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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 산문집. 파리에서 모그바티스까지
▲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탁현민 산문집. 파리에서 모그바티스까지
ⓒ 미래를소유한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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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체육대회가 끝나고 한 아이를 상담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체육대회 릴레이에서 일등을 하고, 축구 시합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여 '스타'가 된 아이였다. 그런데 체육대회가 끝나고 슬럼프에 빠졌다. 모든 게 다 하기 싫었고, 걸핏하면 아프다고 했다. 마음을 잡지 못하여 핑곗거리가 계속 생겼으며, 다소 반항적으로 나가 선생님들의 머리를 뜨겁게 했다.

그때 내가 그 아이와 나눈 얘기의 요지는 바로 에너지와 물결이었다. 에너지를 한 곳에 온통 쏟아버리면 그 뒤에 공허함이 몰려온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남겨진 텅 빈 무대처럼. 그 아이도 교내체육대회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날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는 공허함을 그 아이가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물결이 출렁이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물결은 오르내리면서 이동한다. 제자리에서 오르내리는 법은 없다. 최고로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고, 최저로 내렸다가 다시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라가는 것은 내려가는 한 과정이며, 내려가는 것도 올라가는 한 과정이지 그 자체로 고정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그 아이도 교내체육대회 때 최고조에 달했다가 대회가 끝나자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었다. 아이는 내 에너지론을 금방 이해하고 자신도 그렇다고 동조해주며 웃었다. 그리고 물결론도 제법 잘 받아들이며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해보겠다며 갔다. 교내체육대회든 국가 대사이든 사람이 에너지를 쓰는 양상과 부침은 이와 같을 것이다.

자발적 유배지에서 발효시킨 시간의 기록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 기획자이며 성공회대 겸임교수인 탁현민의 책 <흔들리며 흔들거리며>를 읽었을 때도, 나는 전에 상담한 그 아이처럼 에너지를 온통 쏟고 난 뒤에 밀려오는 공허함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던 저자의 심정을 느꼈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방송연예 부문 멘토로 합류하였고, 진보진영의 많은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하며 온통 매달렸던 저자에게 대선 패배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저자의 고백처럼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더 뜨거울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꼼짝 못하게' 된 상황에서 길을 잃었다고 했다.

선거가 끝나고 그 패배가 온몸으로 전이되기 전에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고 말했다. 도망가고 싶었다고. 그래서 간 곳이 프랑스 파리와 모그바티스였다. 그곳에서 저자는 '발효의 시간'을 보냈다. 이 책은 그 '발효시킨 시간'들의 작은 기록이다.

저자는 파리를 '자발적 유배지'로 규정하며, 스스로 유폐시킨 뒤에 쓸쓸함과 허망함 속에서 보낸다. 오늘이 오늘인가 아니면 어제인가, 혹은 내일인가 오랫동안 생각해야 할 만큼.

나는 여러 날 거기서 해 저무는 시간을 보냈다. 해가 떨어지면 동시에 찾아오는 어둠을 보았다. 그러나 해가 뜨고 해가 진다고 해서 하루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이 그대로인 나날의 하루는 날이 밝거나 혹은 해가 지거나와 상관없이 며칠이 하루처럼 가고 하루가 며칠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본문 23쪽)

파리에 있는 석 달 동안 가장 큰 소원은 '뭔가 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하는 걸 보면 저자의 열정적인 참여와 그 뒤에 따라온 공허함의 넓이를 짐작게 한다. 자신을 불면의 밤으로 이끌었던 백만 가지 고민의 실상은 하나, 곧 절망감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파리에서 저자를 알아본 한인 아주머니가 준 100유로 사건은 매우 구체적이며 극적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대화가 싫어서 회피하려는 저자에게 굳이 다가와, 건강하라고, 다 잘 될 거라며 100유로를 주머니에 찔러주고는 도망치듯 사라진 아주머니. 꼬깃꼬깃 몇 번을 접은 듯한 10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올려놓고 저자는 망연자실 한다.

저자는 '뭔가 웃기고, 슬프고, 기쁘고, 처절하고, 따뜻하고, 절망스럽고, 구질구질하면서 뜨거운' 매우 복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지폐 한 장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줄까 말까 생각하며 지폐처럼 접힌 아주머니의 마음이 아프고, 그걸 받아든 자신의 마음도 아팠다고 하며 탄식한다.

"아! 100유로. 어쩌라고요, 정말…."

파리의 시간은 그러나 무조건 우울하다고 처연한 자기 독백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도리어 어떤 면으로는 결과와 상관없이 큰일을 한 판 끝내고 난 사람의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은근히 배어 나온다.

