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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기운에 여기저기 파란 새싹이 돋는가 싶다가는 이내 한여름의 폭염이 잠깐 가을이 왔다가는 10월 무렵까지 쭈욱 계속되는 재미없는 날씨를 가진 이곳 캘리포니아. 이곳은 제대로 캘리포니아를 즐기지않는 이들에겐 정말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동네라는 평을 일반적으로 받고 있다. 몇년 전 까지만 해도 나도 그런 평가를 내리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회사와 집 사이를 따분하게 오가는 생활에 젖어있거나 기껏 나선다고 나서는 곳이 골프장만한 크기의 잔디밭과 인공호수안에 떠다니는 오리들을 구경할 수 있는 거창한 공원, 2시간 정도 운전하면 쉽게 갈 수 있는 온천과 카지노 또는 놀이공원.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아울렛을 들리고 또는 좀더 극성스러운 이들이 왕복 10시간 꼬박 운전해서 다녀오는 라스베이거스 정도라 할 수 있겠고, 대부분은 그렇게 따분한 일상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에 만족해하고 스스로 그만하면 쉬고 왔다고 위안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까지를 포함해 낮잠 한 번 잘 여유없이 꽉꽉 짜여진 스케쥴과 주부로서의 사명감에 열중하면서 20여 년을 쉶없이 달려왔던 나에게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야외활동의 기회는 그야말로 그러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후회할만큼의 황홀한 반전이었고 감격의 순간들이었다.

그런 우연한 기회를 시작으로 나는 도처의 산을 다니며 산행을 하고 캠핑을 하고 스키를 배우기도 했고, 운명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암벽을 배우기까지 하는 등 그야말로 인생의 대반전을 몇년 사이에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겐 짧은 캘리포니아의 겨울이라봐야 별 게 없었고 기껏해야 친정엄마 계신 한국땅과 맞닿은 태평양이 보이는 근처 바닷가를 찾아가 찬바람을 실컷 맞고난 뒤 따뜻한 코코아 한잔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거나, 아이들을 차뒷자석에 태우고 안개속을 헤집고 해안선을 따라 샌프란시스코까지 드라이브해 올라가서는 오래된 친구를 만나 밤새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며 밀린 이야기를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산행을 하게되면서부터는 겨울이되면 자박자박 걷던 산행의 재미를 너어서 제대로 장비를 갖추고 얼어죽지 않을만큼의 든든한 옷가지를 챙겨 떠나는 데 솔솔한 재미를 느끼게 됐다. 그리고 그 무거운 배낭엔 여지없이 플라스틱 물병에 옮겨담은 도수 높은 알콜 음료가 무장해제된 채 담겨있곤 한다.

비가 오면 마음이 설레인다. 벌써 저높은 산봉우리에는 눈이 올거라 짐작되기에 비를 맞이하게 되면, 새로 사귄 애인을 만나러 갈 생각에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가지고 있는 옷가지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하는 것 이상으로, 집 안과 밖을 들락거리며 장비를 챙기고 옷을 꺼내 싸고 풀고를 몇번이나 반복했다. 또 지고 올라갈 음식을 싸느라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곤 하는 것이다.

떠나는 길, 산 속에는 눈이 펑펑 내릴거란 생각에 가슴이 들뜬다.
▲ 비는 내리고 떠나는 길, 산 속에는 눈이 펑펑 내릴거란 생각에 가슴이 들뜬다.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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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일부터 찌뿌드하던 하늘이 2일 오전이 되면서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거세지 않았지만 잔뜩 검게 물든 하늘의 분위기로 봐서 쉽게 그치지 않을 모양새로 판단된 직후, 나는 또 짐꾸리기에 마음이 바빠졌고 정오가 다된 시각에 간단히 요기를 한후 길을 나섰다.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주차장에서 짐을 정리하고 다시한번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 Icehouse Canyon 들머리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주차장에서 짐을 정리하고 다시한번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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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과 들머리에서 만나 짐을 다시 한 번 정비하고 나눠진 뒤 산길로 접어든다. 진눈깨비로 변한 비가 후려치는 느낌이 상당히 따가운게 바람이 그새 훨씬 거세어진듯 느껴지지만, 눈이 제대로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제서야 다늦은 산행길로 올라서는 우리 일행을 바라보는 눈썰매 행락객들의 수상해 보인다는 듯한 눈초리를 뒤로 하고 우리는 뚜벅뚜벅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걷기 시작하는 일행
▲ 들머리 초입 걷기 시작하는 일행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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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도 지고 간다.
▲ 짐꾼들 많이도 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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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는 언제부터인가 큰 눈송이로 바뀌었고 거세어진 바람에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만큼 힘든 운행이 시작되지만 텐트와 먹을 식량을 잔뜩지고 익숙한 지형을 파악하며 산을 오르는 우리에게 턱까지 차오르는 숨외에는 겁날 것도, 막힐 것도 없었다.

