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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념상이 있는 나가사키 평화공원은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낙하 중심지에서 지척인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에는 조선인과 중국인도 수감되어 있다가 피폭사한 우라카미 형무지소가 있던 이 평화공원에는 날마다 국내외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또 주변의 시민들도 산책삼아 자주 나오는 곳이다. 그런데 높은 언덕 위에 공원이 자리잡은 까닭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입구에서부터 제법 긴 계단을 한참 올라와야 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나가사키시는 2011년 10월, 계단 옆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공사에 착수한다.

평화공원으로 올라는 입구에 새로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와 그 오른편으로 보이는 방공호 흔적들.
 평화공원으로 올라는 입구에 새로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와 그 오른편으로 보이는 방공호 흔적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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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설치 전의 나가사키 평화공원 입구 옛모습.
 엘리베이터 설치 전의 나가사키 평화공원 입구 옛모습.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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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공사 착수 과정에서 나가사키시는 세 개의 방공호를 발견했다.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에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서 추가로 발견된 전시 유적으로서의 방공호였다.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평화공원의 피폭 유적을 보존하는 모임', '나가사키 증언모임' '나가사키현 피폭2세회' 등을 중심으로, 원자폭탄과 전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이 방공호의 전면 보존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펼쳐졌다.

이미 원폭낙하중심지에서 100~200m 떨어진 우라카미 형무지소가 있었던 평화공원 언덕 주변에는 무수한 방공호가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토록 원폭낙하중심에서 가까운 방공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있었던 소녀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는 것도 나가사키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시민과 피폭자들은 만일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직전, 공습경보가 해제되지 않았더라면 다수의 사람들이 방공호에 대피한 상태로 그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그중에서도 지난 2011년 가을에 발견된 평화공원 입구의 방공호 세 곳은 원폭낙하중심지에서 워낙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원자폭탄과 전쟁의 역사를 후세대에 전하는 유적으로써 상당히 의미를 지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시는 그해 12월에 시민단체의 보존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렇게 해서 내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던 세 개의 방공호의 첫 번째 것은 완전히 매립되었고, 두 번째 것은 내부에 콘크리트를 주입하여 입구에서 약 50cm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대신 그 입구에는 일대의 방공호에 대한 설명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평화공원 입구 오른편에 설치된 방공호 안내판.
 평화공원 입구 오른편에 설치된 방공호 안내판.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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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원과 폭심지 주변의 방공호에 대한 설명 안내판.
 평화공원과 폭심지 주변의 방공호에 대한 설명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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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원 입구 부근 방공호 앞에 설치된 안내판에서 소개하고 있는, 원폭 투하 당시 폭심지 주변에 있던 방공호를 표기해놓은 미군조사단의 자료.
 평화공원 입구 부근 방공호 앞에 설치된 안내판에서 소개하고 있는, 원폭 투하 당시 폭심지 주변에 있던 방공호를 표기해놓은 미군조사단의 자료.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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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0월의 내무성 지령에 따라, 나가사키시에는 천장이 덮어씌워진 참호식 방공호와 횡혈식 방공호가 무수하게 만들어졌다. 평화공원 인근에서 발견된 이 3개의 방공호도 횡혈식 방공호였다. 횡혈식 방공호란 입구는 제 각각이지만 그 안쪽에서는 각각의 방공호가 서로 연결되는 형태를 말한다. 그런데 원폭투하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나가사키 시내에 들어와 조사를 펼쳤던 '미국전략폭격조사단'은 바로 이 횡혈식 방공호의 안쪽으로 몸을 피해 직접적인 폭풍과 열선을 받지 않은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제로 원폭낙하중심지공원 곁을 흐르는 하천 쪽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였던 마쓰야마마치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소녀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마을 안에 있던 사람은 우연히 방공호에 피난해 있던 9살 소녀를 제외하고는 전부 즉사했다."

마쓰야마마치 500m 상공에서 폭발한 미군의 원자폭탄은 거대한 화구를 형성하여 주변 온도가 약 수백만도에 달했고, 그 열선과 방사선, 강력한 폭풍으로 그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한 순간에 삼켰다. 당시 마을에는 약 300세대, 1860여 명의 시민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때 단 한 명의 소녀 구로카와 사치코만이 살아남았다. 아홉 살 소녀의 생명을 구한 것은 원폭 낙하 중심에서 북쪽으로 고작 120m 떨어진 곳에 있었던 방공호였다.

