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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떡값 검사' 실명 공개로 기소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가 지난 14일 기자회견을 열어 "8년 전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밝히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른바 '떡값 검사' 실명 공개로 기소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가 지난 14일 기자회견을 열어 "8년 전 그 순간이 다시 온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밝히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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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질문 "그럼 누가 더 나쁜 거야?"

"아빠, 떡값이 뭐야?" 아침 신문을 읽던 아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의원이 지난 14일, 대법원의 유죄 판결로 의원직을 잃었다는 기사를 읽은 모양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만화책만 읽으려들더니 요즘 한창 '줄글'에 맛을 들여 꽤 어려울 텐데도 신문도 곧잘 챙겨보곤 한다. 불과 초등학교 5학년생이 '떡값'의 속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름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려니 이게 만만한 게 아니다. '부당한 이득을 바라고 상대방에게 건네는 돈'을 빗댄 말이라고 설명하며, 그것을 주고받는 건 아주 나쁜 짓이라고 덧붙였다. "그럼 독수독과는?" "독이 든 나무에는 독이 든 과일이 열린다는 뜻인데, 수단이 올바르지 않으면 결과도 인정할 수 없다는 걸 비유한 표현이야."

마치 낱말 퀴즈에 답변하듯 일일이 설명해주었더니, 그제야 기사의 요지가 파악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누가 더 나쁜 거야?" 떡값을 주고받은 삼성그룹 임원과 검사들과 불법 도청으로 알게 된 사실을 인터넷에 공개한 노회찬 의원 중 누가 더 큰 벌을 받아야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둘 다 잘못이니 모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두루뭉수리 답했더니, 다짜고짜 '아빠가 재판관이라면 둘 중 누구에게 더 큰 벌을 주겠느냐'고 채근했다. 차마 아이 앞에서 답변을 회피한 채 우물쭈물하면 '찌질하게' 보일까 싶어 이렇게 답했다. "아빠는 떡값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더 큰 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우리나라 최고의 재판관들이 모인 대법원에서는 정반대로 판결을 했어. 적어도 법적으로 보면 그런가봐."

"나도 아빠랑 생각이 같아. 떡값은 자기들 이익을 위해 주고받은 거지만, 인터넷에 사실을 공개한 건 그 의원 혼자 덕 보려고 한 건 아니잖아. 아빠 말대로, '아주 나쁜 짓'을 인터넷으로 두루 알린 건데, 그럼 재판관들의 생각은 그 의원이 알고도 모른 체 했어야 한다는 거네. 법적으로는 옳다면, 그 법 참 이상하네."

"대통령도 함부로 못하는 데 한낱 국회의원이..."

아빠이기에 앞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초등학생 어린애에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코흘리개 아이조차 납득이 안 된다는 건데, 대법관들은 정작 자신들의 판결이 상식에 반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덜 나쁜'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하자, 아이는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가재는 게 편'이라고 말했다.

차마 아이 앞에서 대법원 재판관들을 두둔할지언정 우리 사회 정의의 '최후의 보루'라는 그들을 대놓고 욕할 수는 없었다. 자칫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볼까 두려운 까닭이다. 마치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학부모가 아이 앞에서 담임교사를 나무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간신히 '힘들었던' 아침을 보내고 출근했다.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아이와 아침에 나눴던 대화에 대해서 얘기했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선생님 아이가 아직 어려서 그래요. 중학교 졸업하고 저희들처럼 고등학생쯤 되면 저절로 철들게 될 거에요."

아이들은 서로 맞장구치며 거침없는 답변을 쏟아냈다.

"선생님, 그 의원의 가장 큰 죄가 뭔 줄 아세요? 감히 삼성에 맞섰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대놓고 삼성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대통령도 함부로 못하는 데 한낱 국회의원 한 사람이 상대할 수 있겠어요? 어림도 없는 일이죠."

"외국인들이 '코리아'는 몰라도 삼성은 다 안다고 하잖아요. 이미 삼성은 좋건 싫건 우리 국민들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 영역'이 됐어요. 선생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걸요. 북한 정권 세습은 봉건왕조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며 희화화하고, 교회의 목사 세습도 반종교적인 작태라며 욕해도, 삼성의 오너 세습을 두고 그렇게 발끈하진 않잖아요."

