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착하게 사는 것이 신성(神性)에 이르는 길이다

금산사에 미륵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진표율사는 개구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 금산사의 상징 개구리. 금산사에 미륵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진표율사는 개구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내게는 혹여 내 마음에 땟국 끼지 않았나? 비춰보는 도반 몇 분이 계시다. 그중 장형이신 한국전래놀이협회 고갑준 대표님은 늘 '선(善)함은 신성(神性)에 이르는 길이다'는 말씀을 해 주신다.

신이 다시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신이라면 중형세단이나 전세기를 타고 으리으리한 성전으로 오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현대종교는 보통 사람들이 먹고 입는 거친 음식과 옷을 마다하고 수백 억 들여 성전을 짓고 '불안한 미래'를 위해 재물을 비축해둔다. 어쩌면 현대종교는 신을 '확실한 적금통장'으로 여기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수한 신성을 본다.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마다 신성을 마주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당진 솔뫼성지에서 남루한 작업복 차림으로 홀로 기도하던 50대 가장과 내장사 법당에서 재옷을 입고 아들의 극락왕생을 빌던 60대 보살, 김제 금산교회 종각 밑을 뛰어 노는 아이들에게는 분명 그 신성이 있었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말로 곧 신성을 닮아 가는 사람이다. 

아시아의 산티아고순례길(Camino de Santiago) 모악산 순례길

통일신라시대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28호 금산사 당간지주
▲ 금산사 당간지주 통일신라시대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28호 금산사 당간지주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울고 떠나 웃으며 돌아오는 길'이다. 스페인에는 산티아고순례길이 있어 세계 곳곳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이 찾아와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북도가 천주교, 불교, 개신교, 원불교 4대 종교의 성지가 있는 전주, 김제, 익산, 완주를 잇는 240km의 순례길을 만들어지고 있다. 세계순례대회도 열렸다.

하루 10시간 씩 1주일을 꼬박 걸으면 순례길 전체를 걸을 수 있고 하룻길을 원하면 김제의 모악산 일대(40km)를 걸으면 된다. 아무래도 순례길의 백미는 김제의 모악산이 아닐까 싶다.

1889년 장약슬(J. Vermorel) 신부가 지은 모악산 자락에 지은 수류성당으로 천주교의 성지다.<김제시청>
▲ 수류성당 1889년 장약슬(J. Vermorel) 신부가 지은 모악산 자락에 지은 수류성당으로 천주교의 성지다.<김제시청>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모악산은 불교(금산사), 천주교(수류성당), 개신교(금산교회), 원불교(원평교당) 등 다양한 종교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 외에도 미륵신앙이나 지리도참사상의 영향을 받아 증산교와 대순진리교 등 여러 신흥 종교가 흥망성쇠를 함께 한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충남의 계룡산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종교가 탄생한 곳이 아닐까 싶다.

모악산 순례길은 금구면 산동교회에서 시작해 귀신사~금산사~금산교회~증산법종교~대순진리회당~원불교 원평교당~수류성당을 잇는 40㎞ 코스의 종교순례길이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역사문화종교 유적과 건물들을 만날 수 있고 편백나무 우거진 숲속 길과 풍광이 산수화 같은 금평저수지 갓길도 있어 명상 도보 길로 손색이 없다. 

석가모니 탄생 이전부터 절터가 있었다는 모악산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국보 62호 미륵전.
▲ 국보62호 금산사 미륵전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국보 62호 미륵전.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조선 성종23년(1492년)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따르면 금산사는 부처님이 태어나기 이전인 가섭불 때부터 있던 절터에 다시 중창한 절이라는 기록이 있다. 가섭불은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이전에 살다간 7명의 부처 중 6번째 부처로 산스크리트어 카사파(Kāśyapa)를 음역하여 가섭파(迦攝波)로 부른 것이다. 불기로 따지면 석가모니가 입적한 2556년 보다 훨씬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 등 종교 활동이 있었던 곳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모악산을 대표하는 인물은 진표율사와 강증산이 아닐까 싶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원년(599년)에 세워졌는데 신라 혜공왕 2년(766년) 진표율사가 중창을 통해 미륵불신앙으로 대중불교운동을 펼치게 되면서 중흥기를 맞이한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왕위계승문제로 큰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돼 패망의 길을 걸었던 곳이기도 하다. 

