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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와 싸우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트위터에 누구든 1억 원만 빌려 달라고 호소했던 민중가요 작곡자 윤민석을 만났다. 트위터에 호소한 지 보름 만인 8월 29일 기준으로 그의 통장에 쌓인 후원금은 1억5000만 원이다. 믿기 힘든 이 결과를 앞에 두고 윤민석은 '마음을 포개 준' 수많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윤민석이 트위터에 올린 감사의 인사말
 윤민석이 트위터에 올린 감사의 인사말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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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고슴도치'로 표현했다. 이 글은 후원금 1억5000만 원을 모은 지난 보름 동안에 대한 경과 보고가 아니라, 통일운동가 윤민석이 '고슴도치' 신세가 되어 아내를 살리기 위해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게 된 그의 삶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다.

그간의 경과는 아래 두 링크를 참조.
<우린 윤민석에게 진 빚이 있잖아>
<윤민석씨에게 마음 포개 주셔서 고맙습니다>

윤민석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다. 지난 1992년, 이른바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인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산하 단체인 '애국동맹'에 가입하여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복역했다. 그때 만들었다는 노래가 바로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 이다.

김일성 충성의 노래... 그래, 윤민석이 만들었다

이 노래는 윤민석의 것이 맞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리고 그와 이야기 하는 동안 느낀) 그는 통일운동가이자 혁명가일 뿐 주체사상에 물들어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인물은 아니다. 두 곡의 제목과 가사는 '의뢰인'이 정해줬고, 윤민석은 곡을 만들었다.

윤민석은 "진정으로 통일운동을 하는 이들은 정작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을 각오를 하고 일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통일이 되었을 때 남한에서 벌인 통일운동 이력으로 북한 측의 인정을 받으려는 건 거짓 통일운동이라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살인마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던 시절, 무기가 될 수 있는 건 그 무엇이건 들고 싸워야 했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는 운동을 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제대로 된 친일청산'과 '80년 광주를 만든 살인마 군부독재 세력에 대한 심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운동을 했고 그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 당시의 결기로는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힘을 모았던 어느 세력의 요청으로 그 노래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가 바라는 혁명을 위해 '수령님'을 찬양하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수령님 찬가' 따위는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개신교도들이 혁명에 도움이 되었다면 찬송가도, 불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면 찬불가도 만들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하지만 체포된 후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그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는 군부정권의 재판정에서 그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혼자 뒤집어 썼다. 그래서 지금도 그 노래들은 그의 노래일 수밖에 없고, 그 노래를 본 사람들은 그를 '고슴도치'로 여기게 된 것이다. 가까이 하면 내가 찔리게 되는 위험한 고슴도치.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어려운 처지에 처한 이들이 십시일반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중에도, 이른바 종북주의자를 넘어 대놓고 수령님 찬양을 외치는 그에게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윤민석 역시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찔리고 아파하는 것을 많이 봤기에 스스로 고슴도치라 여기며 몸을 더 움츠렸다.

한국에서는 친일세력과 종북세력 둘 다 나쁘다고 한다. 하지만 친일세력은 욕을 들어 먹을 지 몰라도 나름 잘 산다. 독립운동 했다가 패가망신했던 이들이 "차라리 친일을 할 걸" 할 정도로 잘 산다. 하지만 종북을 하면 인생 망한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망한다. 윤민석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 갔을 때, 그의 부모는 시장에 나갔다가 썩은 배추가 날아 오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단다.

고슴도치처럼 움츠렸는데...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럼에도 윤민석은 묵묵히 통일운동을 해왔다. 통일운동을 하면 패가망신하게 될지 알면서도 그 길을 걸었다. 다른 자리 탐내지 않고, 개인의 영달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는 종북세력이 아니라 통일세력이다. 남과 북 어느쪽 편도 들지 않고 남과 북의 민중들 편에서 통일의 꿈을 노래하는 통일세력이다.

민중가요 작곡가, 통일운동가. 윤민석
 민중가요 작곡가, 통일운동가. 윤민석
ⓒ 윤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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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석은 지금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다. 하지만 처음에 함께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은 하나 둘 꿈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했다. 윤민석이 그들을 찾아 가서 혁명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윤민석이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고 비웃었다. 윤민석의 노래가 필요할 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던 이들이 더는 윤민석의 노래가 필요하지 않게 되자 노래뿐만 아니라 새 세상에 대한 꿈마저 부정했다. 윤민석은 옛 동지들이 자신을 '똥 친 막대기'로 여긴다며 씁쓸해 했다.

