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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토끼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헝가리 태생의 철학자 루카스가 비유한 '히말라야의 토끼'를 만났다. 제25회 율곡문화제가 시작된 지난 13일 오전 찾은 자운서원 한 편, 율곡고등학교 정예슬(3학년) 양의 서각작품 '토끼와 코끼리'는 단번에 눈길을 붙잡았다.

 

파주시 법원리에 위치한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 부부와 부모님 묘, 율곡기념관 등 선생의 뜻을 기리는 곳이다. 율곡 선생의 기상을 이어받았는지 이날 만난 율곡고 학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이들은 공부하는 틈틈이 <새김소리> 동아리 활동을 통해 정성스레 만든 서각작품을 이번 문화제에서 선보여 인기를 모았다.

 

작품에서는 대학입시 점수 때문에 시름이 깊더라도 반드시 열정과 웃음, 행복을 가슴에 품겠다는 청춘의 굳은 다짐이 묻어났다. 율곡고 <새김소리> 학생들이 전시한 서각작품을 전부 공개한다.

 

11월 8일은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다. 전국의 수험생에게 아홉 차례 치른 과거에서 모두 장원 급제를 했던 율곡 선생의 기운을 전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고 학생들이 들려주는 동병상련의 응원 소리를 전한다. 잠시 삶의 쉼표를 찍는다는 마음으로 행복을 새겨보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새긴 작품이다. 비록 머리가 깨지고 옆구리가 터져 볼품없지만, 지난 겨울 온돌과 난로를 지피려 온 몸을 불살랐던 연탄재를 돌아본다. 뜨거운 청춘, 지금 공부 못 한다고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

 

타오르는 게 어디 붉은 노을뿐이랴.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뿐이야." 청춘의 심장, 연인 생각에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며 더욱 시뻘겋게 타오른다.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해인 수녀의 '해바라기 연가' 시구처럼 청춘이여, 뜨겁게 불타는 열정은 결코 식지 않는 불치의 병이 되어도 좋다.

 

나는 누구인가. 청춘의 고뇌는 그 끝도 깊이도 알 수 없다. '날 알라'는 외침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원초적 질문이다. 청춘이여, 네 자신을 알라.

 

걸음마부터 많은 준비를 끝낸 수험생은 곧 대학과 사회로 발을 내딛을 것이다.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입시에 찌든 청춘이여, 가고 싶은 곳으로 걷고 싶은만큼 크게 걸으라.

 

하루가 행복했다는 걸까. 행복한 하루를 원하는 걸까. 불신지옥이 아니라 입시지옥을 견뎌내느라 매일매일이 고단하겠지만 청춘이여, 하루의 행복이 모이면 삶은 끝내 풍성해질 것이다.

 

웃으면 행복해진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나 실천하지 못하는 평범한 진리.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하늘을 보며 맘껏 웃어보자. 그래도 세상이 맘에 안 들거든 청춘이여, 크게 세상을 비웃어도 좋다. 비웃은 만큼 세상을 바꾸면 되니까.

 

아파트 503호, 24번, 짝3호… 가족의 이름도 나의 이름도 점점 기호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가족의 이름을 새기며 살아가는 정을 돌아보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청춘이여, 진로와 연애 문제 등으로 부모와 갈등이 있다면 훌훌 털어 보자.

 

일상에 지친 어른들은 때때로 10대 시절이 가장 그립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땐 그것을 절대로 알지 못한다. 뜨거운 가슴과 사랑에 대한 폭풍 같은 열정을 지닌 청춘이여, 행복한 기억을 많이 쌓아두시라.

 

이 가을을 지나 겨울을 벗어나면 언제나 그렇듯 꽃피는 봄은 온다. 봄에 꽃을 잘 피우면 남은 인생의 계절도 아름답게 지날 수 있다. 꽃다운 나이 봄의 절정으로 치닫는 청춘이여, 자신만의 꽃을 피워 세상을 향기롭게 해 다오.

 

<새김소리> 동아리를 지도하고 있는 박병헌(한문) 선생님은 "2004년부터 시작된 동아리는 현재 1~3학년 2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며 "수업 이후 시간과 방학을 이용해 한 작품을 기획하고 마무리하는 데까지는 평균 2달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박 선생님은 이어 "집중력과 인내심을 기르며 시험 성적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무엇보다 작품 완성을 통해 성취감을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새김소리> 활동을 평가했다.

 

성적에 목을 매는 고등학생의 입장에서 작품 당 두 달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하지만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욱 많은 시간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학생들은 열정과 웃음, 행복이라는 글을 새기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흐뭇함과 따뜻함은 바로 이들의 마음에서 전해졌을 것이다. 

 

루카치는 지식인에게 과대망상을 경고하라는 의미에서 '히말라야 토끼'를 예로 들었다. 히말라야의 높은 곳에 사는 토끼가 산 아래 조그맣게 보이는 코끼리가 자기보다 작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청춘을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도 그럴 듯싶다. '입시지옥, 사랑의 열병… 다 겪어봐서 안다. 힘들다는 거. 그렇지만 다 이겨내게 돼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는. 그러나 너무 쉽게 속단하지는 말자.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청춘의 특권일 수 있으니까. 청춘을 나무라는 어른들은 쳇바퀴 속에 갇혀, 그때 그 시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열정을 부러워 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 미소를 띠게 만드는 청춘의 웃음이 있다. 오늘만큼은 함께 크게 웃어보자.

 


태그:#서각, #율곡고등학교, #새김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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