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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감추해변, 아우성치는 바다.
 비오는 날의 감추해변, 아우성치는 바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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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날, 강원도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때맞춰 비가 내린다면,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맑은 날을 기대하고, 푸른 바다와 그 바다만큼이나 푸른 하늘이 보고 싶었을 당신, 비록 그 기대를 충족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결코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동해로 여행을 떠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또 그만큼이나 검은 바다를 바라다보면서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바다는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했어. 그 바다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또 다른 일면이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바다는 사실 '바다'가 아니었던 거지.

그날 바닷가에 비가 내리는데, 그것도 모자라 거기에다가 또 거친 바람까지 불어준다면, 당신은 진짜 하늘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바다가 살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날이 얼마나 될까?

그 바다가 살아서 사납게 울부짖는 광경을 보게 되는 날이 또 몇 번이나 될까? 검은 하늘 아래, 또 그 하늘만큼이나 검은 바다가 바닷가 깎아지른 듯한 검은 바위 절벽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는 광경을 바라다볼 수 있는 날이 내 남은 생애 과연 몇 차례나 더 돌아올까?

그러니,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보고 싶었던 당신, 때맞춰 찾아간 날 그 바닷가에 비가 내린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 바다가 가진 매력은 푸른 색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반복적으로 되돌아가는 파도가 전부가 아니다. 바다는 내가 오늘 보고 간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감추해변 앞 철길을 지나가는 화물열차.
 감추해변 앞 철길을 지나가는 화물열차.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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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시가 감추어둔 보물 같은 해변, 감추해변

감추해변 내려가는 길.
 감추해변 내려가는 길.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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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가는 비가 그칠 듯 말 듯 하면서도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래간만에 동해시까지 왔지만, 멀리 가거나 높이 올라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문득 가까운 곳에 있는 감추해변이 떠오른다. 동해시가 감추어둔 해변이라니, 한 번쯤 찾아가볼 만하다. 대신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동해시 감추해변 앞 너른 주차장에 차 몇 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감추해변에서 '기도'를 올리려는 사람들이 타고 온 차가 아닌가 싶다. 주변에 여행객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계속 해서 비가 온다. 할 수 없이 우산을 받쳐 쓴다.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 정말 번거롭다.

주차장에서 해변까지는 몇 십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지척이다. 철길을 건너고 군부대 초소 옆길을 따라 내려가면 그곳이 감추해변이다. 감추해변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해변 백사장이 손바닥만큼이나 작고, 여행객들이 이용할 만한 부대시설이 건의 전무한 해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풍경이 아름다운 데다 정겹고 푸근한 느낌마저 들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이 해변은 좁은 백사장을 거대한 바위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해변으로 걸어서 들어가면, 밖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바다만 가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감춰진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동해가 감추고 있던 해변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감추해변이다.

감추해변, 바위에 부딪쳐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감추해변, 바위에 부딪쳐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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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 옆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자 먼저 비바람에 사납게 몸부림치는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바다가 성난 짐승처럼 울부짖는 광경이 가히 충격적이다.

파도가 바닷가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나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바위가 부서지지 않자, 아예 그 바위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요란하게 덤벼들고 있다. 한 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는 그 기세에 일순 두려움이 몰려온다. 으르렁대는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두려움은 잠시, 곧 이어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희열이 느껴진다.

파도가 바위를 미친 듯이 물고 뜯는 광경이 지극히 통쾌하다. 지독히 후련하다. 살면서 이처럼 통쾌하고 후련한 기분을 맛보는 게 얼마만인가? 아무리 동해라고 해도, 눈앞에서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는 일이 흔치 않다.

모처럼 비가 내리는 날, 별다른 기대 없이 찾아간 감추해변에서 동해가 감추어 두었던 멋진 광경을 보고 돌아간다. 왠지 횡재한 기분이다. 감추해변 옆 바위 절벽 위에 감추사가 자리잡고 있다. 절도 해변만큼이나 작다. 절에서 파도가 감추해변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감추사에서 내려다 본 감추해변. 해변을 뒤덮은 파도.
 감추사에서 내려다 본 감추해변. 해변을 뒤덮은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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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해변에서 묵호항 가는 길, 소나무숲길.
 감추해변에서 묵호항 가는 길, 소나무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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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을 따라가는 바닷가 산책로, 이색적인 풍경들

감추해변에서 나와서는 묵호등대까지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묵호등대 가는 길은 동해안에서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산책로다. 해변 주차장이 곧바로 소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바닷가 철길과 찻길 사이 공터를 공원으로 꾸미면서 만든 길이다. 산책을 하기에 좋은 길이다.

기차가 지나다니는 철둑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흠이다. 그렇긴 하지만 소나무들이 그려 보이는 동양화 같은 풍경 덕분에 답답한 마음은 덜하다. 얼마 안 가 동해시가 감추어둔 또 다른 해변, 한섬해변이 나온다. 이 해변은 백사장이 감추해변에 비해 훨씬 더 넓은 편이다. 모래가 유난히 희고 곱다. 해변 양쪽 끝으로 거대한 바위가 육지에서 뚝 떨어져 나와 있는 게 특이하다.

맑은 날의 한섬해변.
 맑은 날의 한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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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섬해변에서 한섬해안길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은 바닷가 쪽이 철책으로 막혀 있다. 철책 아래는 절벽이다. 길이 매우 호젓하다. 때로는 으슥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중간에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천곡항이 있다. 이 항구는 마을 어민들과 낚시꾼들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드문 항구다.

