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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I '귀덕리 팽나무(A Hackberry Tree in Gwideok Village)' 아크릴물감 80×116.7cm 2013. 이 풍경에는 제주의 '밝은 그늘'이 서려있다
 강요배 I '귀덕리 팽나무(A Hackberry Tree in Gwideok Village)' 아크릴물감 80×116.7cm 2013. 이 풍경에는 제주의 '밝은 그늘'이 서려있다

예순 하나를 넘기고 완숙기에 도달한 '강요배' 작가의 개인전이 4월 21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에는 그간 심혈을 기울인 근작 회화 및 드로잉 등 50여점을 선보인다. 서울대 회화과 출신으로 서울 창문여고에서 6년간 교사도 했지만 이도 내던지고 작업에만 충실하기 위해 제주 귀덕리에 정착한 지 22년째다.

강요배 작가는 1988년 '한겨레'에 연재된 현기영의 <바람 타는 섬>의 삽화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 후 3년간 4·3항쟁 관련 연구와 논문과 인터뷰 그리고 현장답사를 재구성하여 섬뜩할 정도로 극명한 리얼리티를 보여주며 민중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근작일수록 추상성이 강하다. 원래 구상작가였기에 추상을 더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고 변용시키고 있다. 멀게는 우주를 가까이는 일상을 끼고 작품을 한다. 요즘은 "내가 어디로 가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한단다.

기자들이 "서울생활이 그립지 않느냐"고 묻자 "자연의 질감이 좋은 고향을 너무 타기에 전혀 그렇지 않다"며 "제주도가 꼭 변방만은 아닐 수 있다"고 답한다. 위에서 보듯 매운 칼바람에도 꿋꿋이 버텨내는 팽나무, 그 곁에 눈부시게 피어있는 유채꽃의 황홀경에 빠지면 그의 필획이 절로 춤을 추는 모양이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어스름의 미학

강요배 I '길 위에 하늘(Sky on the Road)' 아크릴물감 194×259cm 2011
 강요배 I '길 위에 하늘(Sky on the Road)' 아크릴물감 194×259cm 2011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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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하늘'이 그런 분위기지만 시골에 살다보면 일찍 눈이 떠지게 되고 먼동이 터오는 새벽하늘을 보게 되고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어스름의 황홀경을 맞게 된단다. 그리고 그 순간에 형상은 사라지고 색채는 형용할 수 없이 풍요로워진단다. 강요배 같은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가 그런 결정적 순간을 놓칠 리가 없다.

추상은 구상과 다르게 그림이 바로 나오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둔 풍경을 꺼내오는 방식이기에 꼭 대상만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란다. 추상은 필요 없는 것은 빼고 지우고 버리기에 사물이나 대상을 한 발자국 떨어져 멀리 보는 관점이 필요하단다.

제주의 풍광, 스치는 붓질과 색의 높낮이로 변주

강요배 I '움부리-백록담[설경]' 아크릴물감 259×194cm 2010. '움부리'는 화산분출로 생긴 움푹한 엉덩이인 '굼부리'를 뜻한다. 마치 '움'하고 소리를 내는 것 같다
 강요배 I '움부리-백록담[설경]' 아크릴물감 259×194cm 2010. '움부리'는 화산분출로 생긴 움푹한 엉덩이인 '굼부리'를 뜻한다. 마치 '움'하고 소리를 내는 것 같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미묘한 색감을 내는 과정이 간단치 않아 보인다. 그 비밀이 궁금했는데 그는 색채를 음계처럼 반올림, 반내림시키거나 명암의 미묘한 색조를 되살리는 데 있다고 귀띔한다. 그의 노란빛엔 제주의 유채꽃빛이 물들어있듯 그의 적청록 계통도 제주의 향토색이 용해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인상파'가 색보다 빛의 인상을 중시했듯 그는 빛보다 속도감 넘치는 붓 터치를 더 중시한다. 그래선지 그의 풍경화는 정지된 게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

미세한 흔들림 속 작가의 감성 뒤섞어

강요배 I '해·풍·홍(Sea·Wind·Red)' 아크릴물감 80×116.7cm 2012
 강요배 I '해·풍·홍(Sea·Wind·Red)' 아크릴물감 80×116.7cm 2012

'해·풍·홍' 속 제주의 쪽빛바다와 바람에 나부끼는 독특한 초록잎사귀와 빨간 칸나꽃잎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제주도스럽다. 그는 이렇게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보다 느낌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양이다. 그래서 평상시에 감성연습을 꾸준히 한단다.

충격적인 것보다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에 마음이 끌려 그림을 그리나 보다. 작가의 내면에 오래 묵혀두었던 혼과 기를 필요할 때 다시 꺼내 쓰는 모양이다. 매순간 달라지는 제주의 햇빛과 바람과 공기를 뒤섞어 신기어린 필치로 그리는 것 같다.

제목도 관객과 소통하는 또 다른 개념미술

강요배 I '적벽(Red Cliff)' 아크릴물감 162×130cm 2010. 동양의 산수와 서양의 풍경이 뒤섞인 것 같다
 강요배 I '적벽(Red Cliff)' 아크릴물감 162×130cm 2010. 동양의 산수와 서양의 풍경이 뒤섞인 것 같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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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작가가 생각하는 소통방식은 내가 먼저 변하고 남도 변하고 그래서 세상도 변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풍경화는 로컬하지만 번역이 필요 없기에 또한 글로벌하다. 아직 해외미술시장에 선보인 적이 없다는데 제주의 영기와 빼어난 풍광이 수준 높게 형상화되어 있어 대박을 터뜨릴 가능성이 높다.

