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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균형 잡힌, 그리고 일처리도 매끄러운

벤구리온 공항 입국장 가는 길
 벤구리온 공항 입국장 가는 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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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첫 인상은 상당히 좋다. 그것은 벤구리온 공항 때문이다. 우선 공항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그러나 입국장 풍경이 아주 깔끔하고 인상적이다. 대리석 벽에 이스라엘 관광명소의 사진이 걸려 있고, 입구를 로마시대 채색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그리고 벤구리온 공항이 이스라엘의 자존심이라고 썼다. 안으로 들어가자 'Welcome to Israel'이라는 문구가 우릴 반긴다.

입국장에서 우리는 입국심사를 받는다. 입국심사대를 처음에는 두 개만 열더니 사람들이 많아지자 금방 두 개를 더 연다. 그러자 입국심사 속도가 빨라지고 10여 분 만에 내 차례가 된다. 직원이 어떤 의도로 입국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여행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며칠 동안 있을 거냐고 묻는다. 나는 5일 동안이라고 대답한다. 이번에는 또 다시 묵을 호텔을 물어본다. 나는 자료를 보고 블루 베이 호텔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입국심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현지가이드인 이철규씨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중형버스를 타고 텔아비브 공항을 지나 느타니아(Netanya)에 있는 호텔로 향한다. 느타니아는 지중해변의 도시로 텔아비브를 지난 다음, 2번 고속도로를 타고 한 30분쯤 가야 나온다. 호텔에 도착했으나 어두워 바다를 볼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바다로 나가 보았다. 모래톱이 좀 있고, 바위가 약간 보였다. 파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공기가 비교적 차다. 기온도 10℃ 정도다. 우리의 늦가을을 상상하면 된다.

10분짜리 동영상을 통해 본 카이사리아의 역사

헤롯극장
 헤롯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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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 후 우리 일행은 다시 2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 카이사리아(Caesarea)로 향한다. 그곳에 있는 고고학 유물을 보기 위해서다. 카이사리아에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시대 문화유산부터 13세기 십자군 시대 문화유산까지 다양한 유물이 남아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카이사리아 국립공원이라 부른다. 우리 탐사팀은 헤롯극장(Herod's Theater)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간다.

문화유산을 답사하기 전에 먼저 카이사리아의 역사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본다. 카이사리아는 로마시대 가장 번창한 도시다. 그것은 기원전 37년 헤롯(통치기간: B.C. 37-4)이 로마 원로원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전 22년경 해안에 항구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12년 걸려 도시를 완성했다.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 신전, 극장, 원형경기장, 시장, 공공건물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 Augustus)를 기려 도시 이름을 카이사리아라고 불렀다.

원형경기장
 원형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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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아는 항구도시로의 입지에 행정과 경제 기능이 더해져 급속히 발전했고, 기원전 8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지방정부의 수도가 되었다. 당시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모두 망해 없어졌고, 로마는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렀다. 이곳 극장과 원형경기장에서는 수시로 연극 공연과 마차경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5년마다 카이사리아에서 스포츠 경기와 검투사들의 대결이 열렸다고 한다.
    
카이사리아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통치기간 306-337)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는 324년부터 비잔틴 제국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카이사리아는 비잔틴시대 그 영역을 더 확장하였고, 6세기 말경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축조되었다. 그를 통해 카이사리아가 지중해변의 가장 견고한 요새도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640년 이 지역에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되면서 정치·경제적인 기능을 잃어갔다. 많은 시민들이 도시를 떠났고, 이후 지방의 작은 도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파괴되어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으로 변한 보스니아 모스크
 파괴되어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으로 변한 보스니아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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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아가 다시 각광을 받은 것은 십자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 1101년이다. 이후 카이사리아는 십자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1251년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의해 요새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현재 남아있는 십자군 요새의 흔적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265년 이집트 지역을 다스리던 술탄 바이바스(Baybars)에 의해 카이사리아가 정복되면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카이사리아는 더 이상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하고 19세기까지 폐허로 남아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은 보스니아 난민들을 이곳에 이주시켰고, 파괴된 십자군 시대의 유적을 복원하였다. 그를 통해 카이사리아는 어촌으로,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보스니아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음을 증명하는 유적으로 보스니아 모스크가 있다. 이것은 붉은색 지붕을 한 석조건물이고, 그 중 원통형 미나렛이 가장 눈에 띈다. 이곳은 1992년부터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이 지역을 지나면서 그곳 레스토랑에 들러 아라비카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카이사리아

항구도시 카이사리아
 항구도시 카이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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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에게 카이사리아는 사도들이 활동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사도들이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카이사리아에 들른다. 그 중 필립보(Philippus)가 아스돗을 거쳐 카이사리아에 이른다(사도행전 8장 40절).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군대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주는 곳도 카이사리아다(사도행전 10장 1-48절). 코르넬리우스는 경건한 사람으로 하느님을 공경하고 유다인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개종한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을 피해 타르수스로 피신한 곳도 카이사리아다. 그는 이후 선교여행을 하면서 여러 번 카이사리아에 들렀다. 바오로는 두 번째 세 번째 선교여행에서 에페소스에서 배를 타고 티로와 프톨레마이스를 거쳐 카이사리아로 온다. 카이사리아에서 바오로는 전도자 필립보의 집에서 머물렀다.

