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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8년 2월 24일 낮 12시경. 판문점 241GP 3번 벙커 안에서 육사 출신 장교인 '김훈 중위'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50대 중반이었던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을 제가 처음 만난 때 역시 그 해 5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로 찾아온 아버지는 아들인 김훈 중위가 군 복무 중 사망했는데 자살했다는 국방부 수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그 50대 중반이었던 아버지는 올해 70대를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29살의 청년이었던 저 역시 44살의 중년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15년 세월은 이처럼 길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것은 '세월' 뿐입니다.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에게 있어 지난 15년은 '지독하게 참담한 세월'이었습니다. 그것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저는 그것을 '죽지도, 살지도 못할 고통'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아버지가 보낸 '지난 15년'을 통해 김훈 중위 사건을 되돌아봅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가 된 김훈 중위 의문사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미군 수사관이 현장에서 촬영한 고 김훈 중위의 시신. 좌측 상단 청바지 차림의 미군 수사관 다리가 보이고 김 중위의 양손에는 화약 잔재를 채취하기 위해 봉투가 끼워져 있다. (유족의 양해를 얻어 김 중위의 사진을 공개합니다)
ⓒ 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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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에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로 알려진 판문점 김훈 중위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지난 98년 출범한 '국방부 특별합동 조사단'(특조단) 때문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군 50년 사상 최초로 군대 내에서 발생한 군인 사망 의혹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 기구가 만들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한편 국방부가 이 같은 '특별합동 조사단'을 만들게 된 이면에는 당시 엄청나게 큰 '숨겨진 비밀'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98년 2월, 예비역 3성 장군의 아들이었던 육사 출신 현역 장교가 판문점 GP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혹을 추적하던 중 우리는 판문점 경비대대에서 자행된 '충격적 비밀'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른바 '적과의 내통'이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문제의 경비대대에 근무했던 모 전역 사병이 국회 국방위 비공개 회의에서 행한 폭로였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판문점 경비대대의 부소대장 이하 부대원들이 북한군들과 상습적인 접촉과 함께 심지어 선물을 받는 등 상상할 수 없는 행위가 있었다고 폭로했습니다. 특히 해당 경비대대의 부소대장이었던 김아무개 중사는 이 같은 접촉을 넘어 북한군의 판문점 초소로 가서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오는 등 초유의 군기 문란 행위가 벌어졌음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나라 전체가 큰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인을 두고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던 문제의 김훈 중위가 바로 이 충격적인 군기 문란 행위가 벌어진 '문제의 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의문사한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폭발한 화산처럼 의혹이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김훈 중위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의혹이 제기된다"며 우리가 그토록 호소해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언론이 이번에는 역으로 "무엇이든 좋으니 아무 정보라도 달라"며 천주교 인권위를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아침, 저녁으로 번갈아가며 상주하다시피 기자들이 진을 치면서 이 사건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국방부'였습니다. 새로운 의혹이 매일같이 쏟아지자 결국 국방부는 건군 사상 최초로 군대 내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는 '판문점 김훈 중위 의혹 규명을 위한 특별합동 조사단'을 구성하게 됩니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저는 이 사건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질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만 15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김훈 중위의 사인 진상규명을 외치며 싸우게 될 줄 몰랐다는 뜻입니다. 특조단 수사를 통해 모든 진실이 마침내 밝혀지게 되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진실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국방부 특조단이 이 분명한 의혹에 대해 아주 간단히 진실을 확인해 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습니다. 이 명백한 의혹을 그들이 굳이 외면할 이유 역시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시 특조단 단장은 김척 예비역 중장의 육사 출신 2년 후배였는데 그는 유족과 우리 앞에서 이 사건의 과거 수사결과에 대해 강하게 질타하면서 "그 잘못을 틀림없이 바로잡을 것"이라며 먼저 나서서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조단장의 입장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김훈 중위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위협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뒷조사'를 언급했고 소송을 조심하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김훈 중위의 사인 보다 그 아버지 김척 예비역 장군의 과거 군 복무 시절 잘못을 먼저 뒤졌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특조단의 '민간측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저로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특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김훈 중위 사건의 진실 왜곡이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15년의 고통을 잉태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제대로 이 의혹이 '있는 그대로' 규명되었다며 사후 15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김훈 중위가 벽제의 군 부대 영현실 창고에서 유골함 형태로 방치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98년 '국방부 특조단'이 '조작'한 사건의 진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방부는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라고 주장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족을 비롯하여 김훈 중위 의문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이들은 이 같은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적 진실 왜곡'이라고 반박합니다. 사실 김훈 중위 사건에 있어 자살-타살 논쟁을 살펴보면 너무나 많은 쟁점이 있습니다. 이를 아무리 간결하게 정리한다 해도 10가지가 넘는 유형의 쟁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방부의 말처럼 김훈 중위가 자살을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자살적 정황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유서가 발견된다든지 아니면 김훈 중위가 자살할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이런 근거는 전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지적하자 특조단은 당시 김훈 중위와 함께 근무했던 김 아무개 일병의 진술을 제시하며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특조단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사건 발생 당일 새벽 6시 10분경, 김훈 중위가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당시 김아무개 일병이 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특조단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특조단이 주장하는 그 시각은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시각이었는데 안보상 조명시설을 사용하지 않는 깜깜한 GP에서 뛰어가던 김 일병이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글썽이던 수준의 김훈 중위의 눈물을 봤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특조단은 이 같은 김 일병의 진술을 근거로 "이것이 김훈 중위가 자살한 정황"이라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지난 15년간 그 아버지와 우리가 싸우고 또 싸워서 밝혀낸 진실은 어쩌면 '한심할 정도로 상식적인 진실'입니다. 조명시설도 없는 매우 깜깜한 상태에서 눈물을 봤다는 특조단의 주장을 당사자인 김아무개 일병이 부인한 것입니다. 바로 2006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당시 군 의문사위가 확보한 김 일병의 진술 전문입니다.

