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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삼동과 복천동 고분 출토유물을 통해 알게 된 부산의 역사

부산박물관 정면 풍경
 부산박물관 정면 풍경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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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립박물관은 남구 대연동에 있다. 그래서 고속도로에서 나와 부산항 해안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오른쪽으로 공사중인 북항대교가 보인다. 이제 영도로 들어가는 다리는 네 개나 된다. 가장 오래된 것이 그 유명한 영도다리고, 두 번째 것이 부산대교며, 세 번째 것이 남항대교다. 이번에 북항대교가 놓이면 영도는 동서북에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옛날에는 태종대를 보기 위해 영도에 갔다면, 이제는 크루즈 터미널, 국립 해양박물관, 동삼동 패총전시관을 찾아 영도에 간다.

버스가 부산외국어대학교를 지나는가 했더니 금방 부산박물관 앞에 도착한다. 예정보다 10분쯤 일찍 도착했다. 부산시립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손말금 해설사가 나와 있다. 그녀는 부산의 해설사 중 최고의 문화유산 전문가라고 한다. 서로 인사를 하고 바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부산박물관은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크게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으로 나눠져 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칠두령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칠두령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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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관은 총 6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석기시대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지역의 유물과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제1전시실로 들어간다. 이곳은 선사실, 삼한·삼국실, 통일신라실, 고려실, 조선실로 구성되어 있다. 선사실에는 해운대 구석기 유적, 동삼동 패총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여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찍개 긁개 돌날이 있고, 낚시 바늘 가락 바퀴 토기 등이 보인다. 또 청동기시대 대표유물인 동검과 철기시대 유물인 낫과 화살촉도 있다.

이들 다음에는 복천동과 대성동 고분군 출토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목걸이, 금관, 방울이 7개 달린 형태의 칠두령(七頭鈴) 등이 눈에 띈다. 목걸이는 주황색, 하늘색, 보라색의 옥 또는 유리로 만들었다. 금동관은 약간 녹이 슬었지만 사슴뿔 모양이 분명하다. 칠두령은 흔들어 소리를 내는 의식용 방울로, 자루가 달린 원형 고리 바깥으로 은행알 모양의 방울이 7개 달렸다. 이곳에는 또한 부산지역에서 출토된 와당도 보인다.

사리장엄구가 국보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전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
 전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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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에는 국보 2점과 보물 1점이 있다. 국보는 '전 산청 석남암사지 납석사리호(국보 제233호)'와 '금동보살입상(제200호)'이다. 납석사리호는 산청의 석남사지 석조비로자나불의 대좌 중대석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납석은 어떤 돌일까? 일반적으로 곱돌이라고 하는데, 재질이 부드러워 가공이 쉽고 내화성이 강하다. 사리호는 사리를 담은 항아리라는 뜻이다. 표면에 음각된 명문을 통해 제작연도가 영태 2년(신라 혜공왕 2년: 766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항아리 바깥에 3조의 가는 선을 돌렸으며, 정간(가로, 세로줄)없이 각 행이 8자∼11자로 구성된 15행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영태 2년 병오 7월 2일 법승, 법연의 두 스님이 과거를 받들어 두온애랑(豆溫哀郞)을 위하여 석조 비로자나불을 이루고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석남암 관음암에 봉안하였다. 두온애랑과 스님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삼악(탐냄, 성냄, 어리석음)도의 업보가 없어지고 부처가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다. 크기는 높이가 14.5cm 몸통지름이 12.3cm이다.

금동보살입상이 빈 자리
 금동보살입상이 빈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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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리호가 국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명문을 통해 제작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문의 내용을 통해 조성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게다가 한문을 중심으로 이두 표기가 가미되어 어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납석으로 만들어진 사리함도 그 예가 별로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사리항아리는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나다.

또 한 가지 국보 금동보살입상은 현재 전시관에 없다. 보존 처리를 위해 지하 수장고에 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전시 부스의 사진으로 그 모습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사진을 보니 통인신라시대 불상이다. 양감 있는 몸매와 균형미 등으로 보아 8세기 후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중요한 보물이 '이덕성(李德成) 초상 및 관련유물 일괄(보물 제1501호)'이다. 그 중 나는 이덕성 초상에 주목한다.

그림과 초상을 통해 부산의 역사와 예술을 알아내다

이덕성 초상
 이덕성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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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성(1655-1704)은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사람이다. 화제를 통해 그가 전주이씨고, 자가 득보(得甫)며, 호가 반곡(盤谷)임을 알 수 있다. 이덕성은 '강직하고 명백한 품성(剛明)과 먼 나라 사람을 복종시키는 힘(風力)'이 있어 1687년 특별히 동래 부사에 제수된다. 그는 동래부사로 재직하면서 상인들의 밀매(密賣)와 왜인의 불법을 다스리는 데 크게 힘썼다. 이 그림은 42세(1696) 때 모습으로 그가 황해도 관찰사로 나갈 때의 모습이다.

