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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에 유머가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유머 감각을 지니고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정치인이 거의 없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뼈아프게 느껴왔다. 거짓말과 비방과 막말이 난무하는 삭막하고 살벌한 정치판에서도 가끔이나마 유머가 빛을 말한다면 '멋진 정치'에 대한 희망도 생겨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의 정치풍토는 아예 처음부터 유머가 자리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와 어지러웠던 해방공간, 한국전쟁과 자유당 독재, 그리고 5․16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5․17군사정변과 5공통치 등을 거쳐 오면서 정치풍토는 획일성과 경직성이 고착된 가운데 권위주의 습성이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남북관계의 악화로 전쟁 분위기마저 감도는 가운데 '종북좌빨 타령'이 온 사회를 덮어 누르고 있는 양상이어서 유머의 여지는 더욱 협소해진 상황이다.

유머와 민주주의의 관계

지난 3월 11일 오후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하고 있다.
 지난 3월 11일 오후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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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대부분 유머 감각이 아예 없거나 유머를 전혀 모른다. 한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유머 구사를 접한 적이 있는데, 유머는 만국통용어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머 감각이 없거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을 때는 유머가 오히려 반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위대한 정치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인데,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머 구사 능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암살범의 흉탄에 목숨을 잃었다.

암살당한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1968년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열성적인 지지자들 중에는 유명한 역사학자인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도 있었다. 지지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딱 한마디만 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라고.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범의 흉탄으로 급작스럽게 삶을 마감해야 했다.

미국의 링컨, 영국의 처칠, 프랑스의 드골 등에게서 볼 수 있듯이 탁월한 정치가들에게는 해학과 기지가 어우러지는 유머 구사 능력이 비장의 무기 구실을 한다. 그런 유머는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의 소산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유머는 민주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또 진보적인 가치관과도 일맥상통한다.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일수록 유머의 영역은 확대되고, 수구적이고 반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유머의 여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다. 또 진보적인 가치관과 민주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에게서 유머 구사 능력은 더욱 쉽게 발휘된다. 유머는 확실한 신념과 철학의 표발이며, '여유'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유머는 정의감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다.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일수록 유머 감각도 뛰어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몇 년 동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의 미사에 참례하면서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미사는 비장하고도 뜨겁다. 때로는 눈물도 있다. 사실은 뼈아픈 심정들을 안고 미사를 지내면서도 강론 시간이나 영성체 후 공지사항 발표 시간에는 유머의 향연으로 웃음꽃이 만발하기도 한다. 폭소와 박수가 어우러지며 즐겁고 흥겨운 미사성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유머를 더욱 그리워하게 될 5년

박근혜 대통령이 3월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정부조직개편안 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불끈 주먹 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3월 4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정부조직개편안 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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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유머에 관한 말을 했다. 지난 5년 동안 유머가 없는 정치풍토 속에서 힘겹게 살아왔는데, 앞으로 또 5년 동안 유머를 접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살게 되리라는 얘기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했다. 박근혜에게서 유머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라는 얘기도 나왔다.

사상 초유의 '인사참사'와 국정공백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3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한 표정으로 발표한 대국민담화를 보면서 나는 유머를 모르는 정치지도자의 실체를 보는 기분이었고, 앞으로 5년 동안 유머가 없는 정치상황을 겪게 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번째 '부르르 담화'는 즉각 우리 집에도 먹구름 같은 영향을 주었다. 갑자기 모종의 불안과 공포가 우리 집을 엄습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미사와 대한문 미사, 전국 곳곳의 '생명평화 미사'에 참례하느라 노친께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했다. 암 투병을 하셨던 올해 연세 구순이신 모친께 설명을 드리고 허락을 얻느라 애를 쓰곤 했다. 왜 돈 쓰고 시간 쓰고 생고생을 하느냐는 말씀도 하시는 노친께 지난해 8월 출간한 목적시집 <불씨>를 한 권 드렸다. 고맙게도 내 시집 한 권을 다 읽으신 노친은 뭔가를 깨달으신 듯 월요일만 되면 미사에 늦지 않게 빨리 가라며 내게 채근도 하셨다.

그러시던 노친이 박근혜의 대국민 담화를 보시더니 잔뜩 겁에 질려서 이제는 제발 그만 좀 서울을 가라고 사정을 하는 식으로 태도가 달라져 버렸다. 박근혜가 하는 말과 표정을 보니 앞으로 어떤 화가 우리 집에 미칠지 모른다는 말까지 하셨다. 저 해방공간 시절부터 오랜 세월 모진 꼴을 다 보고 듣고 겪으며 살아오신 노친은 구순 시절에 다시금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기색이었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의 '부르르 담화'는 분명 큰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좋은 효과가 아니다. 국민에게 겁을 주고 불안을 조성하는 담화는 감동을 주지 못하고 생명력을 지닐 수 없다.

다시금 정치지도자들의 유머가 그리워진다. 유머가 생성되는 정치풍토를 갈구하게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건실한 토양이기 때문이다. 유머 없는 정치가 계속된다면, 이는 북한의 전제주의 정치와 비슷한 토양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치와 유머, #링컨, #로버트 케네디, #박근혜, #대국민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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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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