항구로 내려가는 길이 몹시 가파른데, 어떻게들 이곳까지 차를 몰고 들어왔는지 의아하다. 알고 보니, 이 항구에서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를 찍었다. 대체 이 후미진 항구에서 어떤 장면을 찍은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천곡항 방파제 위에서 양쪽으로 한섬해변과 묵호항이 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의 천곡항 앞바다.
 맑은 날의 천곡항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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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곡항에서 좀 더 가다 보면, 동해기도원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앞에도 감추해변만큼이나 작은 해변이 있는데 고불개해변이란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건데, 동해는 해변이 아닌 곳이 없다. 동해기도원 뒤를 지나서는 다시 철길을 건너 산책로로 올라선다.

한참을 가다 보면 철길을 건너는 하평건널목이다. 예전에는 건널목 너머로 집 몇 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헐어내고 공원을 만들고 있다. 조만간 근처 하평해변을 찾는 사람들에게 휴식공간이 생길 모양이다.

맑은 날에 찍은 하평건널목.
 맑은 날에 찍은 하평건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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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바다열차.
 맑은 날,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바다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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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묵호항역'으로 가는 철길과 '묵호역'으로 가는 철길이 갈라진다. 묵호역은 동해안 관광열차인 바다열차가 정차하는 곳이고, 묵호항역은 화물열차가 거쳐 가는 역이다. 묵호항역을 지나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발한동이다. 멀지 않은 곳에 묵호항과 묵호등대가 있다.

묵호항에 해가 저문다. 날이 흐려 어두운 하늘 때문에 평소보다 더 빨리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비가 내리고 날이 저물기 시작한 탓인지, 묵호항을 오가는 사람도 드물다. 활어 판매 센터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서둘러 묵호등대마을로 발을 옮긴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그 유명한 '논골담길'을 걸어 묵호등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흐린 날의 묵호항.
 흐린 날의 묵호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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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담길, 그림으로 남은 선창가 달동네의 역사

논골담길 올라가는 길의 표지판.
 논골담길 올라가는 길의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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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담길은 달동네인 묵호등대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부르는 말이다. 그 골목길을 따라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바닷가 산비탈 위에 층층이 올라선 낮은 주택 골목길 사이사이, 오밀조밀 그려진 벽화가 예사롭지 않다. 그림은 주로 묵호항과 묵호등대마을의 풍요로웠던 옛 모습을 담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여행객들에게는 정겨운 마을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이 마을은 1941년 묵호항이 개항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묵호항 개항과 더불어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를 따라 산꼭대기까지 판잣집들이 들어섰다. 한때 명태와 오징어잡이로 그런 대로 먹고 살만 했다. 그러다 80년대 이후 어획량이 줄기 시작하더니, 마을 사람들의 삶도 점점 더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벽화를 그리는 작업은 2010년 말에 시작됐다. 그 후로 잿빛으로 가득했던 골목길이 여행객들의 발길이 잦은, 화사한 그림 전시장으로 되살아났다. 논골담길을 따라서, 묵호등대마을을 이야기가 있는 벽화마을로 만드는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음에 가면 그때는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지 알 수 없다. 논골담길은 모두 세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곳곳에 표지판이 있어 어느 길로 가든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논골담길 벽화 '보따리 자판기 판매중'.
 논골담길 벽화 '보따리 자판기 판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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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담길, '웃는돌'.
 논골담길, '웃는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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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담길, '묵호등대'.
 논골담길, '묵호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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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가 넘은 시각, 시간이 너무 늦었다. 등대 전망대로 올라가는 문은 이미 닫힌 뒤다. 할 수 없이 묵호등대 앞에서 멀리 동해와 묵호항을 내려다 본다. 바다는 여전히 찌푸린 하늘 아래, 검게 물든 거대한 몸을 뒤척이고 있다. 이제 마을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논골담길을 걸어 올라온 길에서 반대편 길로 출렁다리를 건넌다. 출렁다리 아래는 바닷가 횟집 거리다.

횟집 거리 앞 바다에 기묘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서 있다. 이름은 '꺼먹바위'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바위를 보는 즉시 알 수 있다. 그 바위가 이스터섬의 거인상을 닮았다. 바위 밑을 성난 파도가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다. 하지만 바위는 먼 바다를 조용히 응시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참 듬직하다. 충분히 한 마을을 지키고도 남을 위엄을 갖췄다. 이런 바위에 전설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이 바위를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을을 지키는 영광은 엉뚱하게도 마을 앞바다에 사는 '거대한 문어'에게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 문어를 기려 바닷가에 문어 동상까지 세웠다.

꺼먹바위 근처 횟집 거리.
 꺼먹바위 근처 횟집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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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한 모습의 꺼먹바위.
 듬직한 모습의 꺼먹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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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동해는 확실히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색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바다도 예전에 보았던 그 바다가 아니다. 논골담길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도 어딘가 모르게 더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을 풍경이 맑은 날에 보는 것과는 또 다르다. 다른 날 다른 풍경, 무작정 떠난 바닷가 여행이다.

덧붙이는 글 | 여행은 지난 10월 30일과 31일 이틀에 걸쳐 짬짬이 다녀왔다. 30일은 비가 왔고, 31일은 날이 맑았다.



태그:#논골담길, #묵호항, #묵호등대, #감추해변, #한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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