조사관 : "새벽시간에 뛰어가면서 김훈 중위의 옆모습만을 보고서도 어떻게 눈물을 보았나."
김 일병 :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었고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특조단이 김훈 중위의 자살 근거로 삼았던 근거 중에서 결국 그것이 사실과 다르게 확인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15년간 김훈 중위 사건은 모두 4곳의 국가 기관으로부터 사건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국회'와 '대법원' 그리고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국민 권익위원회'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4개의 국가 기관은 김훈 중위 사망 의혹 사건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그들 역시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고 판단했을까요.

4곳의 국가 기관이 말하는 김훈 중위의 진실 '자살 아냐'

고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이 '뇌관 화약 잔사 확인 시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척 장군 고 김훈 중위의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이 '뇌관 화약 잔사 확인 시험'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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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들 4개 국가 기관의 입장은 동일했습니다. 적어도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고 판단할 수 없다'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처럼 사망 원인을 알 수 없도록 한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군 헌병대 수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지난 2012년에 이뤄진 '국민 권익위원회'의 조사 결론은 김훈 중위가 자살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의미 있는 결론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권총 화약흔 실험'이었습니다.

김훈 중위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혹은 김훈 중위 '오른손'에 얽힌 화약흔 논란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김훈 중위가 국방부의 주장처럼 스스로 권총을 발사하여 자살했다면 방아쇠를 당긴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안티몬과 바륨' 등 화약흔 성분이 검출되었어야 합니다. 권총 사망 사건이 빈번한 미국 역시 수사관이 현장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사망자의 손을 면봉으로 닦아 이 화약흔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된 자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당사자로 지목합니다.

