그 수익으로 그 격차를 메웠다. 또 영세업체의 B급 제품이나 불량식품을 끼워 팔기도 하고, 새벽에는 햄버거까지 만들어서 끼워 팔기도 했다.

그만둘 수도 없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만두려고 해도 해지위약금에 밀린 대금을 요구하고 재고물량도 반품이 안 되니 정리할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만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계속해서 장사를 해봐야 손해만 늘어갔다.

본사에서는 삼촌의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목표를 설정해 이를 강요했다. 삼촌은 어쩔 수 없이 사업을 끌어가다 결국 빚더미에 올랐다. 급기야 사채까지 쓰며 전전긍긍하던 삼촌은 쉬는 날 없이 일에 매달리다 결국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장사하고 살아서 뭐하냐"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삼촌은 지금 10년째 반신불수로 병상에 누워 지내고 있다.

이런 장사하려고 평생 모은 돈  쏟아 붓고 밤 잠 설쳐가며 열심히 일했단 말인가? '갑의 횡포'는 정부의 감시·단속만으로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들은 감시가 소홀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어디서 또다시 을을 압박할지 모른다. 우월적 지위를 쉽사리 내려놓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이제 불공정하고 억울한 갑을 관계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자 위치에서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군림하며 부당한 요구를 한 적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먼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태그:#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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