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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화요일
Buhler, KS - Nickerson, KS
15mile = 24km

캔자스의 살인적인 더위를 피하려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돼야 한다.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세면을 위해 근처 고등학교 체육관을 찾았다. 예상치 못한 인파가 우글거렸다. 운동부원들이 아침 훈련에 열심이다.

지난 밤 뒷마당을 흔쾌히 내줬던 돈 크렙(Don Krebs) 아저씨도 벌써 밖에 나와 있다. 떠나기 전 인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새벽 공기는 상쾌하다. 어스름한 물안개와 갓 떠오르는 태양빛이 최적의 상태를 조성해준다. 허나 꿈결 같은 감상은 곧 깨진다. 작열하는 햇빛이 움직이는 모든 것을 바싹 말려 버릴 기세다.

뵐러(Buhler)에서 니커슨(Nickerson)까지는 15마일. 그다음 란드(Larned)까지 58마일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니커슨(Nickerson)에 도착해 중간 급유를 시작했다. 음식거리보다도 물이 절실하다. 탈수를 막기 위해 1갤런짜리 물통 하나를 치켜들었다.

"Are you Korean?"(한국인이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동양인 아주머니가 손에 쇼핑바구니를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한국인이에요."
"어머. 코리안 맞구나. 마이 네임. 내 이름은 말이야. 잔이야. 잔."

잔 비버(Jan Beaver). 한국 이름은 남정옥. 부산 출생으로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오게 됐단다. 허친슨(Hutchinson)에 사는 그녀는 10마일 떨어진 이 곳 니커슨(Nickerson)에 레스토랑을 오픈할 계획이라고. 기존 레스토랑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다며 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다.

근처 하얀색 건물이 그녀의 꿈을 이뤄줄 삶의 터전이다. 요즘 내부 인테리어 단장과 페인트칠 덕분에 왕래가 잦은데 뜻밖에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게 된 것.

"여행하다 보면 김치 되게 먹고 싶었을 거 아니야. 유, 너가 원하면 김치랑 라이스, 밥 갖다줄 수 있어. 말만 해. 그럼 내가 드라이브, 운전해서 갖다 줄게."

귀가 솔깃하지만 갈등이 생긴다. 먹을 거 다 먹으면서 여유 부리기에는 58마일의 거리가 만만치 않다. 아예 푹 눌러앉아 쉬면 모를까. 대답을 보류한 채 밖으로 나갔다. 약속이나 한 듯이 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췄다. 인상 좋은 아주머니 한 분이 내리더니 내게 물었다.

"너 자전거 여행자니?"

연이은 만남에 약간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인적인 더위, 유혹에 흔들렸다

짐 글레든 아저씨와 드라이브 가는 길에 캔자스의 무더위를 실감했다.
▲ 한낮의 살인적인 더위 짐 글레든 아저씨와 드라이브 가는 길에 캔자스의 무더위를 실감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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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면 우리 집에서 쉬었다 가. 아예 하룻밤 자고 가도 돼."

이건 또 무슨 말? 오전부터 행운의 여신이 양쪽 어깨에 강림하신 듯하다. 마침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에 못 이겨 그 제안을 덥석 잡아버린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좀 쉬어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하루 이틀 쉬어보세.

나를 초대한 준 글레든(June gladden) 아주머니와 짐 글레든(Jim gladden) 아저씨는 교사로 활동하다가 12년 전 은퇴했다. 이 부부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니커슨에 온 외국학생들에게 홈스테이를 무수히 제공했다. 자전거 라이더에 대한 친절은 그러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벽에는 수십 개의 액자가 걸려있다. 홈스테이로 머물렀던 학생들의 사진이다. 공간이 모자라 미처 걸지 못한 사진들도 많다고 한다.

사람들을 만나며 이들은 '세상이 좁다'라는 진리를 몸소 겪었다. 각기 다른 시기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멕시코 남녀가 그 주인공이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멕시코 몬테레이(Monterrey)로 돌아간 남학생은 어느 날 친구와 함께 해변에 놀러 갔다. 거기서 만난 두 명의 여학생. 스스럼없는 젊음이라 금방 친해졌다.