난...늘 꼴찌다, 키고작고 다리도 짧고 산행수준조차 초짜이니.
▲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 난...늘 꼴찌다, 키고작고 다리도 짧고 산행수준조차 초짜이니.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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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높아질수록 앞서가는 일행과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지만 난 전혀 걱정없다. 5분에 한 번씩은 날 뒤돌아봐주는 대장님이 앞에 있으니까.
▲ 앞선 일행 그리고 뒤처진 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앞서가는 일행과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지만 난 전혀 걱정없다. 5분에 한 번씩은 날 뒤돌아봐주는 대장님이 앞에 있으니까.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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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턱쯤 왔네 이제서야.
▲ 등반중인 나 중턱쯤 왔네 이제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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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쌰으쌰 해보지만 얼굴이 찌그러지는건 면할수 없는 누가 시키지도않은 이 중노동을 왜 사서 하고 있는지.
▲ 즐거워도 힘든 건 힘든 거다. 으쌰으쌰 해보지만 얼굴이 찌그러지는건 면할수 없는 누가 시키지도않은 이 중노동을 왜 사서 하고 있는지.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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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까지는 올라가서 텐트를 칠 수 있으려니 했지만 워낙 거세게 부는 눈폭풍에 새들을 밟긴했지만 서 있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텐트는 고사하고 앉아서 쉴만큼 만만한 구덩이조차 찾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새들에서 10여 분 내려와 있는, 그나마 아늑한 공간에 텐트를 치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쉬지않고 겁나게 내려앉는 눈 때문에 진도가 잘 나가질 않는다.

이거야 말로 중노동중의 상중노동입니다. 그래도 허리가 아프지 않게 편히자려면 바닥을 평평히 고르어야 합니다.
▲ 텐트자리 다지기 이거야 말로 중노동중의 상중노동입니다. 그래도 허리가 아프지 않게 편히자려면 바닥을 평평히 고르어야 합니다.
ⓒ Sun Kyu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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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들을 내던지고 한쪽에서 삽으로 눈을 퍼내면 한쪽에서는 몇사람이서 눈을 밟아 다져내는 작업또한 어렵긴 마찬가지.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내 산소가 부족해 지는 터라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던 탓도 있겠지만, 오후 내내 눈을 맞아 한층 무거워진 똥짐을 지고 운행하느라 기운을 뺀 탓도 있었으리라. 거의 바닥이 다져지고 나서 순식간에 텐트를 치고 둘러보니 30여 분 사이에 엄청나게 눈이 더 내렸다.

밖에서보면 이래도 안에 들어가 조금만 쉬면 따뜻해지리라.
▲ 오늘 우리가 밤을 지샐 쉘터 밖에서보면 이래도 안에 들어가 조금만 쉬면 따뜻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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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모든 것은 다 젖었고 몸은 온기를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좁은 텐트 안에서 순식간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은 텐트 내에서 스토브를 열어 불을 붙이고 한 사람은 배낭안의 것들을 꺼내 손바닥만한 텐트안에 여기저기 던져놓고는 드라이백에 들어있어 그나마 젖지않은 침낭을 꺼내 펼친 뒤 겉옷만 벗어제끼고는 얼음장같이 얼어붙은 몸을 후다닥 쑤셔넣는다. 코만 내놓은채 그렇게 십여분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몸을 꼼지락거려서 양말을 갈아신고 겉옷을 벗고 내복을 다시 갈아입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온통 물이고 얼음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따뜻한 온기가 퍼진다.
▲ 눈 속에서 홀딱 젖은 쟈켓을 말리는 중 온통 물이고 얼음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따뜻한 온기가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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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해진 공기가 텐트를 채우고 나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몸이 녹았다. 제일 먼저 물을 끓여서 둥글레차를 만들어 옆 텐트에도 한 모금씩 가져다 드린 후 이젠 제대로 정리하는 시간. 식량과 관계된것들은 텐트 맨 앞쪽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젖지 않은 옷가지들은 드라이백에 넣어 침낭 안에 다시 넣어두고 젖은 양말과 옷가지들은 최대한의 방법을 이용해 텐트안에서 말리는 방법을 시도한다.

