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너는 아무리 봐도 눈이 없건만 어찌도 그리 잘 보느냐? (…)너는 코가 없건만 어찌도 그리 냄새를 잘 맡노? 기름검댕이 바른 손, 똥거름 바른 손에는 쥐어도 보기 전에 벗어나서 향기가 모락모락 나는 빗질 같은 손에만 돌아다니느뇨? (…)너는 손이 없건만 어찌도 그리 잘 붙잡느뇨? 몇 억, 몇 천만의 사람을 공장에 붙잡아 놓고, 농장에 붙잡아 매고, 책상에 붙잡아 앉히느뇨? 너는 눈도 코도 귀도 발도 손도 없거늘 정신이 어찌 없으랴? 그리하여 너는 어찌하여 정치도 내려 누르고 도덕도 무시하고 윤리도 파괴하고 신성한 종교까지도 압박하는 힘을 가졌느뇨? (…) 네 앞에는 군왕도 절하고 장군도 꺼꾸러지고 귀족도 꿇어앉고 만민이 굴복하는구나. 너는 무엇이건데 그리도 위대하냐? - <잡지, 시대를 철하다>에서

아무리 봐도 눈도 코도 발도 없는데 부자만 쏙쏙 알아보고 부자에게만 재빠르게 달라붙는 '너'는 '돈'이다. 돈을 의인화 해 돈의 잔혹한 속성을 말하고 있는 이 글이 <개벽>이란 잡지에 실린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11월 1일.

<잡지, 시대를 철하다> 겉표지
 <잡지, 시대를 철하다> 겉표지
ⓒ 돌베개

관련사진보기

돈의 흐름이나 돈에 대한 사람들의 바람과 원망 등 돈의 실정이 9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돈의 속성을 어쩌면 이리 잘 표현했을까? 감탄스럽고 재미있어서 딸에게도 읽어주며 인상 깊게 글이다. 

이 글은 <잡지, 시대를 철하다>(돌베개 펴냄)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잡지나 신문의 글들을 뽑아 엮은 책이다. 

이 책처럼 특정의 글들을 뽑아 엮은 경우 엮은이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으며 어떤 시각을 가진 사람인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같은 문제도 누가 보는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니 말이다. 

저자는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는데다가, <경성트로이카>와 <연안행>,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홍경래>, <전봉준> 등 주로 사회와 역사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들과 사회 변혁에 남다른 뜻을 두었던 사람들을 주제로 한 책을 써온 안재성씨다.

보통 사람은 여름에 고무신만 신어도 황내가 나느니 발이 물러터지느니 하지마는 있는 놈은 고무신은 신지도 않는다. 여직공들은 그 독한 황 냄새와 더운 증기기운을 무릅쓰고 이와 같이 뜨거운 날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노동한다. 특별히 조선의 습관으로 말하면 문밖에도 잘 나서지 않던 여자가 기아와 추위에 쫓겨 불과 40~50전의 임금을 얻으려고 공장주의 학대와 모욕을 당해가면서 직공노릇을 한다. 경성만 해도 30여개소의 공장에 수천의 여직공이 초저녁에 모기, 빈대 등쌀에 단잠 한잠을 잘 못자고 오전 4시부터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정오에 집으로 돌아간다. ('황  냄새에 골이 터지는 고무 여직공' 중)

연초는 냄새가 독할 뿐 아니라 기운이 더우므로 겨울에 길가는 사람이 연초로 손이나 발을 싸매고 가면 동상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여름에는 공장에 다수의 사람이 있고 기계의 증기기운에 더워서 견딜 수 없는 중 연초 냄새가 또 지독하고 그 기운이 훈훈하여 그 공장이 한증막보다 더 덥다. 그런데 그 직공은 사소한 임금으로 인하야 이 고열 중에 노동을 한다. 특히 연초공장에는 소년, 소녀가 다수인데 그들은 연약한 몸에 종일토록 노동을 하다가 어떤 때에는 연초독기에 어지러워서 혼절하며 눈과 코가 아파서 집에 돌아가서도 울기만 한다. 아, 원수의 돈아. 사람들아, 특히 소년, 소녀들을 살려라('불 보다 더운 담배 기운에 고통 받는 연초직공'중)-<잡지, 시대를 철하다>

때문일까. 이 책에는 이처럼 당시 사람들, 특히 민중들의 애환이나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개탄스러운 사회현실을 담은 글과 사회 변혁, 매국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관한 글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일제의 침략과 함께 신문물들이 이 땅에 쏟아져 들어오고, 그것들을 취급하는 가게나 생산하는 공장들이 하나둘씩 늘면서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가 본격화된다.

당시 젊은 여성들에게 공장 취직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취직한 멋진 공장에선 극심한 강도의 노동과 장시간의 노동, 저임금에 시달렸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취업을 했다가도 얼마 못가 도망치거나 파업을 일으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에 공장주들은 똑똑한 여성보다는 미련해 보이는 여성을 뽑는 등으로 조선인들의 고혈을 뽑을 수 있는 온갖 방법들로 공장을 돌린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현실은 너무 참혹했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에는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분노에 차 쓴 '빈민의 여름과 부자의 여름'과 '공장에 들어가려는 누이의 편지', '멋진 공장' 등 당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려주는 글이 몇 편 실려 있는데, 큰애가 이젠 형태로든 노동자로 밥벌이를 해야만 하는 성년이 된 최근 몇 년 전부터 내 관심사가 된 주제인지라 정색하고 읽었다.

