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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부모에게 유산을 많이 받았다. 아무리 주변에게 나누고 또 나누어도 덜어지지 않는 유산이다. 그 유산 덕분에 양쪽 귀가 110dB(청력역치 90dB 이상 : 최중도)정도 밖에 들리지 않는 중증청각장애인인데도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잘 살아간다. 그것도 항상 주변에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동행을 하면서.

내가 매주 수요일에 '묵향'을 나누는 사람들 중에는 60대~80대 어르신들이 20여 명이 계신다. 그 중에 어떤 분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분도 있고, 위암 수술을 여러 번 받거나 또는 간경화나 또는 동맥경화, 갑상선암에 걸려 투병 하시는 분들도 있다.

나는 이 분들에게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엄마의 모습을 본다. 그래서 다른 곳과 달리 이 분들의 수업시간 전에는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치고, 표정을 밝게 하고, 재미있는 유머도 준비해간다. 그러나 이 분들 중 몇 몇은 수업시간에 종종 내게 장난을 건다.

"자아, 선생님! 골라 골라 보이소!"

내 체본과 당신들이 보고 임서한 글씨들을 여러 장 섞어서 책상에 펼쳐놓고 내게 고르게 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이지만 영락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칭찬을 기대하는 초등학교 아이들 같은 기대감이 있는 것을 눈빛에서 읽는다. 그래서 나는 짐짓 모른 척하면서 "아이구! 내가 고르기 힘들게 그게 그것 같이 비슷해 보이는구만요!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가끔은 틀린 척 고르기도 한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 그 덕에 내가...

아버지(이 이미지는 <아버지의 일기장>(돌베개)에 사용된 이미지임을 밝힙니다).
 아버지(이 이미지는 <아버지의 일기장>(돌베개)에 사용된 이미지임을 밝힙니다).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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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들어가서 처음 이년 동안 나는 반에서 아주 노래를 잘 하는 아이였고, 수업이 시작되면 모두 합창하는 애국가의 지휘도 했다. 그러나 열 살 무렵 어릴적 천식치료로 맞았던 항생제 부작용 증세가 나타나면서 청신경이 마비되고 발음도 이상하게 변해갔다. 나는 모르는 증세였지만 아이들은 나를 고무줄 놀이에서 노래를 부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넌 귀머거리야!' 하고 놀리는 남자아이들도 생기고, 더이상 합창지휘도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9살 이후 현재 35년이 지나도록 나는 누구의 앞에서 한 번도 목청껏 노래를 불러보지 못했다. 음치와 박치… 노래를 못 부르는 수준이 아니라 음정과 박자를 아예 맞추기 어려운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 운전할 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노래처럼 부른다.

특히 조용할 때는 음악 동영상을 많이 보고 느낀다. 또, 많은 교육프로그램 중에서 유독 음악 프로그램을 많이 기획한다. 내게는 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할 수 있는 세상이 참 많다. 그것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사랑과 자신감이란 유산 덕분이다.

"아부지요! 자 골라, 골라 보이소!"
"흠… 이제는 잘 모르겠네! 우리 막내 글씨가 많이 좋아졌네라!"

열여섯 살 때에 붓을 잡고 삼년 동안 매일 붓글씨를 쓸 때였다. 선생이 지도한 글씨와 내 글씨를 섞어서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노점 판을 펼치듯이 펼치고 선생글씨와 내 글씨를 놓고 골라 내는 일을 즐겨하셨다. 삼 년 동안 금방 금방 골라내던 아버지는 삼 년이 지날 즈음에는 잘 모르겠다고 하시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흡족한 표정을 지을 때의 아버지는 말기 암에 걸려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으셨다.

한 번은 복잡한 부산시내 버스 안에서 지필묵 도구를 잃어버렸다. 한 자루에 몇 만 원씩 하는 붓 대여섯 자루를 '붓말이'에 둘둘 말아 버스를 탔는데 지퍼가 잠기지 않았던 가방이어서 그랬는지 어딘가에서 떨어졌는지, 가져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붓이 없어서 글씨 쓰기가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병을 위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두 명의 오빠의 등록금 마련에 허리가 휘는 엄마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왜 내가 서실에 나가지 않는지 잘 모르셨는데 자식들의 생활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엄마와 다르게 아버지는 자연적인 흐름으로 살아가시는 분이라 묻지도 않으셨다. 어느 날 잠든 아버지를 두고 혼자 넋두리로 아버지 앞에 글씨를 써와서 펼쳐놓지 못해 속상해서 말을 했나보다. 내가 붓을 잃어버렸다기보다는 누가 도둑처럼 빼갔다는 생각에 빠져있어서 나도 모르게 누가 훔쳐 가져갔는지 참 나쁜 사람이고, 밖에 나가기가 싫어졌다는 넋두리를 했다.

며칠 후 아버지는 꼭 가야 할 데가 있다고 옷을 깨끗이 다리라고 하시고선 양복을 차려입고 모자를 쓰시고 외출하셨다. 아버지는 부산의 국제시장 거래처를 방문하여 미수금을 받아오셨는지 엄마도 모르게 내게 돈을 주셨다. 지필묵을 사서 계속 공부하라고 하시면서…. 그리고 "막내야! 붓을 누가 가져갔던 네가 잃어버렸던 붓은 어디서든 붓으로서 자신의 일생을 잘 살아갈 것이니 네 예쁜 마음을 잃지 말거라"고 말씀하셨다.

예쁜 마음 잃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아버지, 그립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내가 처음에 인문여고를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실업계가 아닌 인문계에 가게 된 것을 참 기뻐하셨다. 그때는 한 반에 60명이면 1/3정도만 인문계에 들어갈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범대 진학을 포기하고 인문여고를 다니다 말고 붓을 잡는다고 하셨을 때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다.

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예술을 해서는 더 살아가기 힘들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내게 말씀이 별로 없으시다가 약주를 한 잔 하시면 내 손을 잡고 늘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사람이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그러니 너도 사람답게 살면 그걸로 된 거야!"

이 말이 도산 안창호의 말씀 중에 하나라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았고, 그 말의 참의미도 한참이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 꿋꿋한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담은 진심은 그때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살아가면서 종종 나는 돈도 잃고, 물건도 잃고, 다니던 일터도 잃고, 집도 잃고 심지어는 가족도 나의 부덕함으로 잃어 나락 같은 고통 속에 빠져서 몸부림치며 울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그때 내게 해 준 말들을 떠올리며 그 고통에 깊이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금방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아이같은 생기를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

내가 잃어서 애석하다고 속상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 말씀처럼 잃어버린 물건은 누가 가지고 있든 간에 제 소임을 안녕히 다하고 있다. 또, 내가 고통과 상처라고 생각했던 인연의 아픔도 결국은 땅에 떨어지거나 어디론가 바람에 날려가야만 다시 꽃이 피는 자연의 순리일 것이라고.

후배가 김장을 도둑맞았을 때도 나는 아버지의 말을 후배에게 전해주면서 맛있게 담은 김장은 누가 먹어도 김장이니 네 마음을 도둑맞지 말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지금 아버지가 많이 그립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다면 내가 쓴 글씨를 한 아름 들고 가서 비온 날에 쓴 글씨와 맑은 날에 쓴 글씨 또는 복잡하고 바쁜 일상 중에 쓴 글씨와 마음이 평정할 때 쓴 글씨를 펼쳐놓고 말하고 싶다.

"아부지요! 자아 골라 보이소"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덧붙이는 글 | 아버지이야기 공모



태그:#아버지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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