전체 길이 250㎝, 너비 114㎝의 족자에 그림을 그렸다. 화폭은 길이가 166㎝, 너비가 99㎝이며, 앉아있는 인물의 높이는 145㎝이다.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이 많이 보이며,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검은 색 사모를 쓰고 녹색 단령포를 입고 있다. 선묘를 통해 얼굴과 수염을 자세하게 표현했다. 쌍학흉배(雙鶴胸背)를 통해 그가 당상관임을 알 수 있으며, 정형화된 형식을 벗어나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정황이 그린 동래 해운대
 정황이 그린 동래 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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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성 초상 옆에는 겸재 정선의 손자인 정황(鄭榥: 1735-?)이 그린 부산의 진경산수화가 전시되어 있다. 정황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을 따라 노적만취도, 청풍계도, 동래태종대도, 금강산도 등을 그렸다. 특히 강원도와 경상도를 유람하며 명승을 그린 61촉의 화첩이 남아 있다. 그 중 부산의 명소를 그린 세 점의 진경산수화가 이곳 부산박물관에 있다. 그것이 바로 동래 해운대(海雲臺), 동래 태종대(太宗臺), 동래 몰운대(沒雲臺)다.

해운대는 그림으로 보아 지금의 해운대 해수욕장 주변을 그린 것 같다. 왼쪽으로 동백공원의 암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달맞이길을 따라 이어지는 산봉우리가 나타난다. 해안 안쪽으로는 기와와 초가로 이루어진 어촌 마을이 있고, 그 뒤 원경으로 장산이 표현되어 있다. 태종대는 영도에 있는 절경으로, 그림에 섬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파도치는 바다 가운데 섬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우뚝하고, 그 앞을 두 척의 돛단배가 지나간다.

동래 태종대
 동래 태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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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는 사하구 다대포 항구 끝에 있는 명소다. 정황은 강과 바다가 만나 이루는 몰운대의 절경을 과장된 기법을 동원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낙동강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흘러가고, 강 오른쪽으로는 기이한 암봉들이 바다 가운데 솟아 있다. 그리고 왼쪽 아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바위 위에는 두 명의 양반이 뭔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그림에서 시가 저절로 우러날 듯하다.

그래선지 시인묵객들이 몰운대를 찾아 수 많은 시를 남겼다. 1607년 동래부사를 지낸 이춘원(李春元)은 몰운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요 만리라    浩蕩風濤千萬里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白雲天半沒孤臺
새벽마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扶桑曉日車輪赤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常見仙人賀鶴來

다대포 몰운대
 다대포 몰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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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 1722-1791)도 몰운대에서 일출을 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그는 밀양부사, 충주목사 등을 지냈고, 금강산 등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길 좋아했다. 

다대포 앞에 이르러 땅기운이 다한 듯           多大浦前地已窮
길은 하늘과 땅 사이로 사라지네 그려.          誰知有路入鴻濛
만리 장풍에 피리소리 스러지니                   長風萬里吹衰鬢
동쪽에 떠오르는 붉은 해 느긋이 바라보네.    臥看扶桑出日紅

이들을 보고 나서 우리는 제2전시실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한·일 관계사 관련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부산의 생활문화, 민속, 근·현대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이다. 민속과 관련된 것으로는 동래야류와 동래학춤 관련 탈과 자료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진관 이발관 등 근대 부산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야외 석조물 이야기

동래남문비 이수
 동래남문비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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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남문비 기단과 비신
 동래남문비 기단과 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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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박물관 밖으로 나와 정원에 있는 석조물들을 살펴본다. 이곳의 석조물은 대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석이 특히 많다. 동래 남문비가 가장 먼저 보이고, 동래부사 유심선정비가 보이며, 약조제찰비가 보인다. 그 외 척화비도 있고 열녀비도 있고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도 있다.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 부산시 기념물 제21호)는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세워졌던 비석으로 우암 송시열이 글을 썼다. 임진왜란 때 부산 지역을 지키다 순절한 부산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의 절의 등을 기록했다. 비문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67년 된 1658년(효종 9) 동래부사로 부임한 민정중이 당시를 기억하고 있던 노인들의 말을 듣고 비석을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로 마음먹었다.

약조제찰비
 약조제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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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1670년(현종 11)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와 서곡 이정영의 전서로 비석이 세워졌다. 그 후 비석은 1709년 충렬사 사당 앞뜰로 옮겨졌다가 1736년 다시 동래성 남문 자리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그러다 1976년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동래부사 유심선정비(부산시 문화재자료 제8호)는 1649년에서 1651년까지 동래부사를 지낸 유심의 선정을 기린 비석이다. 원래 동래읍성 서문 앞에 있던 것을 2001년 이곳으로 옮겼다.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 부산시 기념물 제17호)는 말 그대로 약속한 조항을 널리 알리기 위한 비석이다. 통신사 정사로 일본을 다녀 온 윤지완이 1683년(숙종 9) 대마도 도주와 체결한 5개 항의 약조를 기록하고 있다. 왜관(倭館)의 운영과 관리, 시장의 거래 그리고 범죄자 처리를 다루고 있다. 용두산 공원 동쪽에 있던 것을 197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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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48호)는 광무 10년(1906) 일본어 통역사였던 박기종과 김낙준이 세웠다. 여기서 유원은 먼 이웃과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교린(交隣)정책을 말한다. 실제로 유원각은 대일 외교관계를 전담하는 관청이었다. 선생이란 유원각에 근무했던 통역관을 말하고, 매안은 위패를 모신다는 뜻이다. 감고비란 옛날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는 일본어통역관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비의 건립배경과 목적,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비석을 둘러싸고 있는 비각 역시 석조로 만들어졌다. 비각이 전통 목조 기와지붕과 달리 근대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와 비각은 약조제찰비와 함께 조선 후기 이후 대일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금석문이다.


태그:#부산시립박물관, #납석사리호, #이덕성 초상, #전황의 진경산수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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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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