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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사로 향하는 진입로의 소나무들이 모두 V자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송진공출을 위해 소나무를 훼손한 흔적이라고 전해진다.
 봉곡사로 향하는 진입로의 소나무들이 모두 V자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송진공출을 위해 소나무를 훼손한 흔적이라고 전해진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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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는 신라 진성여왕(?~897) 원년인 887년 도선국사(827~898)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천년고찰 '봉곡사'가 있다.

1126년의 역사를 간직한 봉곡사는 도선국사를 비롯해 고려시대 보조국사(1158~1210), 일제시대 만공스님(1871~1946) 등이 큰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머물며 '성호 이익과 실학'을 주제로 열흘에 걸쳐 최고의 학술대회를 개최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 천년고찰의 명성과 달리 탑 하나 온전히 보전되지 못한 채 주지 자암스님과 사무원, 단 둘이 절을 지키고 있다.

최근에는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는 학계와 만공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성지순례를 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 봉곡사에서는 정약용과 만공스님 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문헌과 구전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그들의 행적을 추정 할 뿐이다.

이처럼 천년고찰 봉곡사가 보물 하나 온전히 간직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 한국전쟁 등 전란 때문이다. 특히 봉곡사는 일본과 악연이 깊다. 임진왜란 때는 봉곡사가 폐허로 변해 인조 24년에 고쳐 지었고, 고종 7년 서봉화상이 수리해 지금 형태의 봉곡사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절에 내려오던 각종 보물들은 일제 강점기에 강탈당했고, 사찰로 들어서는 길 입구의 소나무 숲까지 일제 수탈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잿더미...일제강점기 공출위한 수탈흔적

봉곡사 주지 자암스님이 소나무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봉곡사 주지 자암스님이 소나무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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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2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소나무에 어김없이 송진채취 흔적이 선명하다.
 수령 2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소나무에 어김없이 송진채취 흔적이 선명하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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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소나무는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송진이 흘러 굳어졌다.
 몇몇 소나무는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송진이 흘러 굳어졌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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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들은 깊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70여 년의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소나무들은 깊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70여 년의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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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숲길로 불리는 봉곡사 진입로 소나무는 아름다운 만큼 큰 슬픔도 간직하고 있다.
 천년의 숲길로 불리는 봉곡사 진입로 소나무는 아름다운 만큼 큰 슬픔도 간직하고 있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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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사로 향하는 길은 산 입구에서부터 700여 m에 이르는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년의 숲길'로 불린다.

천년의 숲길은 수령 100년 이상 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운치를 더해준다. 그러나 소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V자 형태의 흠집을 낸 흔적이 보인다. 간혹 성인의 몸보다 큰 흠집이 난 나무들도 있다.

일제강점기 송진을 채취한 수탈의 흔적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 연료 대신 쓰려고 채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시가 파악한 바로는 164그루의 소나무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곪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용케 70여 년을 견뎌 왔다. 소나무들은 7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병들거나 심각한 후유증으로 아파하고 있다. 또 태풍이나 폭설로 가지가 꺾이고, 고사한 나무도 적지 않다. 최근 응급처치를 했지만 영양관리와 살균소독 등 체계적인 관리가 지속돼야 하는 상황이다.

겨레·생명의 숲 송림살리기 운동 출범

아산시민들은 올해 처음 봉곡사 소나무의 상처를 살균·소독하고, 보듬어 안는 행사를 가졌다.
 아산시민들은 올해 처음 봉곡사 소나무의 상처를 살균·소독하고, 보듬어 안는 행사를 가졌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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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아산시민 100여 명이 천년의 숲에 모였다. 시민들이 직접 소나무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시민들은 소나무에 직접 자신의 이름표를 붙이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상처 난 곳을 살균·소독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어떤 시민은 상처 난 소나무를 끌어안고 입김을 불어 넣은 뒤 입맞춤을 했다. 어떤 시민은 모진 세월을 이겨낸 소나무를 대견해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상옥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국장은 "육안으로는 소나무 자체의 건강상태를 진단하기는 어렵다"며 "봄에 물이 오를 때 보다 전문적인 진단을 통해 중장기적인 보존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환경련 측은 수일 내에 천년의 숲에 대한 대대적인 생태환경모니터링을 실시할 계획이다. 자생수종과 개체수를 비롯해 동물서식환경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이날 행사는 이명수 국회의원을 비롯해 김응규 아산시의장, 김진구·이기애·전남수 시의원, 봉곡사, 공주마곡사,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광덕산환경교육센터 등이 공동주관했다.

천년고찰 봉곡사

1126년의 역사를 간직한 봉곡사는 일본과의 악연이 가장 크다. 임진왜란때 폐허가 된 절을 다시 복원했지만 일제강점기에 다시 보물을 약탈하고, 천년 숲길을 구성하고 있는 소나무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1126년의 역사를 간직한 봉곡사는 일본과의 악연이 가장 크다. 임진왜란때 폐허가 된 절을 다시 복원했지만 일제강점기에 다시 보물을 약탈하고, 천년 숲길을 구성하고 있는 소나무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 충남시사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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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사는 신라 진성여왕 원년인 88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처음 지은 '모연고찰(募緣古刹)'이라 전해지고 있다. 봉곡사 연혁지에 의하면 고려 의종 4년에 보조국사가 다시 절 이름을 지어 '석암사(石唵寺)'라 했고 조선 정조 18년에 현재의 봉곡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사찰로 들어오는 길 입구가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호젓한 산길을 걷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절을 오르는 주변 정경이 조용하고 아늑해 고즈넉한 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봉곡사 절터 또한 아담해 고요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세상 근심을 잠시 잊게 해준다.

봉곡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부구조는 간략한 닫집 형태이고, 나무는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자연스런 건축미를 느낄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인조 24년에 고쳐 지었으며 고종 7년에 서봉화상이 치료하여 지금의 봉곡사로 보존되고 있다. 고방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이르는데 2층 형태로 되어 있으며 대웅전 옆 80칸의 'ㅁ'자의 요사채 건물 일부를 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충남시사>와 <교차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봉곡사, #아산시, #일제수탈, #천년의 숲,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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