프랑스 인사말인 "봉쥬르, 봉수아, 오르부아"를 혼동하여 생긴 일이나 파리에 먼저 와 있었던 김어준을 발견하고는 뒤에서 놀래켜줄 요량으로 다가가서 소리를 꽥 질렀다가 실상 돌아본 사람은 김어준이 아니라 그와 뒷모습이 닮은 프랑스 아줌마였다고. 순간 당황하여 자기도 모르게 아는 불어라고 뱉은 말, '라디시옹 실부쁠레(영수증 주세요)'로 그 아주머니와 배를 잡고 웃은 이야기.

미장원 입구에 손님들이 벗어놓은 옷들을 보고는 빈티지 옷가게인 줄 알고 들어가 가격표를 뒤지며 여자 손님들을 불안하게 한 일 그리고 소매치기당한 양정철 이야기. 문성근과 감자이야기 같은 여행지 파리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은 절로 웃게 만들었다. 아니 그냥 웃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웃겼다.

저자는 해학적인 표현에 매우 능했다. 풍자는 상대의 결함이나 모순과 부조리, 악덕을 비꼬는 공격적이며 차가운 웃음이라면 해학은 대상에 대한 호감과 연민으로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무해하고 익살스러운 웃음이다. 나는 이러한 탁현민식 웃음이 슬프지만 결코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전통 정서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그바티스에서 만난 깨달음의 우화들

파리북역에서 테제베를 타고 네 시간이면 남부 해안도시 뤼트낭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세 시간쯤 들어가면 나오는 마름모꼴의 작은 섬, 프랑스의 섬이자 자치령인 모그바티스. 이 모그바티스에서 저자가 전한 성찰의 소식들은 마치 한 편의 우화 같았다.

섬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촌장과 민주주의를 얘기하고, 작은 고깃배를 타고 종일 바다 위를 오가며 무언가를 건져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도대체 뭘 건져내세요?"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고민을 바다에 던지는데, 생각이 가벼워 물 위에 뜬 것들을 걷어내는 겁니다. 제때 건져내지 않으면 사람들의 고민이 많아지거든요."
"남의 고민을 건져서 뭐에 쓰시려는 겁니까?"
"이렇게 건져낸 고민은 서쪽 바위에 잘 펴서 말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민을 던져버리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고민이란 깊이 젖을수록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제때 건져내지 않으면 언젠가 더 큰 파도가 칠 때 고스란히 더 무겁게 몰려들게 됩니다."(본문 172쪽)

해변 백사장에서 오래된 사람들의 지혜를 찾고 있는 사람을 만나, 지식은 얻는 곳이고, 지혜는 발견하는 것이란 잠언을 듣기도 한다. 지식은 모래밭에 묻어두어도 큰 파도에 쓸려 사라지지만, 지혜는 어떤 파도가 와도,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발견되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고.

이제 흔들릴 때 흔들리겠다

문득 중국 초나라 굴원이 쓴 '어부사(漁父辭)'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굴원은 결국 멱라수에 몸을 던졌지만 탁현민은 돌아온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아주 단단하게 뭉쳐져 있는 것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매우 괴로웠지만, 도리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존재 자체의 은혜, '있음'의 은혜를 발견한 것이다.

어느 날, 센 강의 퐁네프 다리를 걷다가 문득 '이 다리는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으로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묘한 위로가 되었다. 다만 자리를 지키고 있음으로, 다만 존재하고 있음으로도 무엇인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저 강처럼, 그리고 그 위에 버티고 서 있는 다리처럼 굳이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무엇인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라고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그랬더니 한결 나아졌다. 이건 정말이다.(본문 187쪽)

저자는 작고 얇은 책 속에,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처럼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것은 출렁이는 물결의 모습이고, 바람에 흔들이는 나무의 모습이기도 하다. 떨고 있음으로 살아있는 것이 되고, 출렁이고 흔들리면서 나아가고 성장하는 것이 된다. 그 동력은 희망과 확신이라기보다 오히려 '좌절과 절망, 의심과 회의'라는 역설이다. 늘 굳건하고 열정적이었던 저자가 이제 돌아와 내보인 저 '나약한' 자세가 더욱더 여물어 보였다.

"그러니 나는 이제 흔들릴 때 흔들리겠다."

덧붙이는 글 |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탁현민,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2013년 5월 8일, 1만 4천 원



흔들리며 흔들거리며 - 탁현민 산문집 파리에서 모그바티스까지

탁현민 글.사진,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2013)


태그:#파리, #모그바티스, #100유로, #퐁네프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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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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