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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민우회가 펴낸 <있잖아… 나, 낙태했어>.
 한국여성민우회가 펴낸 <있잖아… 나, 낙태했어>.
ⓒ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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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 대(對) 웨이드' 판결 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인정한 중요한 판결이었지만 40년의 시간동안 그 의미가 상당부분 축소되어, 여전히 많은 여성은 낙태 시술을 받기 어려운 사회적 '낙인'과 마주하고 있다. 40년 전부터 시작된 미국 사회의 논쟁에 비춰볼 때 한국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까?

낙태 고발 정국을 맞이한 2009년 말부터 '낙태논쟁'이 본격화 되었다. 이분법적 프레임은 "그래서 낙태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만을 물으며 그 중심에 위치한 여성의 목소리를 삭제시켰다. 정부는 저출산 '극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임신중절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법적처벌을 말했다. 이를 통해 임신중절을 줄일 수 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수백만 원으로 치솟은 비용과 안전하지 않은 음성적인 수술을 부추겼을 뿐이다.

단순히 중절수술 건수 감소를 여성들이 출산을 선택하는 사회적인 여건이 마련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여전히 아이를 낳기까지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고, 낳은 뒤 기르려면 허리가 휘고, 미혼모에 대한 편견은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낙태'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잊히곤 했다. 임신중절 수술을 한 여성과 의사가 고발당했고,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요청에 의한 '낙태' 시술자를 처벌하는 형법 제 270조 1항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렸다.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고"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볍게 제재한다면 '낙태'가 만연하고 생명경시 풍조가 확산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얼마 전 우린 10대 여성이 낙태 수술을 받던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이라는 신분과 미혼이라는 이유로 임신 사실을 숨겨야만 했고, 홀로 고민하다 위험한 수술을 감행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게 왜 나이도 어리면서 함부로 성관계를 가졌느냐" "낙태를 했으니 죽어도 싸다. 안타까운 건 뱃속에 태아일 뿐" 등의 비판은 얼마나 텅 빈 이야기인가.

중절수술 뒤 여성의 마음은 자신에 대한 비난과 함께 무한한 '죄책감'을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감정으로 뒤엉킨다. 딱히 자랑할 일도 아니며, 심지어 파트너와도 앞으로 그 일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이 일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다. 실제 중절수술을 하지 않더라도 임신에 대한 공포는 이성과의 삽입성교를 하는 여성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 결혼을 하든 말든 간에 말이다.

앞서 언급한 형법 제 270조 1항에 대해 합헌판결에 앞서 진행된 공개변론 자리에서 한 재판관은 낙태에 대해 현행법보다 더 강력한 제한이 있어야 한다는 참고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럼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제가 여성이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였다.

이어서 그는 반복되는 '낙태문제' 토론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토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낙태문제를 현실로 녹아내면 안 된다. 낙태는 교훈 차원의 문제이다. 기본 차원의 문제로 확정한 뒤 현실문제로 봐야한다. 규범 차원의 문제는 하드웨어고 낙태현실 문제는 소프트웨어다. 근데 소프트웨어 가지고 하드웨어를 바꿀 수는 없다. 누가 현실을 더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런 건 제가 보기엔 분명히 규범과 관련할 땐 법원이라 본다."

우리가 느끼게 되는 어떠한 공백. 여성의 인권이 빠져있고,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비어있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바로 위와 같은 말들을 듣게 될 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낙태 고발 정국을 겪어내며 여성단체들 사이에서도 많은 움직임들이 있다는 것이다. "있잖아… 나, 낙태했어"라는 한 여성의 고백 속에 머뭇거림과 용기를 시작으로 사회적인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길 바란다.   상담게시판을 만들거나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 릴레이 글쓰기를 진행하고, 연구 사업을 진행했다. 모자보건법 개정, 형법270조 낙태죄폐지 등 각자의 주장은 달랐지만 그 시작은 같았다. 여성들의 경험은 삭제된 채 도덕적 관념뿐인 현실에 대한 도전하며 삶의 언어로 발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29회 한국여성대회 블로그 중복게재 (http://38women.co.kr)
글을 쓴 정슬아 기자는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활동가입니다.



태그:#여성의날, #한국여성민우회, #낙태, #한국여성대회, #한국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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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창립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를 만들고 여성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연대를 이뤄나가는 전국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로 구성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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