"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전통'을 당분간 그대로 유지시킨 역사적(?) 판결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며 '항복 선언'을 했잖아요. 그땐 어려서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야 어렴풋이 알 듯해요. 바로 '돈'이 법도, 정의도, 사람의 생명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는 심각한 경고를 보낸 거라고요."

14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의 국회 본회의장 의원석.
 14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의 국회 본회의장 의원석.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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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고등학생들, 낯 뜨거운 교사

과연 고등학생들의 해석은 분명했고, 지적은 날카로웠다. 교사로서 낯 뜨겁게 고백하건대,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학교 또한 삼성이 지배하는 현실에 순응하고 발 빠르게 대처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서열화 된 학벌구조를 욕하지만, 정작 제자들 서울대 못 보내 안달하는 곳이 학교인 것처럼.

아무리 삼성을 욕하고 불매운동을 벌이면 뭐하나. 누구 한 명이라도 삼성에 취직이라도 할라치면, 삼성이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학교가 알아서 교문에 경축 현수막을 내거는 게 현실이니. 그런 환경에서 자란 일부 아이들은 삼성이라는 이름에서 애국심이 느껴지기까지 한단다. 해외여행 중 삼성 광고판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영국 축구클럽 첼시 팀을 응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그야말로 '삼성 키즈'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총명한 아이들 대부분이 '삼성이 부도덕한 기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만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일개 기업을 탓하기보다 성숙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구조에 큰 책임이 있다며 삼성을 두둔하는 아이도 있고, 심지어 현실과 이상을 구분해야 한다면서, 지금 당장 삼성과 맞서 싸우는 건 몽상가나 할 짓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돈이 막강한 검찰 권력까지 쥐고 흔드는 판에, '독야청청'하겠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거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불법적으로 도청을 시도한 사람이나, 그 사실을 인터넷에 올린 의원이나 현실을 무시한 '돈키호테'라며 조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수한 우리 아이들이 이렇듯 닳을 대로 닳아버렸다. 대법원은 이런 현실을 과연 알기나 할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겠어"


퇴근하는 길, 착잡한 마음에 소주나 한 잔 할 요량으로 선술집에 들렀다. 그곳에선 불콰해진 얼굴의 중년 신사들 서너 명이 청문회를 앞둔 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의 면면을 안주 삼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의혹에다 자녀들의 병역 기피에 이르기까지 고위공직자가 되기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도덕적 결함들이 한창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듣자니까 되레 그들을 두둔하는 듯한 얘기들이 더 많았다.

"저 나이 되도록 티끌 없이 살기는 쉽진 않았을 거야. 아쉽긴 해도, 이제 그만하고 통과시켜줬으면 싶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겠어."
"괜히 새 정부 출범하는 데 발목잡기라며 역풍이 불까 싶어. 좋은 약도 지나치면 해가 되듯이 사람들에게 몽니부리는 것처럼 비쳐 좋을 것 없잖아."
"아무렴 MB 정권의 고위공직자들만 하겠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나마 양반들이지, 뭘."

청문회에 나오는 후보자들마다 예외 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인 까닭에 익숙해진 탓일까. 이제는 그들의 웬만한 결함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무덤덤해질 지경이 되었다. 기성세대는 물론,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도덕 기준마저도 시나브로 허물어뜨린 것이다. 말하자면, MB의 당선 이후 흐트러진 우리 사회의 도덕 기준이 차기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기대치를 더욱 낮춰버렸다고나 할까.

노회찬 의원이 의원직을 잃은 것에 대해서, 또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 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솔직히 별 관심이 없다.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초등학생 아이를 둔 아빠로서 상식에 반하는 이번 판결이 미래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법과 정의에 대해 비뚤어진 의식을 갖게 만들까봐, 단지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초등학생 아이가 내게 던진 마지막 질문을 대법원 재판관들에게 그대로 던지고 싶다. "누가 더 나쁜 거야?" 초등학생 아이의 상식조차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을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태그:#노회찬 의원, #떡값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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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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