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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목요일

Nickerson, KS - Larned, KS
58.5mile = 93.6km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오전 6시, 잔(Jan) 아주머니가 집 안에 들어섰다. 마지막까지 나를 배웅하려는 마음 씀씀이다. 더워지기 전에 레스토랑 페인트 작업을 마쳐야 하는 그녀와 빠른 출발을 원했던 내 이해 관계가 딱 맞아떨어졌다. 니커슨(Nickerson)에 도착하자 비닐봉지 하나를 내미는 아주머니. 커다란 김 봉투 2개, 두유 2캔, 체리 한 봉지. 속으로 무릎을 탁 치고야 말았다. 아! 이게 바로 사람 사이의 정이구나. 소박하지만 정성이 한아름 가득한 선물 꾸러미.

"떠나기 전에 준 글래던(June Gladden) 아주머니에게 전화 드려야겠어요."

떠나기 직전, 아주머니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왼쪽부터 준 글레든, 나, 짐 글레든
▲ 착한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왼쪽부터 준 글레든, 나, 짐 글레든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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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던 부부는 전화를 받고 당장 내게 달려왔다. 이틀 동안 여행자를 보살펴 준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준(June) 아주머니는 깊은 포옹을 해주며 오리건 주까지 안전한 여행을 기원해줬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떠나갔다.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다시 잔(Jan)과 매트(Matt)에게 시선을 옮겼다. 작별만이 남은 상황.

아주머니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순간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야무지고 당차던 그녀가 이 순간만큼은 마음 여린 소녀일 뿐이었다. 

"에이, 왜 울어요?"
"떠난다니까 아쉽잖어."

내 가슴도 먹먹해진다. 만남은 항시 미래의 이별을 내포한다. 특히 여행은 수없는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다. 철없는 방랑객이 또 한 명의 가슴에 아쉬움만을 남기고 떠나간다.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렸다. 골목길로 꺾고 나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자전거를 세웠다. 가쁜 숨을 내쉬며 배낭을 어깨에서 풀었다. 가방 속에 든 선물봉지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레스토랑 대박 나길 빌어요. 아주머니!'

더위를 이기며 부지런히 20마일 정도 갔을 무렵. 세 명의 라이더가 교회 옆에서 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가족이다. 아버지 존 스나이더(John Snyder)와 두 딸 트레이시(Tracy)·니키(Nikki)가 한 팀을 이뤄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얘네들 엄마가 한국인이라네."

어머니 줄리(Julie)는 한국 태생으로 14세 당시 이민을 왔다. 가족을 위해 지원 차량을 모는 역할을 맡았다. 이쪽으로 오던 길에 차량이 말썽을 일으켜 가족과의 합류가 이틀 뒤로 미뤄졌다.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다가 묘하게 페이스가 맞아떨어져 엉겁결에 그들과 합류한다. 누군가와 같이 달린다는 느낌. 아, 이런 느낌이었구나.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던 영화 <친구>의 카피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내가 쉬면 그들은 달리고 그들이 쉴 때는 내가 달린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마의 58마일 구간을 통과했다.

패키지 라이더와의 조우... 한국인의 힘을 보여주마

미국을 가로지르는 세 명의 가족 라이더. 보스톤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이렇게 가족 라이딩이 시작되었다.
▲ 부녀는 용감했다 미국을 가로지르는 세 명의 가족 라이더. 보스톤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이렇게 가족 라이딩이 시작되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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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길이 갈렸다. 일체 캠핑장비를 구비하지 않은 이들 부녀는 모텔을 찾아 들어갔고 다시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애초 목적지는 30마일 떨어진 러쉬센터(Rushcenter)였지만 지금은 온도가 최고조로 달아오른 한낮. 화씨 108도. 여행자는 또 다시 갈등에 휩싸인다.

근처를 서성거리다 ACA 패키지 여행 참가자 한 명을 만나게 됐다. 네덜란드에서 온 우발드 크락튼(Ubald Kragten) 아저씨. 근처 교회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여행자 한 명쯤 더 와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굉장히 솔깃한데.

투어링 사이클리스트(Touring cyclist)라는 직함을 가진 리더 폴 오시카(Paul Osika)가 날 맞이해줬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 오후 6시부터 시작된 저녁식사부터 환상적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콜드 수프, 토마토 주스에 이것저것 채소를 섞어 믹서에 갈아 만든다. 직접 구운 빵에다가 참치 스튜까지... 땅콩버터 바른 식빵 하나에 감지덕지하던 내가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는다.

이들이 참가한 가이드 투어(Guided tour)는 자전거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배낭여행 패키지다. 자전거와 용품을 제외하고 여행 일정에 소요되는 모든 제반 사항을 지원한다. 가격은 7200달러. 82일간의 일정 동안 하루 세끼 식사, 간식, 차량 지원, 관광, 숙박 등이 제공된다. 일정에 얽매이는 게 싫은 데다 목돈이 부족한 젊은이들은 패키지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허나 불확실성과 위험은 줄이면서 여행을 즐기려는 50~60대들의 호응은 꽤 높은 편.

