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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니 흥에 겨워진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는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 건너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 주"하는 노래가 울려퍼지고, 저기서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하고 시를 읊조린다. 그래서 정극인도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상춘곡>을 봄에 지었나 보다.

그런데 노래들은 한결같이 산과 들에 꽃이 핀다고 말한다. 이는 정극인의 <상춘곡>도 같다. "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 (중략)  /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나조해 조수(釣水) 하새. /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 화풍(和風)이 건듯 부러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고 했으니, 그가 노니는 곳은 대략 산자락 아래 물가의 정자 정도다.

야생화농원. 꽃이 많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사람이 적을 때를 기다려 사진을 찍었다.
 야생화농원. 꽃이 많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사람이 적을 때를 기다려 사진을 찍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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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대의 도시인은 시대에 맞게 꽃구경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꼭 원거리를 달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까지 찾아가 '상춘'을 할 필요는 없다. 봄의 전령은 산수유, 개나리 들부터 찾아오지만, '화풍'은 사실 그 무엇보다도 내 마음속에 먼저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업무 탓에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들렀을 때에도 사정은 같다. 한국인은 너무 많이 먹는다는 말도 있지만, 어떤 휴게소는 삭막한 분위기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야생화 전시장'이나 '갤러리' 등을 갖추고 있다. 꼭 산과 들을 찾아가지 않아도 근무 시간 중에 완연한 봄의 향내를 짜릿하게 맡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 이렇게 현대는 산과 들이 사람을 위해 아파트 안, 공공기관 현관, 고속도로 휴게소 등을 찾아올 필요도 있는 시대라는 말이다.   

수국
 수국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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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는 첫 휴게소 '동명'에 잠시 들렀다가 사람들이 기웃기웃거리는 광경을 본다. 사람들 머리 위에는 '우리 산에 야생화'라는 글자가 보인다. "아하, 봄바람을 타고 흘러온 꽃의 방향에 취한 도시인들이 저기 모여 있구나!" 하고 짐작한 끝에 스스로도 도시인이니 나 역시 그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수국화 앞에 선다. 이 꽃이 전시장 입구에 놓여 있기도 했지만, 원래 수국화는 내가 각별히 좋아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맑고 화사하면서도 고결한 분위기의 수국화, 마치 속의 아름다움과 겉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수국화가 좋다.

수국화의 원명은 수구화였다고 한다.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꽃, 또는 비단으로 만든 수 작품 같은 꽃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수구화(繡毬花)! 이름만 해도 얼마나 멋진가. '아내가 예쁘면 처가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고 했지만, 수국화를 좋아하는 나는 그 이름까지도 남김없이 사랑한다.

해바라기앵초 무스카리
 해바라기앵초 무스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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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초 랜디
 앵초 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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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파눌라 호주매화
 캄파눌라 호주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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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해바라기처럼 생겨 신기한 느낌을 풍기는 해바리기앵초, 도도한 카리스마가 풍겨나는 무스카리, 작고 고운 아이들이 한꺼번에 꽃다발처럼 밝게 고개를 든 채 웃고 있는 난만의 앵초, 작은 무궁화인 듯 선홍빛 모란인 듯 그 진한 빛깔이 유난한 랜디... 그리고 캄파눌라, 호주 매화 등등 갖가지 꽃들로 야생화 전시장 안은 봄의 기운이 화끈 달아올라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전시장 안의 관객들 중 반은 남자 어른들이다.  이렇듯 봄이 흐드러진 전시장이니 어찌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들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으리.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이 꽃 저 꽃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이름을 적기도 하다가 가끔은 팻말이 없어 곤혹스러워 하는 중에 안내원인 김은주씨가 종이쪽지에 하나하나 꽃이름을 적어준다. "집에 가서 사진을 정리하려면 꽃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분홍빛 메모지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친절을 베푼다. 매발톱, 바람꽃, 예삐, 캄파눌라, 알프스 민들레, 카라, 홍버들, 앵초, 독일앵초, 장수매, 호접란, 홍자단...... 과연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그런데 귀가 후 문제가 생겼다. 꽃 사진은 카메라 안에 가득한데 그녀가 적어준 꽃이름과  연결하기가 말 그대로 '얽힌 실타래'처럼 난해하다. 휴게소 야생화 전시장에서 "얘는 매발톱, 재는 바람꽃" 하고 그녀의 설명을 들을 때에는 다 알았는데, 몇 시간 지나고 나니 그저 모든 게 '아리송'이 되고만 것이다.
김은주 씨가 적어준 꽃 설명 메모
 김은주 씨가 적어준 꽃 설명 메모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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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좋은 생각이 났다. 봄꽃 소개도 하고, 꽃의 향기를 사방에 퍼뜨리기 위해 글을 쓰던 중 문득 재미있는 발상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꽃들을 직접 그 이름을 들어가며 소개할 것이 아니라, 내가 야생화 전시장에서 본 것처럼 독자들도 그렇게 안내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반문이 일었던 것이다.

그래서 12장의 사진을 붙이고 번호를 매겼다. 지금부터 독자 여러분께서도 야생화 전시장을 한번 둘러보시라는 얘기다. 1번부터 12번까지, 꽃 이름이 뭔지 떠올려 보시고, 확실히 아는 분께서는 '댓글'을 달아 지식 봉사활동을 하시면 어떨까. 그런 분이 계시면 독자들은 꽃 향기도 맡고 사람향기도 맡을 수 있으니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 주"라는 노랫말이 살아숨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으리라.

무슨 꽃?
 무슨 꽃?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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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무스카리, #바람꽃, #앵초, #캄파눌라, #동명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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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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