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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법은 없다
▲ 당신을 위한 법은 없다 당신을 위한 법은 없다
탕탕탕.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고3 여름. 친구를 따라간 법원에서 나는 처음 이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감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재판의 시작. 엄숙한 분위기에 판사가 들어서고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하고 앉는다. 피고와 원고 그리고 그들을 변호해주는 검사와 변호사,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과 증거자료, 이어지는 증인들의 진술까지...TV에서만 보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극적인 재판을 보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끊임없는 변론과 반박이 이어지고, 드디어 유무죄를 결정하는 판사의 판결이 세 번의 망치소리와 함께 울려퍼졌다.

그 날, 내가 처음 본 법정의 모습은 한마디로 '살아있는 정의'였다. 판사의 눈은 냉철함과 공정함의 눈이며, 그 뿌리는 정의를 이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법은 내 편에 서있었으며, 내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힘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고, 법에 대한 내 신뢰는 점차 깨져갔다. 허위사실유포죄로 구속된 미네르바 사건, 어린아이에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조두순에게 적용된 12년이라는 너무나도 가벼운 형량, 검찰의 비리와 성추행 사건에서부터 재벌을 위한  특별사면, 최근 논란이 된 국회의원연금법과 택시법의 날치기 통과까지...

대체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서 대체 법은 그리고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박영규·류여해가 쓴 <당신을 위한 법은 없다>는 대한민국에서 왜 악법이 탄생하는지부터 법의 유통 권력자들의 힘겨루기, 그리고 대중이 법에 무관심할 때 일어나는 비극까지 구체적인 경험과 사례를 통해 대한민국 입법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 고발한다.

독일의 법과 대한민국의 법

"독일의 입법 과정을 살펴보면서 나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왜,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는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문장 한 줄, 단어 하나에도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놓고 있었다. 왜 이 법률을 만드는지, 법률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정치인, 정부 관계자, 관련 기관의 담당자가 누구인지,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누가 어떤 의도에서 이런 발언을 했고 이런 단어를 썼는지, 그 단어가 지니는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입법안이 어떻게 진행되고 발의되었으며 공포되었는지의 과정이 한 권의 자료집으로 묶여 있었다." (p.21)

우리나라의 법은 일본의 것을 가져왔고, 일본의 법은 독일의 법을 빌렸다. 때문에 우리의 법은 독일의 법과 닮아있다. 그러나 법이 제정되는 과정은 독일과 전혀 딴 판이다. 독일은 육하원칙에 따른 철저한 과정을 거쳐 법이 제정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법은 다른 나라의 법을 짜깁기하고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급하게 국회를 통과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은 철저한 검증과 조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법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알 수 없고, 만약 잘못된 법이라도 소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악법의 탄생

"법에는 양심과 도덕이 없다. 법의 양심과 도덕은 그 법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좌우된다."
국(p.30)

이 책의 저자는 독일에서 돌아와 대한민국 국회 법제실에서 2년 간 일하면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그가 일한 법제실은 국회와 정부가 발의하고 제출한 법률안이 보편성과 형평성을 지키고 있는지, 법안의 타당성을 심의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들은 매의 눈으로 법안을 심의하는 대신, 오후 늦게 일을 시작해 졸린 눈으로 컴퓨터를 붙잡고 있거나 게임이나 인터넷 쇼핑을 즐긴다. 일부 공무원들은 야근을 하지도 않으면서 동료에게 부탁해 출퇴근 체크를 하고 초과 근무수당까지 챙긴다. 저자는 "'대충대충', '의원실 입맛에 맞게', '기한은 칼같이 엄수', 이 3가지가 법제실의 룰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법제실의 심의를 거치는 법률안 그 자체에 있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하는 법률안 가운데 30%이상이 과거에 발의하였다가 폐기된 법률안의 재활용이라고 한다. 그 법안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현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것들이지만 자신의 실적을 높이기 위해서 발의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법안들이 법제실의 룰에 의해 '대충대충, 의원들의 입맛에 맞게, 기한은 칼같이 엄수'하며 처리되는 것이다.

법의 유통 권력자들 그리고 힘겨루기

"우리가 무관심할 때, 법은 강자의 편에 선다."
(p.104)

법을 행하는 대한민국에서 법은 강자의 편에 선다. 그리고 법을 차지하기 위해 권력자들의 힘겨루기가 계속 되고 있다. 저자는 2012년 4월에 일어난 '수원 여성 납치 사건'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당시 위치추적에 관한 법률을 놓고 검찰과 경찰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범죄에 재빠른 대처를 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끔찍한 범죄가 벌어진 것이다. 검찰과 경찰의 밥그릇 싸움은 무고한 희생자를 계속 만들었고 도대체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만들었다.

또한 재벌들의 권력형 비리와 금융범죄에 유난히 관대한 대한민국의 법. 그들에게만은 낮은 형량은 물론이고 면책 특권을 남발하는 사법부의 태도는 법이 강자의 편에 서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준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법의 원칙이 산산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법의 현실이다.

대중의 무관심과 비극

"법치국가에서는 악법도 법이 된다."
(p.192)

법치국가에서는 잘못된 법이라도 국민은 그 법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법은 일단 한 번 제정이 되면 그 법을 다시 고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저자는 잘못된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미리 감시하고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법을 알아야 하며, 법이 국민의 편에 설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감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뿌리가 견고하지 않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열매를 맺기도 전에 비와 바람에 꺾이고 쓰러져 버릴 테니까.
마찬가지로 재판의 뿌리인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정당성을 잃은 우리의 법은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 확고한 기준도 정의도 없는 법이 권력자들의 강한 힘과 입김 앞에서 맥없이 휘둘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테니까.

탕탕탕.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귓가에 울리는 망치소리가 무섭다.
양심이 없는 법의 탄생을 막기 위해, 악법에 의한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을 위한 법은 없다 - 범죄 유발성 형법과 법의 유통 권력자들

박영규 외 지음, 꿈결(2012)


태그:#법, #정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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