그녀는 스물 일곱 살에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았지만, 원폭 체험을 말하지 않고 남모르게 조용히 살다가 원폭60주년을 지나 70대가 되어서야 언론을 통해서 조금씩 인터뷰에도 나섰다. 지난 2010년 봄에는 나가사키의 방공호 터를 방문하기도 했다.

"남편에게는 원자폭탄에 피폭되었던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요. 난 원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숨을 건진 인간이에요. 혹시라도 원폭의 영향이 있는 아이가 태어날까봐 무섭고 불안했어요."  

한편, 원자폭탄을 투하한측인 미국의 '미국전략폭격조사단'은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설치된 미육해군 합동기관으로서, 장래 군사력 정비를 위하여 미군이 실시한 전략폭격의 효과나 영향을 조사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들은 1945년 10월부터 12월까지 나가사키에서도 조사를 실시하여,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건물이나 다리 등의 구조물을 파괴하는 데 어떠한 효과가 있었는가를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평화공원 입구 오른편의 방공호를 설명하는 안내판의 방공호 도면.
 평화공원 입구 오른편의 방공호를 설명하는 안내판의 방공호 도면.
ⓒ 나가사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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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는 원폭 폭심지 주변의 방공호 약도 및 방공호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던 사람이 사망하고 생존했으며, 부상자는 어느 위치에 있다가 어떻게 부상을 당했고, 설사 등의 급성 방사능장애가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등의 상세한 청취조사를 실시하여 기록했다. 그 조사 결과, 방공호 입구에서 가까이 있던 사람은 폭풍과 열선에 의해 사망했고, 횡혈 등에 있어 폭풍과 열선을 직접 받지 않은 사람이 생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사단은 폭심지 주변의 약 180m, 540m, 720m라는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에 있던 방공호 안에서도 생존자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나가사키에서도 가장 교훈적인 사실은 폭심지 부근에서도 제대로 횡혈식 방공호에 들어간 수백 명의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 조사는 향후 미소냉전 시대 미국의 핵 대피소 건설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핵 공격을 받았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첫째, 공업시설과 의료시설의 분산화, 둘째, 방공호의 건설, 셋째, 인명을 지키기 위한 피난계획 등을 꼽았다. 이 보고서가 방공호, 즉 핵 대피소 건설을 핵 공격에 대한 유효한 대처방안으로 꼽은 이유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조사해본 결과 폭심지 주변의 방공호에서 생존자가 있었던 사실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나가사키방송(NBC)보도본부의 세키구치 다츠오 기자도 미국전략폭격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미소 냉전시대에 미국에서 핵 대피소 건설의 모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세키구치 기자에 따르면, 미국정부는 구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이후, 소련과의 핵전쟁을 상정하여 시청이나 학교등 공공시설의 지하에 핵 대피처를 지정하는 한편, 국민에게도 지하실이나 뒤뜰에 가정용 대피소를 만들도록 권장했다. 1989년 미소냉전의 종결 후, 핵 대피처의 필요성은 낮아졌지만 지금도 미국에는 많은 핵 대피처가 존재하고 있으며 인구당 보급률이 82%에 달한다는 데이터도 있다(일본 핵대피소협회 조사).

미국만이 아니라, 러시아, 영국, 이스라엘 등의 국가에서도 핵 대피소 보급률이 높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방공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핵 보유국의 핵 대피소 건설과 민간방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나 후세대가 원폭 투하 당시의 방공호에서 교훈삼아야 할 것은 튼튼한 방공시설을 지으면 전쟁과 핵무기 공격에도 끄덕없다는 점이 결코 아니다. 당시 방공호에 있어 살아남은 사람도 이후 방사능에 의한 후유증으로 고통받았고, 방공호 입구 근처에 있던 사람은 방공호 안으로 대피해 있었을지라도 폭풍과 열선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히로시마, 나가사키형 원자폭탄의 천 배 이상 위력을 가진 현재의 핵무기가 사용되면, 핵 대피처에서조차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살아남더라도 대량의 잔류방사선과 방사성 강하물에 의한 피폭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핵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바란다면, 핵 공격이나 핵 재난에 대비한 방호시설과 안전대피책을 잘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핵 대피소 자체가 필요없는 세상, 즉 핵무기와 모든 핵시설의 폐기와 전쟁 방지에 있다. 우리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수많은 전시 방공호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태그:#나가사키, #방공호, #핵 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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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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