"나 미국에서 홈스테이한 적 있는데."
"그래? 나도 그랬는데."
"난 캔자스 주 니커슨에 있었어."
"뭐? 말도 안 돼. 나도 니커슨이었는데."
"혹시 준(June) 아주머니?"

좁디좁은 세상이다. 언제 어디서 기막힌 인연을 만날지 모른다. 항시 언행을 조심할 일이다. 풍성한 이야기만큼 식사 또한 푸짐하다. 샤워에 세탁 그리고 에어컨이 완비된 독방까지. 나로서는 트리플A를 달성하는 순간이다.

글레든 부부가 소유한 호숫가에서 파티가 열렸다. 손자의 생일에 많은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이국의 청년도 엉겁결에 포식을 했다.
▲ 햄버거 파티 글레든 부부가 소유한 호숫가에서 파티가 열렸다. 손자의 생일에 많은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이국의 청년도 엉겁결에 포식을 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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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해주셔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성규야. 우리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태평양에 발을 적시면서 우리를 잊지 말아줘. 몸 건강히 여행을 마쳤다는 연락 정도면 돼. 그리고 한 가지 더. 너가 받은 만큼 남들에게도 해주길 바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조건이나 사심 없는 베풂. 아가페(Agape).

6월 27일
Hutchinson, KS

아는 이 하나 없는 미국에서 약속이 잡혔다. 실상은 이렇다. 어제 날 만난 직후 잔(Jan) 아주머니는 딸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가 있다고. 따님은 대접하려는 맘을 먹었지만 난 이미 준(June) 아주머니 댁에 숙소를 정해 버린 뒤였다.

나그네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딸의 고집은 다음날 약속으로 이어졌다. 꼼짝없이 하루를 더 머물게 생겼다. 준 아주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가게에 나와 있던 잔(Jan Beaver·한국 이름 남정옥) 아주머니와 매트(Matt) 아저씨가 나를 맞는다. 우리는 함께 허친슨(Hutchinson)에 사는 딸네 집으로 향했다. 도중에 차 경매시장에 들른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

딜러 자격증이 있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지역 자동차 경매시장. 이들은 딜러인 친구의 연줄로 들어올 수 있었다. 중고차 시장이긴 해도 갓 뽑은 새 차가 이따금 들어온다. 적게는 300달러에서부터 만 달러를 넘는 차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레스토랑 운영에 필요한 차를 구입하기 위해 아주머니는 트럭을 살핀다. 운전자들이 하나 둘 차를 끌고 경매 부스 앞에 서자 중개인들의 입담이 점점 빨라진다.

"쉐비(Chevrolet의 약칭) 2001년 형. 자! 2000부터 시작합니다. 2200달러. 네. 2300. 2350. 더 없습니까? 네. 2500."

고개도 함부로 끄덕일 수 없는 경매장

1973년 형 군청색 콜벳(Corvette)을 관심있게 들여다보는 잔(Jan) 아주머니.
▲ 지역 자동차 경매 시장 1973년 형 군청색 콜벳(Corvette)을 관심있게 들여다보는 잔(Jan) 아주머니.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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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살짝 끄덕이거나 손짓만 해도 입찰을 희망한다는 표시로 간주한다. 나 같은 초짜가 어설프게 얼쩡거렸다가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손짓 발짓을 최대한 자제하며 주변을 배회했다. 마침 스포츠 카 한 대가 맵시를 뽐내며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군청색 콜벳(Corvette) 1973년 형(型). 아주머니가 눈을 반짝인다. 1967년형 오렌지색 콜벳을 최고로 치는 그녀로서는 관심이 갈 만하다.

검은색 픽업트럭을 점찍었지만, 막상 경매에 들어가니 가격이 생각보다 올라버렸다. 잔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음 차를 기다린다. 하얀색 쉐보레 트럭이 매물로 나왔다. 매트는 중개인에게 손짓을 보낸다.

"2100!"

