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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2002년에 시청 앞에서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응원한 기억이 있고 학교 다닐 때 '운동'도 좀 했다면, 게다가 '시뻘건' 김치찌개까지 좋아한다면 '2013 봄페스티벌 국가보안법'의 두 번째 연극 <무림파혈전>을 봐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특산, 코믹 액션 활극 <무림파혈전>

'국가보안법'을 다룬 코믹 액션 활극<무림파혈전>의 공연 장면
 '국가보안법'을 다룬 코믹 액션 활극<무림파혈전>의 공연 장면
ⓒ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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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주인공은 웹툰작가 최진호다. 그가 그리는<무림파혈전>은 코믹 액션 활극이다. 65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국보법경'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강북무림'과 '강남무림'의 대를 이은 복수와 결투, 그 속의 사랑이야기까지 전형적인 무협액션이다.

누리꾼들은 악플과 선플을 날리며 진호의 웹툰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기 바쁘다. 극 초반 진호가 집중하는 것은 누리꾼의 댓글이었다.

그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온다. 그의 웹툰이 사상적 문제가 있다며 불만을 표하는 수신기 속 목소리. 목소리는 그가 과거 2002년 시청 앞에서 빨간 티를 입고 응원했고, 학교 다닐 때 운동도 좋아했고, 시뻘건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최진호는 웹툰의 내용이 사상적 문제가 있다고 수정 요구를 받는다
 주인공 최진호는 웹툰의 내용이 사상적 문제가 있다고 수정 요구를 받는다
ⓒ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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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도 안 되고 의미 없는 전화 한 통에 주인공의 일상과 그의 웹툰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극 중 웹툰 <무림파혈전>은 은유가 넘친다. 등장인물들이 사는 세계의 '강북무림'과 '강남무림'은 왠지 모르게 남북의 상황을 상상하게 하고 그들이 만나는 외나무다리는 '판문교'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화해와 협력, 평화와 번영' 안에서 공존을 선택하지만, 끊임없이 서로 경계한다. 등장인물들 싸움의 중심에 있는 '국보법경'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대한민국을 보여주면서도 긴장감과 웃음을 놓치지 않는다. 웹툰 등장인물의 대화인 "강북구는 종북좌파만 사느냐"니 "'북한산 아름답다'나 정형돈의 '강북멋쟁이'가 북한을 찬양하는 것이냐"는 논쟁 또한 웃음을 유발하지만 씁쓸하다. 주인공과 그의 웹툰 등장인물들은 토론을 통해 수위를 조절해나가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창작인들의 고뇌가 드러난다.

완결이 난 <무림파혈전>은 독자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도 불구하고 선약돼 있던 출판이 금지 된다.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그의 <무림파혈전>은 12년 후에야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된다.

<무림파혈전>은 실제로 1981년 출간 후 바로 금서가 된 박영창 작가의 무협소설 <무림파천황>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재는 '국가보안법', 선플이든 악플이든 마음껏 달아라"

'혜화동 1번지'는 실험연극을 하는 동인이다. 매년 돌아가면서 예술 감독을 맡았고 이번엔 이양구(39) 예술 감독의 차례였다. 그는 5기 동인 4명에게 "다 같이 자발적으로 '국가보안법'이라는 체제를 통해 실체 없는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정신병'에 걸려보는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국가보안법'의 무서움을 모르는 90~94학번의 젊은 창작자들이 모여, '불의 앞에서 예술가들이 얼마나 비겁한지 인증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양구 감독은 "참여하는 모든 연출과 배우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고 기억한다. 페스티벌의 목적도 각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각자 작업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소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모두 함께 고민하고 공부해 보고 다뤄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가장 나이가 어리고 '국가보안법'에 대해 몰랐던 배우 심우섭(28)씨는 공부를 하다 보니 "억울하고 화나고 어처구니없는 '국가보안법' 피해 사례들이 많아서 그것들을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참여하고 공연했다"고 대답했다. 배우 이선희(36)씨는 큰 두려움은 없었으나 주제가 '국가보안법'인 것을 걱정했다. 그는 "예전처럼 연출을(연출가를) 잡아가지는 않겠지만 '혜화동 1번지 동인'에 지원하는 예산을 삭감하는 피해가 있지 않을까"라고 걱정했다.

주인공을 맡은 이석호(41)씨는 자신은 국가보안법을 경험한 세대라 말하면서도 "시대가 달라졌는데도 국가보안법을 얘기한다니까 다들 탄압을 걱정하는 게 코미디다"라며 "우리가 투사가 아니고 '국가보안법'이 코미디일 뿐"이라며 웃었다. <무림파혈전>의 연출 김제민(36)씨는 "예술가들도 권력 앞에서 쫄아서 못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있다"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 데 분명 두려움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무림파혈전>은 대한민국의 정경유착을 '사과박스'를 건네는 모습으로 풍자한다
 <무림파혈전>은 대한민국의 정경유착을 '사과박스'를 건네는 모습으로 풍자한다
ⓒ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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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8시 종로구 '혜화동 1번지 소극장' <무림파혈전>공연장. 보통 비상업적 연극을 공연하는 소극장이 관객동원이 5~20명 정도에 머무는 것에 비하면 40석 정도 되는 객석이 채워진 모습은 이례적이었다. 관객들은 '국가보안법'으로 창작물이 검열당하는 무거움보다 '강북무림'과 '강남무림'의 과장된 결투모습과 대기업을 표현하는 해적들이 무림의 고수에게 사과박스를 건네는 모습, '국보법경'을 아들에게 전수하는 것을 북한의 세습에 비유하는 것에 웃음을 터트렸다.

제작자들은 "귀찮으면 몰라도 되는 데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남아있고 누군가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만약 '국가보안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다면 알고 당하라는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을 '설명하기'보다 '국가보안법'이 '코미디'라는 것을 유쾌하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다.

"우리의 비겁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이양구 감독은 "공연 준비할 땐 신나게 하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이런 공연을 하는 것도 입건될 수 있고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공포감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공연을 준비하던 그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그에게 티켓가격을 물어보고 친구와 공연을 보러온다고 말했다.

'2013 봄페스티발 국가보안법'의 첫 번째 공연인 <모의 법정>의 연습 중에 실체 없는 두려움을 경험했다. 배우는 '국가보안법'책을 못 가지고 다녔고 심지어는 유출을 우려해 연출과 배우가 대본을 이메일로 보내지 않고 서면으로만 전달했다. 그는 "그 두려움과 망상이 그들의 표현력을 한계 지었다"고 설명한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법정극 <모의법정>의 공연 모습
 '국가보안법'에 대한 법정극 <모의법정>의 공연 모습
ⓒ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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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은 '국가보안법'을 '집단적 정신병 트라우마'라 표현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얼마나 버겁한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를 스스로 알면서도 꼬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아서 감당할 엄두를 안 냈다는 것이다.

또 그는 "'국가보안법'을 대놓고 다루기 때문에 당연히 수위를 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넘는 것도 행위예술의 하나라고 본다"며 "분명히 우리가 다루는 것은 상식적인 얘기인데 '국가보안법'이 끼어들면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의 '2013 봄 페스티벌 국가보안법'은 8월 4일까지 서울 종로구 '혜화동 1번지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김제민 연출의 <무림파혈전>이 6월 23일까지 공연하고 김수희 연출의 <괴물이 산다>, 윤한솔 연출의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 김한내 연출의 <레드 채플린>이 8월 4일까지 각 10일 씩 연이어 관객을 만난다.


태그:#무림파혈전,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국가보안법, #이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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