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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인터뷰 후 손을 꼭잡고 앉았다. 우리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아내 서명화 씨가 '평강공주가 아니냐'며 웃었다. 남편 유규상 씨는 살아보니 '가정이 최우선이더라'고 말했다.
▲ 유규상 서명화 부부 부부가 인터뷰 후 손을 꼭잡고 앉았다. 우리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아내 서명화 씨가 '평강공주가 아니냐'며 웃었다. 남편 유규상 씨는 살아보니 '가정이 최우선이더라'고 말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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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할 줄 아는 건 주먹질과 노래밖에 없었다는 유규상씨. 청춘시절은 주먹질로 점철되었다. 경찰서를 들락날락했다. "어머님 속을 꽤나 썩인 자식"이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규상씨. 어머님의 눈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하단다.

이런 그에게 인생 전환점이 찾아 왔다. 바로 아내와의 만남이다. 소개로 만난 아내 서명화씨.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건 규상씨의 노래였다.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란 곡이다. 그게 규상씨의 의도된 프러포즈였던 걸 후에야 알았다고.

사실은 아내와 남편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이었다. 아내는 어려운 일이라곤 별로 겪어 보지 않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반면 남편은 부모님의 불화와 가난이 일상이었다. 아내는 카누선수였고, 남편은 한 방을 노리는 사내였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겠지.

명화씨가 인사 오던 날, 시어머니는 밥을 해보라 했다. 20세가 넘도록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결과는 '3층밥'이다. 시어머니는 "맛있다, 참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더란다. 이런 어머니의 행동에 반한 명화씨. 결혼식도 하지 않고 곧장 시집 생활에 돌입했다.

하지만, 곱게만 자란 도시처녀 명화씨에겐 시골 시집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가르쳐야 하는 시어머니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듯. 겁 없이 뛰어들은 시골생활과 시집살이가 힘겨워 눈물이 태반이었다고.

"그 시절,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어요"

이렇게 시작한 부부 생활. 그 첫 단추가 바로 시어머니 홀로 하시던 마대 봉제 사업이다. 사업이랄 것도 없다. 생계유지를 위해 시어머니 혼자 비닐하우스에서 마대를 만들어 파는 거였다. 이때 시어머니, 남편과 아내는 함께 미래를 꿈꿨다. 아니 힘을 합쳐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 시절, 잠은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단다. 밤을 새우는 일은 다반사였다. 모두 납품기일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오죽하면 1997년 어느 날, 규상씨가 쓰러졌다. 과로가 원인이었다. 이틀을 깨어나지 못했단다. '과로사'가 남의 일이 아닐 뻔했다.

다행히 성실히 한 만큼 대가는 꾸준히 따랐다. 해마다 꾸준히 매출은 올랐다. 창고에서 축사부지, 축사에서 임대공장 등 순으로 공장은 성장해나갔다. 

밤을 새워 일하면 몸은 천근만근. 그러던 어느 날이다. 새벽 3시쯤 일을 마치고 남편이 아내만을 위해 불러준 노래 <너를 사랑해>(한동준). 그 노래를 듣는 아내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 맛에 명화씨는 남편과 함께한 듯. 

공장화재, 부도 등 시련은 이어서 오고

이런 그들에게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2003년 4월, 기계 과열로 공장이 불탔다. 모두가 화학성분의 제품이다. 불은 하루 꼬박 탔다. 헬기 3대가 동원되고, 인근 야산도 일부 태웠다. 경기도 안성 미양면 일대에선 최고 큰 불이라고 지금도 기억된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반면 금액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공장에 있던 제품 3억 원어치 손실, 인근 야산 소실 금액 배상, 화재 뒤처리 비용 감당 등. 10년을 일구어온 일터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버렸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으로 재기했다. 공장부지도 매입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공장을 직접 지었다. 이제 일어서는 듯했다. 하지만 그해는 그들에게 잔인했다. 이번엔 2억여 원의 부도였다. 친한 친구에게 빌려준 돈 때문에 부도가 났다. 겨우 일어서는 사람을 친구가 짓밟은 셈이다.

문제는 아내와의 불화였다. 공장화재 때도 마음을 합쳤던 부부. 하지만, 이땐 남편이 아내의 권유를 무시하고 빌려준 돈이 문제가 되었다. 의리와 정을 중요시하는 남편은 종종 빌려주고 곤란을 당하곤 했다. 남편은 술로 지새웠다.

남편과 아내는 심하게 다퉜다. 아내는 "내 말 왜 안 들었냐"였고, 남편은 "낸들 그러고 싶었냐"였다. 가정이 깨질 위기였다. 이때 기지를 발휘한 건 역시 시어머니였다. 명화씨에게 많은 말을 해주며 격려했다. 아내는 또 한 번 어머니의 사랑에 백기를 들고 마음을 다스렸다. 간신히 함께 위기를 극복했다.

"중소기업 살길은 기술 보다 성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했던가. '2004년 POSCO와 단독 납품 계약. 2006년 LG와 납품 계약, 2007년 하청업체 중 최우수 업체 선정' 등의 성과를 올렸다. 중국 공장도 건립했다. 현재 30억 원 정도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다.

어쩌면 별 볼일 없는 조그만 공장에 큰 기업들이 계약한 이유는 뭘까. 바로 유규상씨의 성실이었다. 10년 동안 POSCO로부터 단 한 건의 클레임도 없었다. 납기일을 꼭 지켰다. 품질을 최우선에 두었다. 이런 그의 성실성은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한다. "중소기업이 살길은 기술보다 성실"이라고. 첨단산업을 주도하는 대기업을 상대로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건 무리라고. 아직도 우리 곁엔 기술보다 성실을 요하는 틈새 분야가 있다고. 자신의 이 분야가 그렇다고.

아직도 이 부부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이왕이면 동종 업계에선 'TOP이 되고 싶다고. 중국 진출에 이어 일본과 미국 시장까지 진출을 노리고 있다.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라니 절반 이상을 아내 이야기만 하는 남편, 남편의 꿈이라면 항상 같이 꾸는 아내. 이 남자의 칠전팔기의 원천, 말 안 해도 잘 아실 듯.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난 4일 정덕산업(안성 미양면 진촌리) 현장에서 유규상, 서명화 부부와 이루어졌다.



태그:#유규상 서명화 부부, #중소기업, #정덕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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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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