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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 경기도교육감.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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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계절에 '가해학생 학교생활기록부(이하 학생부)기재'를 둘러싸고 대한민국 교육계의 마음이 천근만근입니다. 학생부 기재를 강제하는 교과부 지침에 대해, 이 문제는 국민의 기본권에 관련된 엄중한 사안이므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만이라도 당장 대입에 반영되는 기재만은 보류하자는 저의 제안이 교육자치의 근간을 흔들 만큼 교과부의 '감정적 대응'을 초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학교폭력 대책을 요구하는 사회의 성난 분위기에 떠밀린 교과부의 고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고민의 결과가 낳은 어처구니없는 대책을 받아들여야 하는 교육감의 고뇌 또한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해 학생과 그 부모의 처지에서는 학생부 기재가 아니라 더한 것도 요구할 수 있는 심정임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기에 학교폭력문제를 폭력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교과부의 명백한 과오를 보면서도, 이를 비판하는 것이 자칫 피해자의 아픔이나 인권을 외면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점도 고민을 깊게 했습니다.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 절대 안됩니다

그렇지만 끝내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육계가 교육을 포기한 자리에 남은 처벌과 응징으로 과연 학교 폭력이 사라질 것인가, 모든 사소한 잘못조차 학교와 담임선생님에 의해 '범죄'와 '전과'로 취급받으면서 배제와 격리의 차가운 얼굴로 외면당한 아이들이 과연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성숙하게 자라날 수 있을까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학교 현장에서 학부모끼리, 아이들끼리, 학교와 학부모 간에, 학교와 아이들 간에, 다툼과 폭력에 따른 학생부 기재 문제를 놓고 벌어질 엄청난 불신과 혼란, 그리고 불을 보듯 뻔하게 빈번해질 법정 송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대책이 몰고 올 교육공공성과 학교공동체의 파괴를 과연 누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교과부가 '미래교육공동체포럼' 을 개최하면서 교육공동체의 건강한 소통과 협력을 강조하는 모습과 이 대책을 도무지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기재 보류 방침을 밝힌 후에 점령군처럼 밀고 들어 온 교과부 '특정감사'가 벌써 두 차례 연장되면서 우리 교육청의 정상적인 교육행정이 마비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교과부 특별감사기간 동안 교육청 제 집무실에서 숙식을 하는 연속근무를 통해 이 사안 전체를 '비상'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온갖 회유와 협박을 동원한 보복성 특별감사는 어느 정도 예견한 일이었지만, 그 수법과 강도가 일제시대나 유신시대의 모습과 자꾸 겹쳐 보입니다.

교직자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정년을 눈 앞에 둔 분들은 감사관 앞에서 '당신' 운운하는 모욕적인 반말과 명령을 들어야했습니다. 또 이들은 일선학교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을 감사관실로 호출하여 징계와 형사처벌, 해직을 협박합니다. 프로파일러가 범죄자를 대하듯 온갖 여론몰이와 심리전까지 동원하는 양상을 보면서 끝내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사고하기가 저조차 버거웠습니다. 경기교육가족이 죄인이 된 것 같은 참담한 마음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경기도지역 교육단체 회원들이 지난 5일 오후 이주호 교과부장관이 참석하는 한 행사장 앞에서 '학생부 학교폭력 기재' 특정감사 중단과 장관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경기도지역 교육단체 회원들이 지난 5일 오후 이주호 교과부장관이 참석하는 한 행사장 앞에서 '학생부 학교폭력 기재' 특정감사 중단과 장관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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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을 없애고 평화롭고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일은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그러나 학교 폭력은 우리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모순이 결합된 매우 복잡다단한 문제입니다. 양극화로 인한 가족의 해체와 가정교육의 붕괴,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와 같은 정치경제적 요인, 그리고 이겨야만 살아남는 무한경쟁 교육이 나은 일종의 '괴물'입니다. 따라서 학교 폭력 대책은 당장 적용할 대책과 근본적인 대책이 서로 아귀가 맞아야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교육적 가치와 원리의 교육 자기장(敎育 磁氣場)이 작동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설령 학교폭력 조치 사항을 학생부에 기록하는 것이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일시적 효과가 크다 해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학교는 학생을 교육하는 기관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대처는 엄격해야 하나 억압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엄격함은 합의된 원칙과 학생에 대한 교육적 사랑을 전제할 수 있지만 폭력적 응징은 원칙도 사랑도 아닙니다. 폭력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이번 조치에서는 잘못에 대한 엄격한 훈계를 넘어선 억압적인 지배자의 표정만 가득합니다.

