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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2일 오전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문재인의 국민속으로 국민곁에서 선언'을 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2일 오전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문재인의 국민속으로 국민곁에서 선언'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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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는 반드시 재협상과 개방제한을 이뤄내겠다. 한미FTA에서 검역주권을 반드시 회복하고 쌀, 양념채소류, 과일, 축산 등의 품목이 양허 제외가 되도록 하고 FTA로 인한 무역 이득 환수 및 피해보전 제도를 통해 상생기금을 만들겠다."

지난해 10월 18일,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는 '위기의 먹거리, 희망을 말하다' 토론회에서 이같은 축사를 하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배포된 이 축사는 세 시간 만에 '없던 일'이 됐다. 해당 내용을 모두 삭제한 수정본이 재배포 된 것.

'반드시 재협상을 이뤄내겠다'는 다짐은 '재협상을 통해 불이익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검역주권 회복'이나 '양허제외(개방 제한)' 등의 구체적인 대책은 생략됐다.

'한미FTA 폐기'를 사실상의 당론으로 내걸었다가 지난 총선에서 역풍을 맞은 민주당이 예민한 부분을 피해가려 한 게 아니냐는 관측부터 나왔다. 당시 고위 관계자는 "단편적으로 시정하겠다고 얘기하는 건 잘못하면 족쇄가 될 수 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총선 때의 경험은 대선에서 민주당의 대표주자로 나선 문 전 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한미FTA와 제주 해군기지 문제의 시발점이 참여정부였다는 '원죄'를 가진 민주당과 문 전 후보는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제대로 된 내부 논의와 합의, 설명 없이 진행된 일련의 과정에는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론의 바람이 불면 '좌'로 역풍이 불면 '우'로 이동했다.

정치와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이나 이슈 자체 보다는 그 이슈를 다루는 태도라는 점에서 민주당의 오락가락 행보는 신뢰의 위기를 불러왔다.

김윤태 교수는 지난 7일 대선평가 토론회에서 "민주당은 진보진영에 호소하는 방향으로 한미FTA 반대, 제주 해군기지 반대, 재벌 순환출자 금지를 주장했다"며 "충분한 설명 없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뒤집었는데 구체적 민생 공약도 빠져있는 상태에서 민주당의 좌클릭은 서민층의 지지를 늘리지도 못한 채 소수화 전략이 됐다"고 진단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 역시 지난 15일 "한미FTA에 대한 태도, 제주 강정마을에 유연한 태도를 갖는 게 중도화라고 하지만,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대중의 비판을 받은 것은 일관성 없는 태도였지 방향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정권심판에 각을 세웠지만 (열린우리당 시절) 국가보안법 등 4대악법 철폐 당시의 과도한 이념전선, 종합부동산세 전선 동맹을 만들지 못한 전력 등에 대한 '우리의 과거사' 성찰에는 인색했다"고 자평했다.

과거 행적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속에 문 전 후보와 민주당의 확실한 입장을 정리했어야 했지만 '과거사 정리'는 이뤄지지 않았다.

문재인 공약, 기억나는 게 없다

유권자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공약이 없었다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다. 문 전 후보의 공약집에는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를 수용한 전향적인 정책들이 모두 담겼지만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데 그쳤다. 대선 전체를 관통할 대표 정책 의제를 설정하지 못한 것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지난 14일 <오마이뉴스> 팟캐스트 방송 <이슈 털어주는 남자>에 출연해 "경제·사회 공약 중 기억나는 게 없을 정도로 구체성이 떨어지고 설득력이 부족했고, 공약집을 보면 '이게 실행 될 것인가'에 대해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문 후보는 비전과 후보의 경쟁력에서 졌다"며 "박근혜 후보가 선거 후반부에 18조원의 국민행복 기금·하우스푸어·렌트 푸어 같은 민생 문제에 주력했다면 문 후보는 경제민주화·복지국가라는 큰 가치만을 얘기했지 어떤 수단으로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대표적인 예가 가계부채에 대한 해법이다. 박 후보가 '18조 국민행복기금'이라는 각인되는 공약을 내건 반면 문 후보의 경우 부당한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하는 '피에타 3법'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문 후보의 공약은 지나치게 전문가적이어서 눈앞에 닥친 문제에 대해 직접적 해결을 원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긁어주지 못했다는 평이다.