증산교를 탄생시킨 강증산의 딸이 보모의 유골을 봉안한 강증산묘원. 문화재청이 근현대건축물로 지정했다.
▲ 증산교창시자 강증산의 묘원 증산교를 탄생시킨 강증산의 딸이 보모의 유골을 봉안 한 강증산묘원. 문화재청이 근현대건축물로 지정했다.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훗날 김제는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이자 최후 격전지가 된다. 이후 모악산에서 강증산의 증산교가 태동하였고 현재도 대한증산선불교(大韓甑山仙佛敎)의 본부와 강증산의 유골의 모신 증산법종교 본부영대와 삼청전이 순례길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더불어 대순진리회의 성지도 자리하고 있다. 

동학 이후 근대 한국 민족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증산교의 교주인 강증산(일순)이 아닐까 싶다. 그는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고 보고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 인간세상을 구원하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

태을교, 훔치교, 선도교, 미륵불교, 보화교, 보천교, 태극도, 동화교 등등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종파들이 탄생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해 왔으며 현재도 증산교, 대순진리회 등 수십개의 종파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동학혁명을 반대하고 이후 모악산을 중심으로 후천개벽과 후천선경을 주장하며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을 미륵불로 모신 삼청전.
▲ 증산교의 창시자 강증산 동학혁명을 반대하고 이후 모악산을 중심으로 후천개벽과 후천선경을 주장하며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을 미륵불로 모신 삼청전.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제자인 차경석이라는 사람은 민족항일기에는 보천교를 만들어 6백만명의 교세를 확보했으며 나라 이름을 시국(時國)이라 정하고 정읍에 웅장한 궁궐까지 지었다. 그 교세 때문에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차경석을 직접 찾아와 면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증산상제라고 부른다. 보통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분들을 증산교로 아는데 그분들은 대순진리회란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20여 년 전에는 대학마다 증산도 열풍이 불어 많은 학생들이 수행을 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주춤한 것 같다.

교회에 웬 삼보(三寶)? 금산교회의 3가지 보물

이제는 추억이 되 버린 종탑. 한 세기를 보낸 금산교회에는 아직 남아 있다.
▲ 추억의 종탑. 이제는 추억이 되 버린 종탑. 한 세기를 보낸 금산교회에는 아직 남아 있다.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모악산은 개신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36호인 금산교회가 그곳으로 107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금산교회는 미국 선교사 데이트가 1905년에 5칸으로 지은 한옥교회로 1905년에 배재의 이씨 문중 제실을 뜯어다 1908년 이 자리로 옮겨지었다.

금산교회는 건물을 ㄱ자 형태로 지었는데 이는 개신교가 토착화 하면서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던 조선의 유교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예배당의 남쪽은 남자석 동쪽은 여자석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옛 시절에는 아애 휘장까지 쳐서 내외를 했다고 한다. 천장 대들보 상량문에는 성경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이 적혀 있는데 남자 쪽은 한자로 여자 쪽은 한글로 적혀 있다. 

이 교회 장로님은 내게 금산교회에는 3가지 보물이 있다고 자랑하신다. 그 첫 번째가 107년 전 내외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조선사회에 맞게 지어진 남녀를 구분해 지은 ㄱ자형 교회다.

개신교가 토착화 되면서 ㄱ자형으로 지어 남녀가 따로 예배를 보도록 했다.
▲ 예배도 남녀칠세부동석. 개신교가 토착화 되면서 ㄱ자형으로 지어 남녀가 따로 예배를 보도록 했다.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나는 마부(머슴)였습니다.'

1924년 함흥 신창리교회에서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당선된 이자익 목사의 설교 첫 마디였다. 그리고 대전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벌인 마지막 설교의 첫 마디도 '나는 마부(머슴)이였습니다'였다고 한다. 말을 끌던 머슴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뒤에는 자기 집 머슴을 뒷바라지해 목사로 만들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설교를 들었던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금산교회의 두 번째 보물이다.

