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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부분이 알뜨르 비행장과 송악산 해안동굴 답사 지역
 동그라미 부분이 알뜨르 비행장과 송악산 해안동굴 답사 지역
ⓒ 구글지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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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막다른 상황에 몰린 일본군은 자살특공대를 조직했다. 폭탄을 실은 소형 비행기를 이용해 미국의 항공모함에 돌진, 자살하도록 훈련시킨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소형 보트에 폭탄을 가득 싣고 미군 군함을 향해 돌진하도록 훈련시킨 가이텐(回天) 특공대가 있었다.

이들 자살특공대의 자취가 제주도에 남아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주둔하고 훈련을 받은 '알뜨르 비행장 터'와 가이텐 특공대가 주둔하면서 미군 군함의 출현을 기다리던 '송악산 해안동굴'이 대표적이다. 왜 하필 제주도에 이런 군사 시설이 만들어졌을까.

제주도는 일본 남단의 규슈 지방과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직선상에 있고, 필리핀과 한반도 사이에 있어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지역의 중심부 해상에 놓여 있다. 그래서 제주도는 동북아시아의 군사 전략상 아주 중요한 지점이었다.

일제는 중일전쟁 때 제주도를 대륙 침략 전쟁의 전진기지로, 전쟁 말기에는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이용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에서 자살특공대를 조직적으로 훈련시킨 것도 이런 상황이 빚어낸 일이었다.

격납고 20개 남아 있는 알뜨르 비행장 터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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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듬성듬성 솟아 있는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만 없었다면 한겨울에도 푸성귀가 쑥쑥 자라는 평범한 제주 들녘 그대로의 모습이다. 밭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밟을세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밭 가운데 덜렁 솟아 있는 구조물로 올라가니 찬바람이 사정없이 옷깃을 파고든다.

"우리가 올라와 서 있는 곳이 비행기 격납고입니다. 1937년 일제가 전쟁을 위한 군사용 시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을 훈련시켜 이곳에 보관된 소형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태워 전장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제주역사교사모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활주로가 있던 곳, 관제탑 건물, 1950년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양민들을 잡아다 학살한 섯알오름….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 뿐만 아니라 국가총동원의 명목으로 12세부터 70세까지의 사람들을 동원해서 비행장 건설 노역을 강요했다.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었던 섯알오름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었던 섯알오름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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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지금은 밭인데 격납고는 부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예전에 이 격납고를 철거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클레인으로도 도저히 부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 후 격납고들이 한국근대사에서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다는 판단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 일대 모습, 곳곳에 격납고가 보인다.
 알뜨르 비행장 일대 모습, 곳곳에 격납고가 보인다.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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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장 건설 명목으로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지금은 국방부 소유가 된 땅에서 임대료를 내며 농사를 짓고 있다. 이곳 알뜨르 비행장에 주둔했던 '가미카제 특공대' 출신 일본인 장교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대정초등학교'에 장학금을 줄 테니 환영회를 열어달라는 요구를 하는 기막힌 일도 있었다고 한다. 비행장 때문에 삶터에서 밀려나고 모진 노역에 시달린 이들의 모진 상처를 알기나 하는지….

대장금 촬영지 부근 동굴이 자살특공대 주둔지

멀리서 본 송악한 해안동굴 모습
 멀리서 본 송악한 해안동굴 모습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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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계단을 내려가서 송악산 진지동굴로 가다보면 '대장금 촬영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몇 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송악산 진지동굴이 일본군 자살특공대가 머물던 곳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 하늘과 바다, 해안선이 어우러진 풍경에 젖고 <대장금> 촬영지에 혹해서 열심히 사진만 찍었다.

"이 동굴은 1944년 이 일대 사람들을 강제 동원해서 팠습니다. 미군 군함이 오면 가이텐(回天) 특공대원들이 어뢰를 싣고 돌진해 자폭하는 어뢰정을 숨겨두기 위한 동굴이었어요. 이런 형태의 동굴은 이곳 말고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송악산 주변 알오름에도 동굴이 있고, 성산 일출봉 해안에도 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80여 곳에 700여 개의 인공 동굴이 확인됐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오키나와처럼 제주도 전체를 옥쇄시키기 위한 군사기지로 이용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오키나와가 3개월 동안 미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 명이 희생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미군에 붙잡히기도 전에 집단으로 자결한 수천의 민간인들이 포함되었다. 일본군의 옥쇄 작전의 결과였다.

송악산 해안동굴
 송악산 해안동굴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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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제주도에서도 옥쇄 작전을 전개했다. 주민들을 동원해 진지 동굴을 만들고 자살 특공대를 훈련시켰다. 오키나와처럼 옥쇄 작전의 제물로 전락할 운명이었던 제주도는 일본의 항복으로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군사 요충지로 이용된 제주도에 지금 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그것이다.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에 강 같은 평화는 언제쯤 찾아오는 걸까.

덧붙이는 글 | 제주 자주연수는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주관한 연수로 4일부터 7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태그:#알뜨르 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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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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