'민주당의 경제 민주화가 뭔지도 불투명했다'는 내부평가도 나온다. 민 의원은 "민주당은 사유구조의 민주화만을 강조한 것으로 비춰진 반면 박근혜 후보는 불공정하도급, 하우스푸어 등 시장행위와 금융의 민주화에 치중한 것처럼 보여진다"며 "무엇이 대중 생활에 더 절박할까, 구체적 정책을 통한 작은 점령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비 100만 원 상한제' 등 대중들에게 먹힐 수 있는 공약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한 것도 패착이다. 선대위 핵심 관계자는 "국민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는 정책들을 반복해서, 효율적으로 전달했어야 했는데 우리 캠프는 매일 다른 공약을 발표했다"며 "이는 언론에도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매일 공약을 발표할 시간에 지역에 내려가 시장을 한 바퀴 더 도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선순위 없이 쓸어 담은 정책, 실현 가능할까?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8일 오전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투표로 새 시대의 문을 열어달라"고 대국민호소 기자회견을 했다. 문 후보가 회견장에 들어서자 선대본부장단이 큰 박수로 문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8일 오전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투표로 새 시대의 문을 열어달라"고 대국민호소 기자회견을 했다. 문 후보가 회견장에 들어서자 선대본부장단이 큰 박수로 문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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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의 'ABC'도 없었다. 공약 간 유기적 연관성이나 우선순위를 고려한 면밀한 청사진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상조 교수는 "문 후보 공약을 보면 노동·시민사회 요구를 거의 수용했다"며 "다른 부문과의 조화에 대한 고민 없이 내놓은 요구를 정당 정치가 조정하고 걸러냈어야 했는데 문 후보는 그냥 쓸어 담았다"고 말했다. 그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이게 한꺼번에 제기됐을 때 실현 가능성에 대해 전혀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선대위 핵심관계자도 "문 후보가 노동계의 요구를 모두 받아서 공약에 넣었는데, 막상 정권을 잡았을 때 저 걸 다 시행할 수 있을까 싶었다"고 토로했다. 대표적인 예가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 임금의 50%까지 올리겠다는 공약이다. 이 공약대로라면 현재 시간 당 4580원의 최저임금은 2017년에 7131원이 된다. 매해 최저임금을 300원 가량 올리는 과정도 수많은 갈등으로 만만치 않았던 경험에 비쳐볼 때 상당히 파격적인 공약이었다. 

그는 "최저임금 문제는 어마어마한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며 "이걸 힘 있게 헤쳐 나가려면 해당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문 후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좋은 공약'이 집약돼 있지만 이게 후보 자신에게 확실히 체화되지 않아 대통령된 이후 실현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는 것이다.

구체성이 결여된 공약은 국민들의 피부에 다가가지 못했고 우선순위 없이 나열된 정책들은 실현 가능성에 확신을 주지 못했다. 유권자들은 문재인이 그리고 싶었던 나라가 뭔지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구호 수준에 그친 박근혜 당선인의 '중산층 70% 재건', '다시 잘 살아보세'가 더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평가다. 

김윤태 교수는 "프레임 전쟁의 중요한 요소는 자신의 지지자에게 호소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잡으면 무엇을 할 건지 미래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선거에서 중요한 건 프레임이 아니라 플랜"이라고 말했다.

대선은 '회고적 투표'가 아닌 '전망적 투표'임을 망각한 정책 전략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태그:#문재인, #정책, #대선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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