그렇다면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국방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훈 중위 오른손에서 문제의 '화약흔'이 검출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일까요.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는 일체의 화약흔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김훈 중위가 스스로 권총을 발사하여 자살했다는 국방부 주장이 맞으려면 그의 오른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어야 하는데 이 같은 화약흔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국방부는 다시 말을 바꾸었습니다. "화약흔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이러한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권총 사망사건을 1천여 건 이상 부검한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는 '비열한 꼼수'라며 비판했습니다. 국방부의 주장은 이른바 '작은 권총'과 '큰 권총'을 구분하지 않은 채 '섞어 놓은' 통계를 악용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즉, '작은 권총'과 탄창이 돌아가는 '피스톨 권총'의 경우 화약 량이 적어 반드시 화약흔이 검출되지 않을 수 있으나 김훈 중위가 사망 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베레타-9' 권총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권총이라서 격발시 반드시 화약흔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큰 권총과 작은 권총을 혼합해서 통계를 내 놓고 나올 수도, 안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민 권익위는 이 논란에 주목했습니다. 정말 베레타-9 권총을 격발할 경우 발사자의 오른손에 화약흔이 남게 되는지 여부만 확인된다면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발사자의 오른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된다면 이는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지 않은 김훈 중위가 아니라 제3의 인물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후 권익위는 국방부에 이 같은 '권총 발사 화약흔 실험'을 제안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실험 과정을 국방부가 주도하도록 전부 위임했습니다. 차후 국방부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여 그 결과에 불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3월 어느 날, 마침내 김훈 중위 사건의 진실을 밝혀줄 권총 발사 실험일이 다가 왔습니다. 그야말로 '김훈 중위 자, 타살 논쟁'의 분수령이 될 역사적인 실험이었고  모두가 긴장과 초조 속에 맞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사고 현장이었던 판문점 241GP 3번 벙커를 그대로 재현한 김포의 모 특전여단 사격장에서 모두 10명의 사수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탕탕' 말 그대로 '피가 마를 정도로' 긴장된 그때였습니다. 

10인의 사수가 밝혀낸 김훈 중위 '오른손'의 진실. 그러나...

2012년 6월. 마침내 14년을 끌고 왔던 김훈 중위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진실은 또 다시 '상식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날 사수로 참여했던 열 명의 오른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된 것입니다. 그동안 제기되었던 유족의 주장이 모두 사실 이었음이 재차 확인된 것입니다. 환호했습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기쁨이었고 처절하도록 슬픈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누구도 이것이 기쁠 일이냐며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 잔인하고도 비참한 '아버지의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우리는 순진했습니다. 우려했지만 설마 했던 국방부가 재차 자신들이 주도하여 내려진 결론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내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국방부는 총기 발사자의 손에서 모두 '화약흔이 검출'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1명의 우측 손등에서 검출된 화약흔의 양이 적어 "이른바 미군 기준에 맞지 않다"며 "이를 화약흔 검출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보다 정확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며 따라서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는 기존의 본질에는 변한 것이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같은 국방부의 주장을 접한 우리의 심경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발사자 10명의 좌우 손바닥과 손등을 합치면 모두 40개입니다. 그런데 그 39개에서 다량의 화약흔이 검출되고 다만 1개의 손등에서 미군이 임의로 정한 검출 기준보다 미달하는 화약흔이 나왔다 하여 이 모두를 의미 없는 결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야비한 주장'입니다. 정말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미군 기준에 미달하는 검출 기준이라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국방부가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며 제기한 발사자 1명의 우측 손등에서 검출된 화약흔은 정확히 말해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미 검출'이 아닙니다. 다만 검출된 화약흔이 '미군이 임의로 정한'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훈 중위는 위 사례와 '완전히 다른' 경우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김훈 중위의 오른손은 화약흔이 전혀 검출되지 않은, 말 그대로 '깨끗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즉, 김훈 중위의 오른손에서는 미량이니 뭐니 하는 무엇이 아니라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은 깨끗한 손'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김훈 중위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사실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방부는 이 사실을 왜곡하여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2년 8월 26일. 국가 기관인 국민 권익위원회는 이 같은 조사 결론에 대해 내부 논의를 거쳐 결국 다음과 같이 내용으로 육군 참모총장에게 김훈 중위 사건을 처리할 것을 권고합니다.