윤민석은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혁명을 꿈꾸고 혁명의 도구로서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들은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세상을 한 발 두 발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하지만 그와 가족의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아내 양윤경이 암에 걸린 건 결혼 전에 알았다. 그래도 윤민석은 결혼을 했다. 병 때문에 진작에 기대를 접었던 아이가 기적처럼 생겼다. 한때 행정고시를 준비했고, 결과도 좋았던 그가 그 길로 계속 갔다면 아내의 병도 잘 치료가 되었을 테고, 딸도 지금처럼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채로 지내진 않았을 거다.

그래도 그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통일된 세상에서 민중이 주인 되는 그런 꿈을 꾸며 노래를 만들었다. 그렇게 살아 온 세월의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아내는 말기 암과 다투고, 윤민석은 몇 개월째 보조침대에서 아내를 지키고 있으며, 아이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호소했다. 그가 살아 온 삶이 돈 앞에서 부정되는 걸 지켜 볼 수 없는 많은 이들이 마음을 포갰다. 그렇게 해서 모인 게 1억5000만 원이다. 자기가 고슴도치라며, 자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찔리는 걸 볼 수가 없어서 내내 움츠렸던 윤민석에게 많은 이들이 찔림 따위에는 상관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게 지난 14일 윤민석의 호소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일의 전부다.

윤민석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금액은 다른 이와 나누겠단다. 자기보다 더 힘든 처지에 처한 다른 활동가들을 위해 쓰겠단다. 그러지 마시라 했다. 이제껏 혁명의 길 걸어 오느라 보살피지 못했던 것 보살피라 했다. 아내도 살리고, 빚진 것도 갚고, 팔겠다고 내 놓은 작업실 다시 챙겨서 다음에 노래 작업할 때 쓰시라 했다.

'김은숙 목숨값' 계속 이어진다

윤민석은 고개를 저으며 고 김은숙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5·18 광주의 유혈사태에  침묵하고 방조한 미국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질러 광주를 세계에 알린 이른바 '부미방 사건'의 주역, 김은숙. 작년 그가 암으로 투병할 때 그의 동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후원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도 실리고, 병원에서 음악회도 열렸다. 그래서 적지 않은 돈을 모아 그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그는 5월 24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김은숙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에 참여한 윤민석
 김은숙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에 참여한 윤민석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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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김은숙은 자신에게 들어 온 후원금 중 일부를 윤민석에게 후원했다. 그러지 않은 때가 또 언제였겠나마는 그 당시 너무도 어려웠던 윤민석에게 그 후원은 큰 힘이 되었단다. 윤민석은 그 후원금을 '누님의 목숨 값'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윤민석이 김은숙의 마음을 잇겠다고 한다(누구에게 후원할지 구체적인 이름도 나왔지만 여기에 밝히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

윤민석과 헤어져 나오면서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그에게 마음 포개기 참 잘했구나. '고슴도치' 윤민석에게 마음 포개 준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덧붙이는 글 | 노래를 주는 사람 - 소중한 윤민석님께
(윤민석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심상진이 남긴 시)

저를 고슴도치라 부르는 사람
실은 몸 안쪽으로 가시가 돋은 사람
세상 눈물을 받아내고
세상 한숨을 그러 모아
안으로 자라는 가시.
뾰족하고 단단하고 애처로운 가시
마음을 찔러 노래가 흘러 나와

가슴을 찔러 위로가 흘러 나와
우리에게는 노래를 주고
자신은 멎지 않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
세상을 향해서는 오로지 보드라운 속살을
다정한 가슴을 따뜻한 눈짓을 내밀고
맞잡은 손에 뜨겁고 단단한 노래를 쥐어 주는 사람
신이 보듬지 못한, 세상에 거두지 못한
고통과 슬픔과 상처를 매만지는 사람
외따로 우는 이들을 노래로 엮어 주는 사람
말 못하는 이들에게 소리를 주는 사람
세상을 울리는 굳센 외침도
울먹이는 어깨를 다독이는 다정한 속삭임도
힘을 내라 일으켜 세우는 단호한 가르침도
자신을 돌아보는 나직한 혼잣말도
모두 이 사람, 노래는 만드는 사람이 준 것
나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손바닥을 펴보니 당신이 준 노래.
가시에 찔려가며 손에 쥐어 주었던
오롯한 사랑, 애틋한 마음, 굳센 다짐
값없이 받았던 소중한 노래들
바람을 타고 골골이 흐르는
세상을 향한 맨살의 노래들
노래를 부르는 높고낮은 소리들이
노래로 일으킨 수많은 어깨들이
노래를 받아 쥔 두툼한 손바닥들이
노래를 만드는 당신께 닿기를
노래를 만드는 사람에게 닿기를
가시에 찔린 자리에 심어진 씨앗이 되기를.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주신 노래 마음을 다해 부릅니다.



태그:#윤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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