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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극단 십년후 전 대표
 최원영 극단 십년후 전 대표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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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earnest)는 '진지한'이라는 뜻이죠? 여기에 엘와이(ly)가 붙으면 '진지하게'라는 뜻이 되겠죠?"

12월 7일 아침,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도로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보라를 뚫고 인천 부평4동 주민센터 2층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우산을 쥔 손에는 굵은 주름이 가득하다. 누군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꺼내 놓았다. 다른 한 쪽에선 교재를 나누어준다. 고구마를 먹으며 천천히 책을 넘기는 사람들.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다.

다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돋보기안경 너머로 영어가 가득한 책을 바라보고 있는 이 광경이 조금 낯설 뿐이다. 최원영(58, 극단 '십년후' 전 대표, 인하대 겸임교수)씨가 이끄는 금요영어교실 수업이 진행되는 현장이다.

최 교수는 1996년부터 이곳에서 영어교실을 이어오고 있다. 수강생들은 삼사십 대도 있지만 칠십을 넘어선 이들이 대부분이다. 적게는 세 달에서 길게는 16년째 수업을 듣고 있다. 여느 수업과 다른 점은 또 있다. 이곳 수강생들은 수강료를 내지 않고, 최 교수는 수업료를 받지않는다. 18년 전, 시작부터 그랬다.

중학교 입학금 내주던 초등학교 교사

최 교수가 이 수업을 하게 된 계기는 그가 교대를 막 졸업한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처음 발령받은 곳은 구로공단과 가까운 광명의 어느 초등학교. 거친 공장일을 하며 힘든 삶을 사는 학부모들이 아주 많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에 못 가는 아이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최 교수는 선뜻 얇은 월급봉투에서 입학금을 꺼내주었다. 그러기를 6년, 문득 회의감에 빠졌다.

'왜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가. 가난한 이들은 열심히 일해도 왜 행복해지지 않을까. 세상 앞에 나는 너무나 약한 존재 아닌가?'

당시 우리나라는 군부독재가 장악해 곳곳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세상을 저주했다. 어느 여름 방학, 홀로 인천 을왕리 바닷가를 찾았다.

그곳에서 모래성을 쌓는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왔다 가면 모래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행복한 얼굴로 다시 모래성을 쌓았다.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 하나.

'나는 왜 저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세상에 무언가를 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세상 탓만 하고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언가?'

그는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그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실천할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해 사표를 내고 이듬해 가족과 함께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공부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대학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배우고 심리학과 철학, 역사책을 읽어나갔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고, 하루 세 시간 잠을 자는, 그야말로 고학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쁨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0년이 지나는 사이 그는 변해 있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그가 설계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귀국하면서, 그는 한 가지 바람이자 다짐을 되뇌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리더로 살겠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고마움 느낀다면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길"

1994년 귀국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다. 그는 귀국한 이듬해 자신의 다짐을 실현할, 일종의 실험집단을 만들었다. 극단 '십년후'를 창단한 것이다. 강력한 리더십 대신 사랑으로 극단을 이끌면 극단은 연극이라는 예술로 세상에 더 큰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 생활을 위해 학원에서 영어를 강의했다. 하루하루 분주한 나날이었다. 어느 날, 사회복지사인 후배가 주민센터에서 영어강좌를 해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다. 그의 다짐을 실현할 또 다른 기회가 생긴 것이다. 토요일 오후 두 시간씩 주민 20여 명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한 달 후, 사무장이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수강료를 걷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애초에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공부한 대가를 지불하고, 내가 돈을 받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납니다. 난 학원 강사로서 일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에요. 만일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면 좋겠습니다."

16년째 수업 듣는 부부, "대화 부드러워져"

부평4동 금요영어교실 수강생과 최원영(아랫줄 가운데) 교수
 부평4동 금요영어교실 수강생과 최원영(아랫줄 가운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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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4동 영어수업은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무료 강좌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순식간에 수강생이 모여들었다. 그는 영어회화 대신 양질의 영어문장이 쓰인 시나리오나 원서를 읽기로 했다. 제대로 표현된, 고급영어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수강생들의 영어 수준은 천차만별.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책 읽듯 영어를 접할 수 있도록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교재를 선택했다.

지금까지 <벤자민 플랭클린 자서전> <어린왕자> <탈무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에너지 버스> 등의 원서와 <센스 앤 센서빌리티> <벤허>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벤허>를 제외하곤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했다.

당시 오십대 중반이었던 신정자(71ㆍ경기도 부천)씨는 칠십대 노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영어수업을 듣는다. 신씨는 "영어를 어려워하는 우리에게 '콩나물이 밑으로 빠지는 물을 조금씩 빨아들이는 것처럼, 꾸준히 하면 영어 실력이 는다'는 말을 해주셨어요. 잘 가르치는 건 물론, 영어 이외의 삶에 보탬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니 좋아요"라고 말했다.

신씨는 무엇보다 최 교수의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맘에 들었다고 했다. "남편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 수업을 같이 듣자고 했죠. 교수님 말씀을 들으면 변화가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 우리 부부 성격이 많이 달라진 걸 느껴요"라고 말했다.

신씨의 남편 이민용(75)씨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늘 배려와 양보, 용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세요. 자꾸 듣다 보니, 아내와 나누는 대화도 부드러워지고, 차 운전할 때도 양보를 하려 노력하게 되더군요."

대가 바라지 않는 희생에 감동

조경현씨는 오래된 일화를 꺼내놓았다.

"2000년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어요. 교양과목으로 영어 수업을 듣는데, 오랜 기간 손 놓고 있던 터라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저 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 입학생 중 한 분이 고등학교 친구라며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이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늦은 밤까지 서른 명이나 되는 동기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셨어요. 극단 연습실을 공부 장소로 제공해주시고, 강의도 완전히 무료였죠. 덕분에 영어시험에 모두 통과했어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에 감동했고, 이후 선생님은 제 인생의 멘토가 됐지요."

조씨는 최 교수가 강의하는 곳에 직접 찾아가 청강한 것도 여러 번이다. 6년 전부터는 금요영어교실도 함께 한다.

"선생님은 나눔을 강조하세요. 처음엔 공감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제 생각이 선생님을 따라가더군요. 선생님이 교주 같다는 생각도 해요."(웃음)

이민용씨는 "우리가 있어 선생님이 오시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오는 것"이라며 "영어도 영어지만, 솔직히 선생님이 좋아서 계속 나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리더십에 대해선 정말 자부합니다"라고 자랑했다.

최 교수는 멋쩍게 웃으며 "쑥스럽네요. 적게 준 것을 크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영어든 연극이든,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능만 배운 사람은 기능적인 일만 하죠. 기계처럼요. '영어'로 만났지만 세상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를 바랐는데, 오랜 동안 함께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수업은 사랑을 전하는 도구일 뿐

그 사이 극단 '십년후'는 인천을 대표하는 연극단체로 성장했다. 주위에선 최 교수의 헌신과 희생이 있어 '십년후'가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작년 10월 극단 대표 퇴임식에서 단원들은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눈물을 쏟았고, 보는 이들의 마음도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는 정작 특유의 따뜻한 미소만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 막 귀국한 서른아홉 살 청년은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됐다. 백발이 성성해지고 코에는 돋보기안경을 걸친 것을 보니, 그 역시 수강생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영어 수업은 새해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가 전하는 사랑에는 줄어듦도 물러섬도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최원영, #부평4동 영어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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