젖은 양말도 부지런히 말려야 또 신을 수 있다.
▲ 양말 말리기 젖은 양말도 부지런히 말려야 또 신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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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지락 거리다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5시를 넘겼다. 부지런히 밥을 짓고 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는 시간. 빌게이츠도 삼성의 이회장님도 주식 황제 워런 버핏 할아버지도 부럽지 않은 최고의 만찬을 코드가 맞는 몇몇의 지인들과 함께 낄낄거리며 즐기고 있다.

결국 먹기 위해 이 먼 길을 걸어 올라왔던가?
▲ 푸짐한 저녁식사 결국 먹기 위해 이 먼 길을 걸어 올라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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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시리면 체면 차릴 것 없이 아무거나 뒤집어 씌우고 녹여야 하고.
▲ 덧신 발 시리면 체면 차릴 것 없이 아무거나 뒤집어 씌우고 녹여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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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면 다 큰 어른도 아이같아지는가 이런 거 겁없이 하곤 한다.
▲ 아이들 하는 짓 '브이' 산에 가면 다 큰 어른도 아이같아지는가 이런 거 겁없이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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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하늘이 깜깜해지고 오늘 우리가 염원했던 소원이 이뤄졌다. 바로 보름달을 보는 것. 비가 오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상 오후 내내 비가 내리거나 산에 눈이오면 대부분 밤늦게 그 눈이 그치고난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보름달이 떠오른다는 것, 바로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전방 몇십 킬로미터 안에는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수다를 떨고 주절거리기를 끊이지 않았던 우리는 텐트 밖으로 다가오는 훤한 불빛에 의아해 했고 어느새 그친 눈은 두리번 거리는 내 머리 위에서 비추는 헤드랜턴에 보석같이 반짝이는가 했는데 머리를 들어보니 여지껏 본적없던 휘황찬란한 보름달이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떠오른 대보름달.
▲ 기다리던 보름달 드디어 떠오른 대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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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할말을 잃고 한참을 넋놓고 바라다 봤다. 숨죽여 바라보는 보름달에는 나의 소원도 있고 나와 함께 있는 지인들의 염원도 기도도 들어있다. 마치, 그 어느 누구의 소원도 다 이뤄줄 수 있을 것만 같이 포근하게 빛나는 보름달에 취해 이미 알코올 도수로 인해 높아졌던 우리의 취기는 훨씬 더 심해진 듯했다.

한낮 동안의 운행과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밀려오는 나른함에 더해진 알코올 그리고 달빛까지. 덕분에 황홀하도록 포근한 잠이 나도 모르게 밀려왔다.

밖에 내놓은 배낭은 거의 얼음 수준으로 꽁꽁 얼었다.
▲ 아침풍경 밖에 내놓은 배낭은 거의 얼음 수준으로 꽁꽁 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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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앞이 환해짐을 느껴 눈을 뜬 아침은 또 하나의 장관. 해가 뜨기전 이른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 여기까지 올라온 극성스런 산행인들의 모습이 벌써 눈에 띄고 이런 폭설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한 우리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숭늉밥을 끓여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신 후 짐을 챙기고 텐트를 접어 배낭을 꾸리며 올려다 본 발디 정상은 대단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겨울산행에 적합한 모든 것을 갖춘 캘리포니아주 산행인들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마운틴 발디는 매년 산악인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위험도가 높은 산이기도 하지만, '고수'들과 함께 하는 겨울산행에 발디 만큼 적절한 산도 없기에 이날 아침도 각 지역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보낸 '산꾼'들은 벌써부터 들머리에 바글바글하리라.

하산길 옆으로 펼쳐진 설경에 넋을 잃다.
▲ 너무도 멋진 한 폭의 그림 하산길 옆으로 펼쳐진 설경에 넋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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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챙겨 하산한 후 주차장으로 돌아와 이미 땀으로 젖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오랫동안 싱크대 밑에 묵혀뒀던 쓰레기를 처리한 거서럼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머리 속은 상쾌하기만 하다. 묵직한 종아리가 불편은 하지만 이 정도 피로감 같은 것은 오히려 종아리의 알통이 서서히 풀려가고 걷는 발걸음이 가벼워 지게될 때 나의 이같은 광기어린 산행을 기억해내서 또다시 불을 붙이는 이그나이터가 될 뿐이다.

내려오니 다시 한여름 날씨가.
▲ 하산 종료 내려오니 다시 한여름 날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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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 꼭대기 그 누구보다 높은 지점에서 보름달을 본 내게 올해의 소원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나는 감히 바란다.


태그:#정월대보름, #설산, #소원, #마운틴발디, #알콜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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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세상구경과 집밥사이에서 아슬아슬 작두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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