더 부르는 사람이 없다. 당연히 입찰이다. 중개인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쟁이 없어도 소유자가 원하는 가격이 아니면 판매는 이뤄지지 않는다. 실소유자가 원하는 가격은 2500. 아주머니는 단호하다.

"매트, 2200 이상은 주면 안 돼."

잠시 망설이던 주인이 2250으로 가격을 하향 조정하지만 매트와 잔의 뚝심에 결국 2200으로 낙찰. 2200달러에다 수수료 150을 더하면 2350달러다.

차체 아랫부분이 조금 녹슬었지만 타이어가 짱짱하다. 잔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타이어만 팔아도 800달러의 값어치가 나온다. 차 외양을 조금만 손보면 3500달러 이상을 받고 일반인에게 넘길 수 있다는 계산. 실컷 쓰고 나중에 팔아도 본전 이상은 충분히 건진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 2만~3만 달러의 자본금만 있다면 중고차 10대를 구입해 두 배 정도는 비싸게 팔 수 있다. 수익률 100%. 아주머니는 900달러에 구입한 뷰익(Buick)을 대학생들에게 1500에 팔기도 했다. 고객 입장에서는 중고차 딜러와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 300~400달러가 저렴하니 놓칠 수 없다. 판로 걱정 없는 안정된 시장.

원하던 차를 얻어 한숨 돌린 그들과 함께 딸네 집으로 향한다. 동양인과 미국인의 외모를 절반씩 물려받은 여성이 나를 맞이해줬다. 옥님 라마냐(Oaknim Lamagna). 한국인의 정체성을 느끼려고 스스로 원했던 이름이란다.

집 안에는 사람과 동물이 한데 엉켜 정신이 없다. 9살 딸 릴리아나(Lilliana), 6살 아들 리바이어던(Leviathan), 2살배기 딸 제트 리(Jet Lee), 10개월 된 티잔(Tijan)까지 네 자녀가 집안을 운동장삼아 놀고 있었다. 그 곁을 다섯 마리의 개가 돌아다니고 있다.

9세 때부터 채식한 사람의 고기 요리

왼쪽부터 옥님 라마냐(Oaknim Lamagna), 딸 릴리아나(Lilliana), 나
▲ 따뜻한 사람들 왼쪽부터 옥님 라마냐(Oaknim Lamagna), 딸 릴리아나(Lilliana),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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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주인의 남다른 뚝심이 작용했다. 동물을 사랑하는 옥님은 길을 가다 유기견들을 보면 맘이 아파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하나 둘 집으로 데려오다 보니 어느덧 동물천국이 돼버렸다. 손님들까지 가세해 더욱 정신없어진 북새통. 그 와중에도 옥님은 요리에 여념이 없다.

"내 딸이 코리아, 한국 요리를 굉장히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나한테 다 배워갔거든. 나보다 더 잘할지도 몰라."

두부 볶음, 콩나물 무침, 오이소박이, 무김치, 불고기 백반, 오뎅 조림 등등. 한국음식이 정갈하게 펼쳐진다. 놀랍게도 그녀는 음식의 간을 전혀 보지 않았다. 잔 아주머니의 설명이 뒤따른다.

"어렸을 때 말이야. 그러니까 언제더라? 맞아! 릴리아나가 지금 9살이거든. 옥님이 그 나이 때 동물 학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어. 충격을 받았다는 거야. 나한테 이랬어.

'엄마. 나 이제부터 채식할 거야.'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놔뒀지. 며칠 가다 말겠지 생각했던 거야. 근데 쟤가 독한 게 있더라. 지금까지 고기를 안 먹어. 근데 우리가 오면 고기 반찬은 해줘. 자기는 채식하니까 먹지는 못하잖아. 그래서 간을 안 보는 거야."

간도 보지 않은 음식의 맛은 그야말로 훌륭하다. 한국인의 피는 속일 수 없다. 워낙 맛이 좋아 체면 차리지 않고 밥을 세 그릇이나 먹었다. 휴, 또 과유불급. 더부룩한 속을 애써 억누르며 괜한 식탐을 원망한다. 그러고 보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틀이나 쉬어버렸네. 허허, 이거 참.


태그:#미국, #자전거,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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