세 번째 보물은 107년 된 당회록(교회의 대소사를 기록한 문서)이다. 당회록에는 교인들의 권징(교회의 윤리와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는 장로교회의 제도)이 실명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누구의 조상이 도박을 하고 폭력을 저질렀는지 후세들에게 대를 이어 전해지기 때문에 교인들은 조심하고 조심한다고 한다. 금산교회 장로님은 기복신앙이 되어가는 한국교회가 '윤리와 질서를 지키고 선을 행하는 본을 세우기 위해서 권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 하신다.

교회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쓰임을 생각하지 않고 바라는 것들만 넘치니 그 바람들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 싸우는 이유가 하늘나라 것들 때문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늘 세상 것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처치스테이(Church Stay)를 꿈꾸는 교회

1905년 미국 선교사 데이트가 한옥으로 지은 개신교의 성지 문화재자료 136호 금산교회.
▲ 금산교회 1905년 미국 선교사 데이트가 한옥으로 지은 개신교의 성지 문화재자료 136호 금산교회.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확인해봐야겠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순례여행객들을 위해 문을 열기로 한 교회가 김제 순례길에서 금산교회 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씁쓸했다.

문득 사찰에 템플스테이가 있듯이 김제 순례길 교회에 처치스테이(Church Stay)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배가 끝나고 식사하면서 장로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당신도 진즉 생각하고 계셨다고 한다. 

"불제자와 천주교인들만 순례여행을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개신교를 믿는 순례여행자들을 위해 누구나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교회당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어요."

'백 년 전 예배'를 복원해 기독교인들 가슴에 늘 그리워하고 힘들 때 찾아 갈 수 있는 본향 같은 교회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투정을 부렸다. 장로님께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렇게 된다면 꼭 주일을 지켜야 하는 기독교인들도 편하게 김제로 순례여행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몰래 여행을 가면서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짐도 덜어낼 수 있겠다.

함께 간 형님이 '그나저나 금산교회 밥값 좀 들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교회에서 밥 얻어 먹고 감사 헌금 내지 않을 교인들은 없을 테니까. 처치스테이(Church Stay) 상상 괜스레 기분이 좋다.

언어총량제, 말을 늘리기 전에 그릇을 키우자

‘울며 시작해 웃으며 돌아온다’는 한국의 산티아고순례길 김제 모악산 순례길
▲ 모악산 순례길지도 ‘울며 시작해 웃으며 돌아온다.’는 한국의 산티아고순례길 김제 모악산 순례길
ⓒ 김대호

관련사진보기


얼마 전 한 선배가 내게 '신은 존재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늘 자신보다 논리력인 빈약하다고 여기는 개신교도들을 습관적으로 재미삼아 조소하고 놀리는 사람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다는 것이죠.'

내 음성이 너무나 차분하고 확고했으므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처음엔 역했으나 문득 '이 사람 안에는 아직 미성숙한 아이가 있구나' 생각이 들자 측은지심이 밀려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내 주위에는 늘 사리분별을 내세우고 남 이야기로 자신의 선명성을 부각시키려는 사람들로 넘쳐 났었다. 사실 내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바로 내 얼굴이다. 그때는 그것을 선명한 것으로 보았다. 듣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말만 하는 자는 남은커녕 자기 자신도 볼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순례길에서는 말이 사라진다. 참 나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말은 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산다. 어떤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어휘를 가지려고 한다. 언어도 총량제가 있어서 자기 그릇에 차고 넘치면 통제되지 못하고 바깥으로 흘러나와 독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보여도 말하지 않는 자를 깨달은 자라하고, 보이는 데로 말하는 자를 무당이라 하고, 보이지도 않는데 남의 깨달음을 빌어다 보인다고 하는 자를 사기꾼이라고 하다고 했다. 말을 늘리기 전에 그릇의 용량부터 늘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본 원고는 격월간 대동문화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금산교회, #모악산, #금산사, #순례길, #처치스테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음 놓을 자리 보지 않고, 마음 길 따라가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이 기자의 최신기사"마음도 수납이 가능할까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