조선의 공업은 1920년대에 들어서 급속히 발전해 전국에 수많은 공장이 들어서지만 그 대부분은 고무신, 옷감 등 소비재를 생산하는 공장이거나 아니면 천연자원을 일차 가공하여 일본으로 재수출하는 중간가공 공장이었습니다. 일제 후반기에 들어서면 만주에서 들여온 원자재를 일차 가공해 일본의 본 공장으로 보내는 공장들이 많이 생깁니다. 이들 공장에서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절반 또는 3분의 2 이하의 임금을 받고 하루 12시간 이상 혹사당합니다. 옷감공장 같은 곳은 더욱 조건이 열악하여 공장주들은 농촌으로 모집원을 보내 순진한 시골처녀들을 데려다 혹독한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시킵니다. 여성들이 자꾸 달아나니까 기숙사를 봉쇄해 몰래 담을 넘어가다가 사망하는 사고까지 일어납니다.

지금도 일본의 우파들과 이를 숭모하는 우리나라 내부의 친일파들은 일본이 식민지시대에 산업을 발전시켜 오늘의 한국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근본 기술이 없이  원자재의 중간 가공 또는 고무신이나 옷감 같은 소비재 중심으로 발달한 조선의 공업은 해방 후 일제가 물러가자 그대로 붕괴해 대부분의 공장이 고철더미로 변하고 맙니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글마다 이해를 돕는 보충 설명과 저자의 시각이 돋보이는 글을 일일이 덧붙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게 한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설명 덕분에 당시를 훨씬 실감있게 이해할 수 있음을 책을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공감하리라. 

사실 일제강점 초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의 100주기가 맞물린 최근 몇 년 그와 관련된 책들이나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책들이 봇물 터지듯 많이 출간됐다. 필자 역시 안중근 의거 100주년 관련 책 등, 그 책들을 일일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꽤나 많은 당시에 관한 책들을 읽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나처럼 당시 관련 책들을 읽은 사람 중에는 그런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지레짐작하고 마는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 더 설명하면.

잡지는 당시 사람들의 많은 것들을 담는다. 생활정보지, 시사, 교양지 등 국내에서 발행되는 모든 잡지를 분야별로 볼 수 있고 잡지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전시한 제17회 서울국제도서전(2011.6.15~6.19)의 잡지관 일부 모습이다.
 잡지는 당시 사람들의 많은 것들을 담는다. 생활정보지, 시사, 교양지 등 국내에서 발행되는 모든 잡지를 분야별로 볼 수 있고 잡지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전시한 제17회 서울국제도서전(2011.6.15~6.19)의 잡지관 일부 모습이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그간 이처럼 100여 년 전 대중매체에 실린 글들을 바탕으로 쓴 책들이나 엮은 책들이 주로 참고했던 책들은 <개벽>이나 <별건곤>,<삼천리> 등처럼 대중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진 매체들이 대부분이었다(내가 알기론).

그런데 이 책은 <개벽>이나 <별건곤>, <삼천리>처럼 대중들이 비교적 많이 접한 매체뿐만 아니라 <신흥>이나 <비판> 같은 국내 사회주의 계열 잡지들과 소련이나 중국 등지에서 발행된 <모쁘르의 길>(소련 모스크바)이나 <조선의용대통신>(중국 연안), 일제가 만주에서 발행한 어용신문인 <만선일보>,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와 좌익신문인 <현대일보> 등 다양한 성격의 잡지나 신문에서 글을 뽑고 있다.

다양한 주체에 의해 발행된 다양한 성격과 시각의 매체에서,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매체들에서도 뽑았기 때문에 훨씬 폭넓고 다양한 글이,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음은 물론이다.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들이 많다. 인상 깊게 읽었음에도 읽은 책을 다시 읽기는 쉽지 않다. 이 책 역시 그런 책들과 함께 한동안 내게서 멀어져 있게 될 것이란 아쉬운 마음에 대략 넘기노라니 밑줄 그은 몇몇 부분들이 끝내 아쉽기만 해 옮겨본다. 저자가 어떤 글에 덧붙인 글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제강점기나 오늘날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개탄하면서 말이다.

한 사회의 발전 정도는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쓰인지 65년이나 지난 2010년 9월, 충남 당진의 한 철강회사에서 일하던 젊은이가 용광로 쇳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고가 있었습니다. 안전망도 없고 난간도 없이 쇳물이 끓어오르는 용광로 위에 놓인 폭 1미터 철판 위를 오가며 일하다 순간적으로 추락한 것입니다. 이 청년의 작업환경이 80년 전 일제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위험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자 선반 입구에 줄을 쳐서 들어가지 못하게 해놓은 게 회사 측의 대책 전부라는 추가보도는 더욱 경악스럽습니다. 우리사회가 형식적인 민주화, 형식적인 인권은 발전했어도 그것은 중산층 이상의 유산계층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하층 노동자에 대한 그것은 아직도 제자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비정규직이 되어버린 현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잡지, 시대를 철하다>에서

덧붙이는 글 | <잡지, 시대를 철하다>- 옛 잡지 속의 역사 읽기 ㅣ안재성 (엮은이) | 돌베개 | 2012-09-24 ㅣ정가 17,000원



잡지, 시대를 철하다 - 옛 잡지 속의 역사 읽기

안재성 엮음, 돌베개(2012)


태그:#잡지, #일제강점기, #개벽, #신문, #인문교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