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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든 한글은 과학적으로 가장 완벽한 글자라는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적인 평가와는 달리 생활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한글은 못내 괴로울 것만 같다.

실제 누리집과 일상생활 속에서는 멘붕, 시월드, ㅂ2ㅂ2 등 뜻 모를 단어들이 넘쳐난다. '멘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진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멘붕은 어떤 황당한 일을 겪거나 말문이 막히는 등의 상황에서 쓰는 말로, '정신이 무너진다'는 뜻의 '멘탈 붕괴'라는 신조어를 줄인 말이다. '멘탈 붕괴'만도 기가 막힌데 게다가 멘붕이란다. 시댁의 세계를 뜻하는 '시월드', 안녕(바이 바이)이라는 뜻의 'ㅂ2ㅂ2' 등의 단어들은 또 어떤가.

그뿐이 아니다. 한글을 파괴하는 예는 무수하게 많다. 더욱이 문제는 바른 말, 고운 말을 써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언론과 공공기관이 앞장서 한글을 얼룩지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이버 '박근혜 멘붕' 검색 화면 갈무리
 네이버 '박근혜 멘붕' 검색 화면 갈무리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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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이라는 단어, 일본의 성인비디오물에서 유래"

누리꾼들이 재미삼아 또는 별 생각 없이 만들어낸 멘붕이라는 단어의 위력을 보자.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마저 이 정체불명의 단어를 남발하고 있다.

박근혜가 최근 겪은 '멘붕'… "자식 없는데 자식 있다고…" <조선일보> 2012.08.05.
조갑제 "박근혜 양심 버렸다" 비난… 보수층 '멘붕' <한겨레> 2012.09.24.
미 골프다이제스트, 라운드 중 '멘붕' 대처법 소개 <한국경제> 2012.10.04.
리키김 뽀뽀 당혹, 김혜선 기습 키스에 '멘붕' <스포츠동아> 2012.10.08.

국내의 한 웹툰(인터넷 만화) 작가는 "멘붕이라는 단어는 원래 일본의 성인비디오물에서 자주 쓰였던 것인데, 이를 국내 웹툰에 자주 사용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며 죄송한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아무튼, 유래도 께름칙한 멘붕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쓰는 건 한글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냥 정신 붕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한편,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공공기관의 '한글 뒷전으로 미루기'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b KB국민은행', 'NH농협', 'IBK기업은행', 'KOREA POST', 'Hi Seoul!', 'Dynamic Busan!', 주민센터, 치안센터 등. 정부와 지자체, 은행, 우체국 등 공공업무를 돕는 기관들은 한결같이 영어에 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기업과 단체의 정체성을 독창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b'와 같은 기호문자를 케이비(KB)로 읽어달라는 건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리고 '국민은행KB'면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KB국민은행'은 뭔가. 영어 표기가 앞서는 것은 NH농협, IBK기업은행 등 다른 은행들도 마찬가지다. <오마이뉴스>도 공식 제호로 'Ohmynews' 영문 표기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결국 NH, IBK, KBS 등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어의 머리글자만 남게 될는지도 모른다. 외국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다면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이지 지나치다.

자치단체의 영어 편애 현상도 여전하다. 그동안 몇 차례 지적했음에도 자치단체를 수식하는 홍보문구나 명칭은 대개가 'Hi Seoul!', 'Dynamic Busan!'과 같은 영어 일색이다. 국제도시로서 위상을 뽐내려면 오히려 '안녕, 서울!', '활력 있는 부산!'처럼 한글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농협은 언제부터인가 'NH'로 이름이 바뀌었다. 365 Auto Bank, 농협은 누구를 위한 곳일까?
 농협은 언제부터인가 'NH'로 이름이 바뀌었다. 365 Auto Bank, 농협은 누구를 위한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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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POST. 우체국도 슬그머니 영문 이름 대열에 동참했다. 조만간 영어로 업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KOREA POST. 우체국도 슬그머니 영문 이름 대열에 동참했다. 조만간 영어로 업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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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기본법 "국어 사용 촉진하고 발전과 보전 기반 마련"