헌법이 말하는 국민에는 학생들도 포함됩니다.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면 헌법이 규정한 법률적 근거를 통해야만 한다는 것은 민주사회의 기본입니다.

아이들도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책임에도 경중이 있어야 하고, 교육적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평범한 아이들이 대다수일 학생 몇 만 명에게 매년 '가해학생', '학교폭력 전과자' 낙인을 찍어 졸업 후 5년까지 살아가게 하는 제도가 과연 문명대국에서 가능한 제도일까요? 

교육 포기한 채, 아이들 범죄자 취급... 이게 학교입니까?

스스로에게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인간적 모멸감을 넘어 취업과 대학입시에까지 치명적인 불이익으로 연결되는 이 제도가 '학교폭력' 예방과 해결에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그 아이가 느낀 어른과 사회와 학교에 대한 분노와 자포자기가 더 큰 폭력을 부르면 어떻게 할까요?

이미 처벌 받은 아이들을 학생부에 기재하는 것은 과잉처벌, 이중처벌이라는 것과, 다른 더 큰 잘못은 기록되지 않고 단순히 학교폭력만 기재되는 형평성 문제 등도 이미 충분히 제기되었습니다. 가해학생 기록이 설혹 필요하다 하더라도 경중을 구분하고, 재학 중 중간 삭제와 졸업 전 삭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공통적으로 권고하고 요청한 사안입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자료사진)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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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과 여론에 쫓긴 교과부의 성급함은 이를 간단히 무시하였고, 기본적인 법률적 검토와 과거 사례조차 살피지 못하고 급조된 대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교과부가 소년법에 따른 불법적 기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정정지침을 내리는 것과 외국 사례의 왜곡, 그리고 '인권침해 소지' 때문에 과거 정부조차 금지했던 사례들을 통해 이미 충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교폭력 학생부 기재와 관련한 국가기관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대입에 혼란을 초래하고 서로 다른 지시로 일선 학교현장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비판을 이유야 어찌되었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분야보다 활발한 소통과 상호존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교육계의 이러한 모습이 국민 앞에 어떻게 비춰질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원합니다. 필요하다면 학생부 기재 문제를 놓고 교과부장관과 저, 그리고 관련 인사들이 함께하는 TV 토론을 통해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판단을 부탁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가해학생 생활부 기재' 기록을 중단하고, 이번 주 금요일인 14일로 다가온 입시전형자료로 활용하는 것을 보류해야 합니다. 한 개인도 나쁜 습관일 줄 알면서도 고치기 어려운 것처럼, 나쁜 제도도 한 번 시행되고 나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 관성의 법칙입니다. '긍정의 변화'는 교과부장관 블로그 제목입니다.

'섬기는 정부'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입니다. 이를 위한 발전과 통합은 이 정부가 생각하는 시대정신과 시대적 요구라고 밝혔습니다. 긍정과 섬김, 그리고 통합의 대상에 우리 아이들이 포함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교직자의 양심과 신념을 모독하는 폭압적인 '특정감사'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 폭염과 태풍으로 버거웠던 여름이 지구공전을 버텨내지 못하듯, 인권도 교육도, 민주주의 정신도 담지 못한 안타까운 대책과 잘못된 행정권력 또한 인권의 시대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낡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입니다.



태그:#김상곤, #학생부 , #이주호, #학교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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