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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만발하는 사월, 찬란한 봄날에, 슬픈 두 개의 사건을 접했다. 하나는 지난 24일, 방글라데시 사바르에 있는 8층짜리 의류 공장 건물이 무너져 내려 400명 가까이 숨지고 1000여 명이나 다친 사건과 시험 성적을 고민하던 광주의 중학교 3학년 학생이 '공부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아파트 20층에서 몸을 날려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토미 힐피거, 캘빈 클라인, 망고, 베네통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의류 브랜드의 옷들이 방글라데시에서 생산되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임금이 (엄청나게) 싸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은 4인 가족 생계비의 4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은 굴레처럼 벗어날 길 없는 고통이었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만든 옷은 서양의 대형 매장에서 '하나 사면 하나는 공짜'라며 팔렸다.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기업 이윤은 노동자들을 위해 한 푼도 쓰이지 않았고, 다만 자본의 배를 불리는데 썼으며, 아까운 목숨들의 생매장은 그 결과이다.

투신하여 목숨을 버린 광주의 중학생은 '시험만 없다면 친구들과 체육대회도 열심히 하고 수련회를 가고 싶었다'고 유서에 남겼다. 죽은 학생의 성적은 중위권이어서 성적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또 유서에는 '한 달 동안 죽을 생각만 했다. 지난번엔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서 그만 뒀는데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고 썼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얼핏 보면 그 크기나 유형은 많이 달라 보이지만 본질을 들추어보면 동일한 인과가 자리 잡고 있다. 그건 바로 '자본과 경쟁'이다.

자본과 경쟁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책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 강수돌 교수의 <팔꿈치 사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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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우리 내부에 들어와 내면화되며, 경쟁과 자본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작동하는가를 파헤친 강수돌 교수의 책 <팔꿈치 사회>는 바로 이 자본과 경쟁, 경쟁과 자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집요하게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성찰하는 책이다.

먼저 이 책의 제목인 '팔꿈치 사회'는 독일에서 온 말로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를 일컫는다. 1982년 독일에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말인데, 자본주의 사회를 아주 적절하게 비유한 말로 평가된다.

저자는 우선 우리나라 노동자의 실 노동시간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다시 언급한다. '최장 노동시간'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실지표이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연 평균 노동시간은 2090시간. 전체 평균 1737시간보다 353시간 더 일한다.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인 네덜란드(1379시간)와 독일(1399시간)에 비해선 일 년에 무려 700시간이나 더 일한다. 하루 8시간으로 따져 약 4개월을 더 일하는 것이다. 이 수치마저 평균이기 때문에 실제 노동시간은 훨씬 더 길다. 저자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를 예로 들었는데, 연봉 8천만 원을 받는 노동자가 2012년에 주말이나 공휴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 3000시간을 일했다고 한다.

'노동 귀족' 운운하며 비난받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로서는 참으로 억울할 일이다. 그 연봉을 받기 위해 네덜란드나 독일 노동자보다 두 배 넘게 일하는 셈이므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일하는 동안 잃어버린 삶의 질을 생각할 때, 그 연봉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도 산업재해를 당하는 사람이 평균 200명이나 쏟아져 나오고, 이 중에 매일 10명이 목숨을 잃으며 2, 3명은 과로사로 숨진다고 하니, 삶의 질은 둘째 치더라도 목숨까지 위협받는 노동 현실인데, 이런 가운데서도 최장 노동시간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몸속에 '근면과 성실'의 유전자가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슬픈 모순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탈락과 배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탈락과 배제에 대한 두려움을 적절히 이용하여 우리 사회가 생존 경쟁에 몰입하도록 자본과 자본에 포획된 권력이 강제한다는 것이다.

경쟁은 필연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저자의 주장은 경쟁이란 '필연'이 아니라 자본의 '필요'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경쟁은 꼭 필요하고, 과도하거나 불공정하지만 않으면 좋은 것이며, 우리 인생의 본질이고 필수라고 말하는 것은 소수의 기득권을 위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이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이익과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주입된다.

각 나라별로 '국가경쟁력'(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을 강화하도록 부추기면 어느 나라가 일등을 하든, 경쟁에 참여하는 나라는 예외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고, 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쥐어짜고, 자연과 생태계의 생명력을 쥐어짜야만 한다.

저자는 극심한 경쟁구조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폐해를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경쟁 사회는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소수의 성공만을 위한 목표치를 정해놓고 모두가 달려가는 배타적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런 경쟁을 조장하기 위해 극소수의 성공이 마치 누구에게나 주어진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둘째는 경쟁 사회에선 어느 누구도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것이다. 김우중의 대우 그룹이나 정태수의 한보 그룹도 하루아침에 가라앉고 말았으며, 이는 일본 유수의 기업이나 미국의 지엠 등의 기업들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세계 기업의 평균수명이 13년에 지나지 않으며 30년 이내에 80%가 사라진다고 하며, 최근에는 기업의 수명이 더욱 짧아지는 추세(<망가뜨린 것, 모른 척 한 것, 바꿔야 할 것>, 강인규, 139쪽)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공멸의 상태에서 오직 자본만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어 권력마저 장악하고, 세계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과 지배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셋째는 경쟁 사회에서는 승자나 패자 모두 사회적 파괴의 공범자가 된다는 것. 경쟁력의 핵심은 생산성이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매출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외부 하청, 사내 하청, 임금 동결, 노조 억압, 원료 무단 채취, 납품 단가 인하, 폐수 무단 방출, 산업 안전 미비, 에너지 비용 인하, 그리고 노동시간 연장이나 노동 강도 강화를 추진한다. 이런 기업 운영 행태는 당연히 인간성, 공동체, 생태계의 지속적인 파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존경쟁은 하면 할수록 양극화는 더욱 심해진다. 부의 편중에 따른 사회 현상을 1990년대에 이른바 '20대 80 사회'라고 부르던 것이 갈수록 '10대 90 사회'로, 심지어 지금은 '1대 99 사회'라고 지칭하게 된 것은 생존경쟁은 곧 부의 격심한 편중 또는 양극화와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경쟁이 결코 우리 인간 사회의 필연일 수 없지만, 경쟁 사회는 필연적으로, 방글라데시 의류공장이 무너지게 하여 가엾은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하고, 경쟁교육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게 한다.

