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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신체비율을 따르지 않고 머리, 손, 발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이렇듯 대형 석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일명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신체비율을 따르지 않고 머리, 손, 발 등을 크게 부각시켰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이렇듯 대형 석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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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남들 앞에 서는 센 척, 강한 척 하지만 골방에 들어서면 한없이 고독감에 빠져드는 외로운 존재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아침부터 문안 전화를 돌린다. 시험 날짜를 받아두면 자신이 관운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처녀보살'을 찾는다. 그렇듯 인간의 운명이란 한 치 앞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자에게 의탁하게 되고, 기도를 올리게 된다. 그런 기원을 올리는 곳이 동네 서낭당일 수도 있고, 팔공산 갓바위일 수도 있다.

아무리 우리 사회가 근대를 넘어 탈근대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내포된 불안감은 영구적이기에 기복신앙도 항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듯 필자도 꿈틀거리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꼬여 있는 실타래를 푼다는 생각으로 기원을 드리러 갔다. 최근에 필자가 새로 시작하는 비즈니스가 있는데 그 일이 잘되길, 기원드리러 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기도를 드리러 갔단 말인가? 갓바위로 갔는가? 아니다. 충남 논산으로 갔다.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논산 관촉사로 갔다. 은진미륵에게 기원을 드리려고.

은진미륵이 워낙 거대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성이 무척 작아보인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이 워낙 거대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성이 무척 작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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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는 군대교회

4월 4일 목요일 오전.

필자는 느긋해 있었다. 평일이라 고속버스를 타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논산까지 2시간 20분 정도 걸리니까 점심은 논산에서 먹으면 되겠군. 푸하핫! 예전 자전거여행 할 때 밥 먹었던, 그 백반집으로 가야지!'

그러나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세상일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에 가니 오전 논산행 버스가 다 매진됐다는 것이다. 추석 명절 같은 특별 운송기간도 아니고, 더군다나 평일 오전 시간에 버스좌석이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곧 있으면 임시버스가 증차되니까 좀 기다리세요."

평일날 임시버스가 운행된다는 소리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논산 연무대에서 입소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무대에서 입소식이나 퇴소식이 있는 날에는 순식간에 좌석이 매진이 되고, 증차까지 된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날 승차장에서는 사복을 입은 '빡빡 머리'들이 많이 목격됐었다.

강원도 군번인 필자는 그렇게 예비 '논산 군번'들과 함께 논산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군대시절에 다녔던 교회를 떠올렸다. 필자도 교회를 다녔었다. 물론 초코파이 때문에 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코파이는 군대교회에서 먹었던 초코파이였다.

초코파이 먹는 맛에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신앙은 참 순수했었다. 그 시절의 '기복'이라게 뻔하기 때문이다. 훈련의 무사복귀, 내무생활 잘하기, 무사히 제대하기 등등... 이것만큼 순수한 신앙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 것'들 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신앙이었다. 

관촉사가 있는 반야산에서는 황산벌이 눈 앞에 펼쳐진다.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눈에 들어온다.
▲ 황산벌과 은진미륵 관촉사가 있는 반야산에서는 황산벌이 눈 앞에 펼쳐진다.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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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이 보이는 반야산

관촉사는 논산시내에서 가깝다. 약 3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버스터미널에서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린다. 필자는 천천히 논산 시내를 걸으며 관촉사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반야산은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한 산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이 혼이 살아 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일명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입상이 서 있었다. 은진 지역에 있다해서 은진미륵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은진미륵 앞에서는 석등이 세워져 있다. 4각 석등으로 전형적인 고려식 석등이다. 유명한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이다. 이 석등 외에도 관촉사 5층 석탑이 은진미륵 앞에 병렬되어 있다.
▲ 은진미륵과 석등 은진미륵 앞에서는 석등이 세워져 있다. 4각 석등으로 전형적인 고려식 석등이다. 유명한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이다. 이 석등 외에도 관촉사 5층 석탑이 은진미륵 앞에 병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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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6년 동안 제작된 은진미륵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있었다. 어느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이 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타워크레인이 있었겠는가?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3단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혜명스님은 '옳거니'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필자도 사진에 등장한 분처럼 은진미륵께 삼 배를 올렸다.
▲ 은진미륵 필자도 사진에 등장한 분처럼 은진미륵께 삼 배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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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시대에 제작된 대형석불들

한편, 은진 미륵불이 제작된 고려 전기시대는 거석 석불이 유행한 시기였다.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던 것이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시켰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은 여러 개가 있다.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부위를 부각시킨 거대한 석불을 제작하였다. 그런 탓인지 관촉사 석불은 3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또 손은 마치 야구글로브를 낀 것처럼 아주 크다.

은진미륵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당장이라도 내게 그 큰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어이 곽 작가,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그럼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보다 세공기술이 덜해서 그랬던 것일까?

고려 전기 시대에는 고을의 평안에서부터 각 개인의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 같은 거대한 석불이 제작되었다. 이런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마치 돌로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으니 해당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방범용 CCTV가 없었더라도 아주 든든했을 것 같다. 은진미륵이 서 있는 반야산도 황산벌이 보이는 곳으로 인편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대조사는 충남 부여에 있는 사찰이다. 부여의 옆동네가 논산으로 두 지역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대조사는 충남 부여에 있는 사찰이다. 부여의 옆동네가 논산으로 두 지역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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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의 디테일은 선이 굵은 디테일

한편 디테일(detail)적인 관점으로 은진미륵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충남 서산시 가야산 자락 절벽에는 6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섬세한 백제 불교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듯이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정교성을 강조한 '세밀한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도 크고, 얼굴도 큰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얼굴과 손을 강조했고, 더군다나 발가락까지 크게 부각시킨 은진미륵을 두고 기계적인 관점에서 디테일이 떨어진다고 하면 그거 정말 곤란한 일이다. 세밀한 디테일이 있는가 하면 선이 굵은 디테일도 있지 않겠는가?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서산 삼존마애석불.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세밀한 디테일이 두드러진 정교한 석불이다.
▲ 서산삼존마애석불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서산 삼존마애석불.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세밀한 디테일이 두드러진 정교한 석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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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께 삼배를 올린 후, 필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자리를 계속 옮겨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다 카메라 LCD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함박웃음이었다. 그냥 은진미륵 앞에 서 있으니 좋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냥 복을 넝쿨째 받은 느낌이었다.

은진미륵께서 복을 내려주셨으니 필자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번창할 것 같다. 새로운 비즈니스? 필자는 현재 outdoor와 tour를 접목한 일명 '아웃투어'를 아이템 삼아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고, 그저 예전부터 해왔던 여행을 나름대로 특화시켜볼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오마이뉴스>에도 아웃투어와 관련된 기사를 송고할 생각이다.

논산 관촉사에 가서 은진미륵께서 주신 '기복'을 받아왔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 같다. 독자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해본다.

필자 대신 등장한 나의 배낭. 이제 저 배낭을 메고 계속 해서 '모험'을 떠날 생각이다. 은진미륵의 큰 손을 붙잡고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은진미륵 필자 대신 등장한 나의 배낭. 이제 저 배낭을 메고 계속 해서 '모험'을 떠날 생각이다. 은진미륵의 큰 손을 붙잡고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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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 다음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태그:#은진미륵, #관촉사, #관촉사석보미륵보살, #논산, #아웃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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