몇 차례 개정을 통해 지난 2012년 8월 24일 시행된 <국어기본법>을 보면 제2조 '기본 이념'은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국가와 국민은 국어가 민족 제일의 문화유산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임을 깊이 인식하여 국어 발전에 적극적으로 힘씀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계승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한편 제4조(국가와 지방자차단체의 책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①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변화하는 언어 사용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과 지역어 보전 등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국어기본법은 제1조에서 "이 법은 국어 사용을 촉진하고 국어의 발전과 보전의 기반을 마련하여 국민의 창조적 사고력의 증진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하고 민족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법으로써 국어와 한글을 잘 보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국어기본법에 어긋나는 사례는 여럿이다. 정부와 공공기관 등을 포함해 좀 더 엄격한 국어기본법의 적용이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한국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KBS 홈페이지에서도 언제부터인가 '한국방송공사'라는 한글 명칭은 사라지고 KBS만 남아 있다.
 한국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KBS 홈페이지에서도 언제부터인가 '한국방송공사'라는 한글 명칭은 사라지고 KBS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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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중국어 표준화 작업을 비롯해 외래어 또는 신조어 사용 금지 정책은 참고할 만하다.

지난 9월 중순, 중국 랴오닝(요령)성 진저우(금주)시 자택에서 만난 야오샤오보(59) 보하이대학교 한어과 교수는 "중국에서는 외래어나 신조어를 사용하기 전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며 "심사 없이 외래어 등을 무단으로 사용하면 법에 의해 처벌받는다"고 말했다. 야오 교수는 중국어문학계의 권위자로서 현재 중국어 표준화 작업 위원과 랴오닝성 어언학회부위원장을 함께 맡고 있다.

야오 교수는 "중국의 표준어는 베이징(북경) 음을 바탕으로 동북 3성 시민들이 쓰는 말이라고 중국의 교과서에 규정돼 있다"며 "중국은 50여개가 넘는 다양한 부족과 대표적인 방언만도 7가지가 넘기 때문에 중국 대륙 전 지역에 표준어를 보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실제 중국은 다국적기업의 대표 격인 코카콜라, 케이에프씨(KFC) 등 고유한 기업의 상표와 상호를 중국어로 표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조그맣게 영문 표기를 허용하고 있다. 지난 9월 직접 둘러본 랴오닝(요령)성의 거리에서도 한자 표기는 눈에 띄었다. 정부 기관과 기업, 음식점 등의 간판은 모두 한자로 쓰였다. 간혹 영문 표기가 작게 병행된 것도 있었지만, 간자체로 된 중국어 간판은 어디를 둘러봐도 '여기는 중국'이라고 말해주었다.

외국인이 거의 없는 소도시라 그런 줄 알았는데, 야오 교수의 말을 듣고 보니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외국어 표기를 얼마나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에서 본 버스. 국제박람회 홍보 문구에 정말 필요한 만큼의 영어 표기만 있다. 중국은 공식 한자 표기 외 외래어나 신조어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에서 본 버스. 국제박람회 홍보 문구에 정말 필요한 만큼의 영어 표기만 있다. 중국은 공식 한자 표기 외 외래어나 신조어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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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 영어·스페인어·중국어만 존재? 한글은?

지난 1월 16일, 영국 방송 BBC는 미래학자 이안 피어슨과 패트릭 터커의 조언을 받아 2112년까지 일어날 스무 가지 일들을 예측 보도했다. 그 중 주목할 부분은 언어다. 100년 후에는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만 존재한다는 것.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하지만 한글이 빠져서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나부터 한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자.

혹, 이 글을 '스마트폰'에 '다운로드'한 '어플'을 이용해 읽고 있는 건 아닌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리트윗'하고 '펌질'하고 '팔로잉'하고 '인증샷'도 찍고…. 방송과 언론을 통해 '힐링캠프', '문재인캠프', '미래비전', '대권플랜', '패러다임', '시스템', '마인드', '터닝 포인트' 등 영어의 폭격을 받고 있지는 않는가?

이미 영어의 폭풍 습격은 막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하에 계신 성군 세종대왕이 통곡하시지 않게끔 '스마트' 대신 '똑똑하게' 모두가 한글을 제대로 가꿔 사용하기를 바라본다.


태그:#한글날, #한글,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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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사람들이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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