잠시 후 참가자들이 모두 모여 리더와 함께 일정에 대한 토의를 한다.

"내일은 30마일까지는 아무런 서비스가 없어요. 러쉬센터(Rushcenter)에 레스토랑이 있는데 거기서 아침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네코마(Nekoma)-알렉산더(alexander)를 지나 네스 시티(Ness city)까지 65마일입니다."

회의를 한쪽에서 지켜보며 나 또한 일정을 가다듬었다. 캔자스의 살인적인 더위를 예상 못 한 내게 이들의 라이딩 요령은 참고할만하다. 새벽에 득달같이 일어나 낮 12시 전까지 60~70마일을 주파해야 한다. 자, 내일은 ACA 패키지 팀과 함께 달린다. 한국인의 힘을 보여주마.

6월 29일 금

Larned, KS - Ness city, KS
64mile = 102.4km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이 삐걱 열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어딘가로 향한다. ACA 패키지 참가자들이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대단한 자기 관리다.

그 누구도 출발시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한낮까지 늘어지게 자도 상관없다. 그날 정해둔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땡이다.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그 누구도 뒤처지려 하지 않는다.

유일한 20대인 나만 뒤처졌다. 오전 6시 알람에 맞춰 일어났지만, 모두 떠나버렸다. 홀로 남겨진 공간은 적막하다. 교회 안에는 뒷정리를 하고 있는 매니저만 눈에 띄었다. 지원 차량을 모는 역할인지라 그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새벽녘 하늘에 낀 구름은 아침 햇살을 봉쇄한다. 상쾌한 공기. 이대로 있어주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겠지.

그거 아세요? 고통과 쾌락은 비례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찬란한 헬레니즘 제국이 급격히 무너졌듯이, 이 곳 알렉산더도 예전의 활기를 잃어버린 황폐한 시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 알렉산더(Alexander)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찬란한 헬레니즘 제국이 급격히 무너졌듯이, 이 곳 알렉산더도 예전의 활기를 잃어버린 황폐한 시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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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픈 배를 움켜쥐면서 40마일을 갔더니 알렉산더(Alexander)가 나왔다. 인구 75명의 꼬마 마을이다. 휴게소 벽면에 마을의 옛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고등학교의 전경이 펼쳐진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말을 타고 웅덩이를 지나는 사나이. 사람 사는 활기가 느껴진다. 이제는 덥고 황량한 캔자스의 기후만큼이나 말라버린 마을 분위기. 한국이나 미국이나 시골은 생명력을 잃고 있다.

알렉산더를 기점으로 이제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 7번 지도로 넘어간다. 현재까지 주행거리는 1888.5마일. 억겁처럼 느껴졌던 여정이 어느덧 절반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네스 시티(Ness city)까지는 이제 20마일. 얼음물 생각이 간절하다. 역설적이지만 고통과 쾌락은 비례한다. 고행이 오래될수록 해소될 때의 기쁨은 배가 된다. 화씨 105~106도를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서 라이딩이 힘겨워질수록 얼음물 한 잔은 큰 만족을 안겨줄 것이다.

예전 활기찼던 알렉산더의 거리
▲ 알렉산더(Alexander) 예전 활기찼던 알렉산더의 거리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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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라이더들이 보였다. 부자지간에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 인생에 큰 족적을 남겨보고 싶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설득해서 어렵사리 팀이 꾸려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으로 가는 길. 뒤이어 여성 라이더가 이들을 따라잡았다.

그녀는 혼자 여행하다가 며칠 전부터 이들 부자를 만나 동행 중이다. 내게는 언제쯤 이런 인연이 닿을는지... "Safe trip"을 연발하며 서로 작별인사를 나눴다. 'Ness city limit'라고 적힌 큼지막한 표지판이 오늘의 도착지를 알려준다. ACA 패키지 팀은 보이지 않는다. 찾아볼까 하다가 살갗을 스치는 뜨거운 공기를 배겨내지 못하고 근처 공원으로 피신한다. 시티 파크에는 수영장이 있다. 샤워장이 무료라 차가운 물에 온몸의 땀을 씻어냈다.

나무 그늘 밑에 텐트를 쳤지만 한낮의 더위는 휴식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웃통을 홀랑 벗었는데도 땀이 흥건히 배어 나오며 바닥을 적셨다. 에어컨 신세를 져볼까 해서 텐트를 탈출해 도서관으로 잰걸음을 걸었다. 마침 도서관에서 나오던 ACA 패키지 참가자 마이크(Mike) 아저씨와 마주쳤다.

"우리 이번에도 교회에서 잘 거야. 자네도 올 텐가?"