그리고 승자가 경쟁을 통해 누리는 기득권 역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거나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며, 경쟁의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따돌린 광범위한 패자들의 희생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행복은 곧 타자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게 생존경쟁의 본질인 것이다.

<팔꿈치 사회>는 이 밖에 심각한 경쟁 교육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깊숙이 논의하고 있으며, 세계 자본의 증식과 확장을 위한 다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자본의 활동, 그리고 구조조정의 결과와 저항, 대기업 집단의 무책임성 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쌍용차 정리해고,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용산 철거민 참사의 공통점은 국가폭력과 기업폭력이 결합하여 작동하였다는 점, 그 본질은 자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다리꼴 사회에서 원탁형 사회로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경쟁은 필수'라고 길들여진 사회 속에서 시류에 따라가기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게 진실이냐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경쟁과 이기심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며, 도리어 협동과 연대가 더 인간의 본질에 가까움을 깨달아야 한다. '경쟁에 반대한다'고 '나는 경쟁이 아닌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며 자본과 권력의 지배 전략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학교는 경쟁교육이 아닌 협동교육을 강화하고, 언론은 성공신화를 띄워서 경쟁의 내면화를 부추기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말도 안 되는 '국가경쟁력'이 아니라, '국가협동력'을 강화하도록 사회구조를 혁신해야 한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과 세계금융자본의 농간에 맞서 정부와 정부가 연대하고 시민과 시민이 연대하여,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지도 말고, 소중한 자연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도 말아야 한다.

따라서 유일한 대안은 그 기업이 가는 곳마다 모든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쟁을 그만두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의 원초적 존재이유다. 즉 '경쟁과 분열'을 통해 지배와 착취를 강요하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노동자 간 '경쟁의 지양'을 통한 단결과 연대뿐이다. 이것만이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다.(본문 43쪽)

또한 저자는 '원탁형 사회'를 주장한다. 지금처럼 극소수의 상류층이 기득권을 독차지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존경쟁에 목을 매는 '사다리꼴 사회'의 대안이다.

오늘날 교육은 너도 나도 대학을 가야 하고, 그것도 서울로, 그것도 이른바 'SKY대'라는 일부 극소수 대학만 가야 성공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필요한 사회는 시인학교, 기술학교, 애니메이션학교, 뮤지컬학교, 발명학교, 학문학교, 농부학교, 목공학교, 생태건축학교 등이 평등한 위상을 차지하는 사회, 그리고 각 영역별로 일정한 기준(예 70점)을 달성하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비슷한 대우를 해주는 사회, 그리하여 모든 사람의 개성을 자유롭게 살리면서도 서로 평등하게 존중하며 사는 사회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원탁형 사회'다.(본문 61쪽)

개다가 저자는 시적 상상력을 빌려 '자연의 노동'을 인정하자는 대안도 제시한다. '자연의 노동'을 인정한다는 것은 '햇볕의 노동, 바람의 노동, 물의 노동, 흙의 노동, 미생물의 노동, 풀의 노동, 밀알의 노동, 나무의 노동'을 인간의 노동과 동등하게 보자는 것을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이 아름답기는 하나 구체적인 제도의 측면을 다루는 데는 부족해보였다. 책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생존경쟁의 폐해와 대안을 다소 산만하게 배치하여 마음이 앞선 느낌도 받았다. 소통, 연대, 협동, 자연, 호혜 등의 용어들이 경쟁사회에 균열을 내려면 더 많은 탈경쟁의 노력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용어들을 반기기에는 노조 조직률조차 형편없는 우리 사회가 너무 취약해 보인다. 그러나 '생존경쟁이야말로 생존을 위협한다'는 논리의 지점은 분명하고, 이 또한 많은 깨달음을 제공하여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키는 씨앗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말미에 실은 글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더 이상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을 목표로 살아선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일류인생'이다. 그것은 꿈의 발견, 실력증진, 사회 헌신의 3요소로 구성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은 소수만 성공하지만 일류인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본문 236쪽)

덧붙이는 글 | <팔꿈치 사회>, 강수돌, 갈라파고스, 2013년 4월 9일, 1만 2천 원



팔꿈치 사회 -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강수돌 지음, 갈라파고스(2013)


태그:#생존경쟁, #양극화, #협동과 연대, #원탁형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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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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