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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연 시인의 시집 <내 칩은 두 개>의 표지.
 손태연 시인의 시집 <내 칩은 두 개>의 표지.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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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쇼윈도우에 걸린 야한 레이스 속옷을 보면
몸이 부풀어 오른다

와이프는 늙어가는 볼륨없는 몸매
지하철 내 앞에서 등 돌리고 선 미니스커트
희고 긴 다리를 보면
출근가방을 껴안고 몸이 부풀어 오른다
어느새 나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봄볕에 돋보기를 닦고 나온 길 위로
여름 가을 겨울이 순식간에 스러지고
부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음, 벌써 낙엽인가
음, 벌써 눈인가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소주를 마시며
음 벌써 21세긴가

지그재그 걸으면 핸드폰을 여니
"당신 지금 몇 신지 알어? 인생 왜 그렇게 살어어~"
하이톤의 와이프 닥닥 긁는 소리

"응~ 자기야 멋쩌어어~"
주점에서 애교 떠는 아가씨에게 팁을 주고
나는 그 말을 산다.

아, 가물가물한 길이여
볼륨없던 무대여
그러나 무대 위로
아가씨들이 춤을 춘다
빵빵한 몸매
빨간 브래지어
빨간 끈 팬티

내 몸은 다시 부풀어 오른다

<내 칩은 두 개>라는 시집을 펴 낸 시인 손태연.
 <내 칩은 두 개>라는 시집을 펴 낸 시인 손태연.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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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손태연의 시집 <내 칩은 두 개>에 실린 '빨간 팬티만 보면 나는'이라는 시입니다. 조금은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이런 시를 쓰는, 시인 손태연을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쯤 되었나 봅니다. 수인사에서 "나는 밤에 출근하는 여자예요"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패션디스플레이어인 손태연 시인은, 백화점의 영업이 끝난 다음에 디스플레이를 하기 때문이죠.

손태연 시인은 이 시를 중년 남성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직장의 후배들, 위에서 찍어 누르고 있는 상사들, 그리고 날마다 '남들은 출세를 하는데, 너는 왜?'라고 윽박지르는 마누라. 명퇴를 하고 어깨를 처트린 남자들. 세상에 그런 이 시대의 수많은 남자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손태연이라는 시인에 대해서는 전 잘 모릅니다. 그저 모임에서 보았을 뿐이고, 술 몇 잔 함께 마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마이블로그에 올라오는 글과 그림, 그리고 수도 없이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서 제 스스로 조금씩 손가락을 꼽아볼 뿐입니다.

손태연 시인의 시집 <내 칩은 두 개>는 모두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제1부 가시로 짠 시간, 제2부 그가 들고 온 밤, 제3부 고장 난 채널, 제4부 낮은 지붕들입니다. 그런데 시집을 찬찬히 읽다가 보면 착각을 하게 됩니다. 흡사 네 사람의 시인이 글을 쓴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이 시인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오마이블로그에 '안느'라는 닉넴을 쓰는 손태연 시인이 블로그에 남긴 자작광고
▲ 자작광고 오마이블로그에 '안느'라는 닉넴을 쓰는 손태연 시인이 블로그에 남긴 자작광고
ⓒ 하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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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손태연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봅니다. 도대체 얼마나 아픔이 있기에, 혹은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을 느꼈기에, 이런 시가 나올까 하고요. 하지만 이런 느낌을 저 혼자 갖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시집 뒷면에 보이는 김주대 시인의 평을 보면 공감이 됩니다. 괜히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제자 주절거리는 것이 실례인 듯해, 김주대 시인의 평으로 글을 접습니다. 

「그의 시는 아프고 깊다.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읽어야 할 시다. 읽으면 손끝이 아려온다. "여러 날 여러 밤/ 가시로 만든 시간을" 짜고 있는 시인의 밤은 또 얼마나 멀고 캄캄한지. 그의 시는 "몸에서 왈칵왈칵 쏟아"지는 눈물이다. 그러나 삶에 지쳐 쓰러진 약자들을 부여안고 불의를 향해 칼을 든 시들에서는 이 땅의 강인한 어머니를 볼 수도 있으니 그의 눈물은 생명의 뜨거운 태아들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천상 여자이면서 한 사람의 좋은 시인임이 분명하다. - 김주대(시인)」

내 칩은 두 개 손태연 시집
화남의 시집 041
2013년 2월 16일 초판 1쇄 펴냄
값 9000원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기인터넷신문과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손태연, #시인, #시집, #내 칩은 두 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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