염치없음에도 더위에 못 이겨 졸래졸래 따라나섰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냉기. 온몸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이게 바로 천국일까. 추워서 침낭을 꺼내야 할 정도의 쾌적함, 나는 기쁨에 떨었다. 복도를 따라 즐비한 방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는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신세도 지는 거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 두려워했던 나

지평선 너머로 동이 터오고 있다. 부지런해야 선선한 온도에서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 태양을 쏴라 지평선 너머로 동이 터오고 있다. 부지런해야 선선한 온도에서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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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토

Ness city, KS - Tribune, KS
101.5 miles = 162.4 km

오전 5시에 맞춰둔 알람 소리가 요란하다. 분주하게 잠자리를 수습하는 모습들이 한결같다. 아직은 해가 고개를 내밀기 전, 공기는 상쾌하다.

30마일을 달려 도착한 다이튼(Dighton). 전광판에 나타난 온도는 화씨 82도. 라이딩에는 최적의 온도다. 길가 편의점에서 물을 마시는 ACA 패키지 참가자들도 만족스러운 낯빛을 보였다.

"날씨 괜찮네. 어때? 달릴만하지?"

부상을 딛고 재 참가를 결정한 마이크 브라운(Mike brown) 아저씨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몸 상태는 괜찮아 보인다. 일주일 전 아저씨는 지나가는 트럭을 피하다 바닥이 패인 도로에서 중심을 잃었다. 그 상태로 한 바퀴 구르고는 정신을 잃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 큰 골절 없이 쇄골에 실금만 간 지라 운동에 지장이 없겠다는 의사의 희망적인 답변. 며칠 후 그는 다시 라이딩에 참가했다.

총 80마일을 달려 레오티(Leoti)에 도착. 출발이 이르다 보니 해는 아직 중천이다. 예상대로 ACA 패키지 팀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더위를 피해 숙소로 쏜살같이 들어간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나. 남쪽 하늘에 솟아오른 태양이 속삭인다. 시간은 충분하니 더 가보란다. 대낮인데 그날 여행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생각을 정리하며 물을 마시다 멕시코인 가족을 만났다. 이것저것 물으며 관심을 가지는 그들을 보니 슬그머니 딴생각이 든다. 나에 대한 호감을 믿고 불쑥 말을 던졌다.

"괜찮다면 텐트 칠 마당 좀 빌려줄래요?"

'호세'라는 청년은 흔쾌히 수락하며 집 위치와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

"이 방향으로 서너 블록 가면 철도가 나와. 넘어서 두 블록만 더 가면 D스트리트가 나올 거야. 큰 나무가 있는 집이야. 주소는 202. 난 텃밭에서 일해야 하니까 먼저 가 있어."

한껏 달아오른 더위를 무릅쓰고 그 장소로 가봤지만 아리송해 알 수가 없다. 받아뒀던 연락처로 통화를 시도했다. 자동녹음된 기계음이 딱딱하게 울려 퍼졌다. "out of service."(통화 불능) 제길, 낚인 건가.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다 유발드(Ubald) 아저씨와 마주쳤다.

"성규. 아직도 여기 있었네. 아까 선선할 때 더 가보지! 어제보다 안 힘들잖아."

갈(喝)! 난 깨달았다. 내 여행에 중요한 '원칙'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충격이었다. 과연 나는 내 의지로 길을 밟아왔던가? 그 어느 것도 내 뜻이 아니었다. 남의 눈치를 보며 목적지를 정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 두려웠던가. 에어컨 빵빵한 교회가 그렇게 탐이 나던가. 그들의 화려한 식사에 군침이 넘어가던가. ACA 패키지 여행자들의 일정에 나를 끼워 맞출 필요는 없었다.

남에게 내 결정을 맡기지 마라.

찜통더위가 시작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22마일 떨어진 트리뷴(Tribune)으로 페달을 밟았다. 간간이 승용차들이 지나갈 뿐 자전거 라이더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밖을 돌아다니기에는 가장 더운 시간대.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지만 나만의 의지로 달려보고 싶었다.

내 의지로 도달한 마을. 트리뷴(Tribune)은 고대 로마의 호민관, 민중의 지도자를 뜻한다.
▲ 트리뷴(Tribune) 내 의지로 도달한 마을. 트리뷴(Tribune)은 고대 로마의 호민관, 민중의 지도자를 뜻한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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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마일을 앞두고 위치토(Wichita) 카운티에서 그릴리(Greeley) 카운티로 넘어간다. 동시에 시간대가 바뀌어 1시간이 덤으로 주어졌다. 새롭게 맘을 다 잡는 순간에 주어진 일종의 포상. 자, 얼마 남지 않았다. 김동리의 <역마>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성기처럼 나는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페달을 밟았다. 가자. 가보자. 가보자꾸나.


태그:#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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