강 작가는 작품 감상에서 잔 이야기보다는 작품자체로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제목붙이기'에 고심한다. 이건 그 나름의 개념미술로 작품의 과잉설명이나 축소해석을 피하면서 단서만 주는 방식이다.

"나는 자연과 공명을 중시한다"

강요배 I '파도와 총석(Wave and Rock Columns)' 아크릴물감 259×388cm 2011
 강요배 I '파도와 총석(Wave and Rock Columns)' 아크릴물감 259×388cm 2011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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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석'은 180만 년 전 신생기에 치솟아 오른 불기둥이 제주도 중문과 대포해안을 따라 생긴 바위의 군상들이다. 오랜 세월 파도에 씻기면서 육면체 돌기둥이 된 것이다. 그 해안에 거친 파도와 부딪칠 때 피어나는 하얀 포말 꽃을 힘찬 붓질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마치 다큐영상을 보는 듯 그 현장감이 생생하다.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하는 작가의 첫 마디는 "자연과의 공명을 중시한다"였다. 여기 보여주는 풍경화와 그 속에 담긴 제주이야기가 바로 자신임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요동치는 난파는 파란 많은 이곳의 역사를 상징하는 기표로 읽혀진다.

그의 풍경은 단순히 자연만 아니라 역사도 포함

강요배 I '잔설(The Remaining Snow)' 아크릴물감 227×182cm 2011
 강요배 I '잔설(The Remaining Snow)' 아크릴물감 227×182cm 2011

위 '잔설'은 '4·3' 때에 감당하기 힘들었던 상흔의 자국이 묻어있는 작품 같다. 그 당시 서북청년단명단에 있는 이름이 호명될 때 발음이 비슷해 자기라고 착각해 불려나갔던 자녀들이 다 죽었단다. 그 후 부모들은 자녀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걸을 붙여줬고 '강요배'라는 이름도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어느 기자가 "아직도 민중작가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난 변한 게 없다"며 "민중이라는 개념이 과거독재시절에 너무 정치적 혹은 이념적으로 협소하게 해석되었다"며 "민중은 노동하는 인간과 그 삶의 터전인 자연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까지 넓게 다 포함하기에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제주의 전설에는 거센 바람을 막아준다는 빌미로 해만 뜨면 먹을 걸 요구하는 외눈박이 거인을 물리치는 '영등할멈'이 나오는데 그의 작업도 외부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제주를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상징적 의미로 작동하는 것 같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제3의 관점

강요배 I '풍과(Wind Fruit)' 아크릴물감 65×91cm 2012. 제주 풍의 주황색이 참 정겹게 느껴진다
 강요배 I '풍과(Wind Fruit)' 아크릴물감 65×91cm 2012. 제주 풍의 주황색이 참 정겹게 느껴진다

그의 미학은 '풍과'에서 보듯 정물화도 풍경화도,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제3의 관점이다. 그도 "나는 꾸준히 내 나름으로 동서양화를 융합하는 방식을 모색해왔다"고 고백한다. 회화에 대한 통념과 경계를 넘어 모든 걸 포용하는 자세다.

또한 그는 "작가는 전위(avant garde)나 윤리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때 자유롭다"며 요즘 대세를 이루는 설치미술, 개념미술, 미디어아트 등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런 조류나 유파에 관계없이 자신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그만의 '강요배스타일'을 낳기 위해 내심 많은 모색과 실험을 한단다.

그의 화풍을 종합해보면 친근하면서도 아득하고 잔잔하면서도 격하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가 고향예찬의 심정으로 작업을 해서 그런지 치열한 경쟁 속 과도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이들에게 할머니 약손 같은 치유의 효과를 내는 것 같다.

강요배 작가의 삶의 발자취

▲ 작품설명을 하는 강 작가 색채의 질감이 시간의 여러 결 속에 담겨질 때 명암의 풍부한 색감을 낸다고 설명하는 강요배 작가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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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강요배 1952년 제주출생 197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8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현 제주에서 거주 및 작업 [수상] 1998년 민족예술상 수상

[개인전] 2013년 '강요배전' 학고재 갤러리(서울). 2011년 '풍화' 제주 돌 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제주). 2009년 '강요배의 습작시절' 제주교육 박물관(제주). 2008년 '스침' 학고재 갤러리(서울) '4·3 평화기념관 개관기념 특별전: 강요배 4·3 역사화-동백꽃 지다(제주). 2007년 '섬 빛깔'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진흥원(제주). 2006년 '땅에 스민 시간' 학고재 갤러리(서울), 아트스페이스(제주). 2003년 '강요배' 학고재 갤러리(서울). 1999년 '금강산' 아트스페이스(서울). 1998년 '4·3 50주년기념 동백꽃 지다 순회전'(서울 학고재, 제주, 광주, 부산, 대구). 1995년 '섬 땅의 자연' 조현화랑(부산). 1994년 '제주의 자연' (서울 학고재, 제주). 1992년 '제주 민중항쟁사' (서울 학고재, 제주, 대구)

[제주4·3의 진실 캐기] http://blog.ohmynews.com/rufdml/81235


덧붙이는 글 |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 02) 720-1524 www.hakgojae.com



태그:#강요배, #제주화가, #'4·3항쟁', #민중미술, #학고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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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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