"피신청인에게(육군 참모총장에게) 군 수사기관의 초동수사 과실 등으로 인해 사망 원인이 불분명하게 된 신청인의 子, 故 김훈의 순직 여부에 대해 재 심의하여 순직으로 인정할 것을 시정 권고한다."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고? 국방부에게 묻는다, "왜"

행복했던 김훈 중위 가족. 1998년 2월 24일, 그날 이후 이 가정의 행복한 일상은 사라졌다.
▲ 김훈 중위 가족의 일상 행복했던 김훈 중위 가족. 1998년 2월 24일, 그날 이후 이 가정의 행복한 일상은 사라졌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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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방부는 그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국민 권익위가 국방부의 초동수사 잘못 등으로 인해 사망 원인을 알 수 없게 된 김훈 중위를 순직 처리하도록 권고했으나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김훈 중위는 순직 처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참담한 사실은 국방부가 이 같은 국민 권익위의 권고를 재차 뒤집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 감사 당시 국방위원회 소속 민주당 진성준 의원이 국방부 조사본부로부터 제출받은 '육군 중위 김훈 사망 건 재조사 추진경과'에 따르면 국방부는 김훈 중위에 대해  또 다시 '우울증' 혹은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자로 만들기 위해 재조사를 하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습니다.

국방부의 '김훈 중위 사건 잔혹사'는 여전히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이 한 맺힌 억울함을 풀 수 있을까요. 4개의 국가 기관이 김훈 중위의 자살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오직 국방부만 이를 우기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그동안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주장해 온 말이 사실과 다르게 확인되면 이렇게 저렇게 말을 바꿔 왔습니다.

그럼에도 약자인 유족과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죽기 살기'로 반론 근거를 모으고 입증 자료를 찾아 제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확인하면 그 다음은 어찌 될까요. 정말 기가 막힐 뿐입니다. 국방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또 말을 바꿔 진실을 호도합니다.

그렇게 싸워온 세월이 바로 지난 15년입니다. 이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이 겪은 수모는 정말이지 필설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말합니다. 이제는 내 아들 김훈 중위 때문에 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우리 아들이 사랑했던 군과 국방부가 이렇게 썩고 부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나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싸움을 내가 이기지 못하면 제2, 제3의 또다른 김훈 중위와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며 결코 이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며 아버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지난 2008년부터 2012년 6월까지 군대에서 자살한 것으로 '처리'된 이들은 총 368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한해 평균 80여명이 죽어간 것이며 이는 통상 4일에 한명씩 자살로 처리되고 있는 것입니다. 4일이 지나면 한명, 또 4일이 지나면 한명.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의 자살 이유는 대부분 '군 복무 염증에 의한 자살'로 처리됩니다. 군 부대 내의 문제가 아니라 나약한 개인의 문제로 처리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자살한 것일까요. 그것이 진실일까요.

지난 15년간 김척 예비역 중장과 함께 제가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온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김훈 중위 사건은 이미 대한민국 군 의문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벌어진 98년을 기점으로 군대에서 죽으면 '개 죽음'으로 치부되던 군대 사망 사건이 이른바 '군 의문사'라는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군인의 생명이 아무렇게나 치부되던 그 야만적인 관행에 브레이크가 걸렸다고 평가합니다.

앞으로 또다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하며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김척 예비역중장께 늘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우리가 이 싸움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싸워 이 싸움의 끝이 무엇인지 확인하자구요. 저는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포기하지 않고, 제가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그러다가 만약 어느 날 아버지가 끝내 이 세상을 먼저 떠난다 해도 젊은 제가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제가 잊지 않고 김훈 중위를 비롯하여 군에서 죽어간 모든 사병들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국방부는 오늘도 "김훈 중위가 자살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리라고 예상됩니다. 그러면 저는 물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15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15년의 세월이 지나고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국방부에게 '단호하게' 물을 것입니다. "왜?"

잊지 말아 주십시오. 김훈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젊은 청년 장교 '김훈 중위'의 슬픈 15주기를 추모합니다.

덧붙이는 글 | 고상만 기자는 판문점 김훈 중위 사건의 진실을 담은 책, <그날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책으로 여는 세상 펴냄)의 저자입니다.



태그:#김훈 중위, #김척 예비역 중장, #군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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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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