사도 필립보
 사도 필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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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또한 이스라엘 지역에서 설교를 하다 잡혀 펠릭스 총독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카이사리아로 보내진다. 그리고 카이사리아에서 선고를 기다라며 2년간 감옥생활을 한다. 2년 후 후임총독 보르기오 페스토가 부임했고, 다시 법정을 열어 바오로를 심문한다. 바오로는 페스토의 심문에 맞서 카이사르(황제)에게 상소한다. 그러자 아그리파왕이 카이사리아에 와서 바오로를 직접 심문한다. 결국 바오로는 황제의 심문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난다(사도행전 23-26장). 이처럼 카이사리아는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떠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로마시대 극장 이야기

본시오 빌라도가 새겨진 명문
 본시오 빌라도가 새겨진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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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로마시대 극장부터 하나하나 살펴본다. 이 극장은 기원전 카이사리아가 건설될 때 생겼으니 그 역사가 2000년이 넘는다. 2층 구조에 6개 영역으로 나눠져 있으며, 4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반원형의 오케스트라 부분은 대리석을 깔았으며, 그 뒤로 한 단 위에 무대가 있다. 무대 뒤로는 3층의 건물이 있어 분장실, 연습실, 휴게실 등으로 쓰였다. 그러나 이들 건물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객석에서 오히려 지중해 쪽을 시원하게 내다볼 수 있다.

이 극장은 로마시대까지는 제 기능을 했으나, 비잔틴 말기 주변으로 성벽을 쌓으면서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더욱이 이슬람 정복 이후에는 거의 폐허로 버려졌다. 1873년에서야 고고학적인 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굴은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이탈리아 탐사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극장, 성곽, 수도교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조사가 실행되었다. 그때 이스라엘 탐사단은 십자군 도시 지역과 유대인 거주지역을 집중적으로 발굴했다.

그 결과 극장, 원형극장, 십자군 도시지역이 카이사리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92년 이후 하이파대학교 고고학팀에 의해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극장 옆 해안 쪽으로 나 있는 궁터에 대한 발굴에서 Tiberieum/ Pontius Pilatus라는 명문이 있는 돌판이 발견되었다. 본시오 빌라도는 헤롯왕이 죽은 후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으로 기원후 26년까지 이곳 유다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길이 250m, 폭 50m의 마차 경기장

철제 마차상
 철제 마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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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터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히포드롬으로 불리는 마차경주장이 나온다. 이곳은 헤롯의 원형극장으로도 불린다. 그것은 검투사들의 경기장으로 쓰이기도 하고 마차경주장으로 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으로 말하면 종합운동장(Sports Complex) 또는 경기장이 된다. 이곳에는 길이 250m, 폭 50m의 트랙이 있고, 긴 트랙 밖으로 12줄의 객석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객석의 동쪽 끝에는 두 줄의 석주로 이루어진 귀빈석이 있었다고 한다. 이 경기장이 수용할 수 있는 관중은 약 만 명 정도 되었다.

경기장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말과 마차 모형의 철제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잠시 이것에 올라 타 옛날 전사들의 모습을 재현해 본다. 가까운 곳에 경기장의 옛 모습을 담은 안내판이 있다. 그곳에는 출입구부터 출발지점까지 열두 군데 중요 부분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원형경기장의 밖을 감싸고 있던 벽과 문의 흔적도 여럿 남아 있다. 이 경기장 앞 서쪽으로는 지중해 바다가 가까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바닷가에는 모래톱이 있어 여름에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천연의 방파제가 없어 아쉬운 점은 있지만, 카이사리아는 한때 지중해로 나가는 항구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새화된 고대와 중세도시 유적

중세도시의 해자와 성벽
 중세도시의 해자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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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요새화된 고대 로마와 비잔틴 그리고 중세 십자군 도시 유적이 펼쳐진다. 길이 동서와 남북으로 길게 나 있는데, 남북 방향으로의 길이 길고, 중간 중간 석주들도 보인다. 길은 돌로 바닥을 깔았고, 길 주변의 건물 바닥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도 그려져 있다. 모자이크는 글씨와 문양 두 가지다. 글씨는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는데, 대부분 성경 구절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13장 3절에 나오는 '권위에 대한 복종' 내용이 눈에 띈다.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세요. 그러면 그에게 칭찬받을 겁니다."

문양이 들어간 모자이크가 더 아름다운데, 마치 카펫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동식물 문양도 여럿 보인다. 새로는 참새와 까마귀가 보이고, 짐승으로는 양과 염소가 보인다. 거기에 꽃과 풀도 있는데 그 이름을 알기는 쉽지 않다. 이들 로마와 비잔틴 시대 유적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가면 중세 십자군시대 만든 9m 깊이의 성곽 해자를 만나게 된다. 이 해자를 돌아 성곽으로 들어가면 높이 14m, 길이 900m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중세도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참새 모자이크
 참새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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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모자이크
 염소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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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바다를 제외한 동남북 방향에 세 개의 대문이 있고, 그 사이로 몇 개의 암문이 있다. 남서방향으로는 바다로부터 공격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항구 성채 흔적도 남아 있다. 이들 중세도시 유적을 보고 나온 우리는 보스니아 모스크의 미나렛 쪽으로 간다. 이곳에서 보는 카이사리아와 바다 풍경이 일품이다.

우리 회원 중 일부는 옆에 있는 갤러리에서 기념품을 사기도 한다. 잠시 후 이곳을 나온 우리는 5분쯤 차를 몰고 북쪽으로 가 수도교를 살펴본다. 이 수도교는 크로커다일 강에서 카이사리아까지 물을 운반하던 물길이다. 강에 댐을 막아 그 물을 5.5m 높이의 수도교를 통해 5㎞ 떨어진 카이사리아까지 공급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교는 카이사리아의 생명줄 구실을 했다.


태그:#카이사리아, #헤롯왕, #사도 바오로, #로마시대 극장과 원형극장, #십자군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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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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