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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기억박물관이다. 발전이 더딘 탓에,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난 탓에 오래된 풍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간혹 골목을 거닐다 1960~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낡았다'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몇 백년 전 집과 길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럽이나 미국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보면서 감탄하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보면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좀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고 가꾸면 골목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랫동안 골목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보물들을 여기에 소개한다. - 기자말

숲은 무서웠지만 정자나무는 친근했다

나무들이 빽빽한 숲은 두려운 곳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 곳은 맹수나 귀신이 사는 곳으로 종종 나왔다.
 나무들이 빽빽한 숲은 두려운 곳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 곳은 맹수나 귀신이 사는 곳으로 종종 나왔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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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숲은 두려운 곳이었다. 처음엔 TV <전설의 고향> 탓이려니 했다. <전설의 고향>에서 귀신이나 구미호는 항상 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서 나타났고, 인가가 없는 숲 속에선 도움을 청할 수가 없으니 사람들은 꼼짝없이 당해야 했다.

그 뒤엔 반공영화의 기억이 덧붙여졌다. 초등학생 시절 종종 단체관람으로 반공영화를 봤다. 영화 속에서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은 꼭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중간에 하나씩 죽어 결국엔 주인공 한 명만 남았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절박함과 으스스함이 숲이라는 이미지로 떠올랐다.

방학 때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갈 때 도시의 불빛이 줄어들다 마침내 사라지면 두려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두려웠고, 마침내 사람이 사는 곳을 알리는 불빛들이 나타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전설의 고향>이 더 이상 무섭지 않고 반공영화는 따분하기만 한 나이가 됐을 때 숲은 다소 짜증나는 곳이 됐다. 여름날 외가 뒤 숲에 우연히 들어갔을 때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엄청나게 모기에 물렸을 때다. 게다가 바닥엔 알 수 없는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을 보면서 기겁을 했다. 그렇게 숲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곳이 됐다. 

돌이켜보니, 숲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 사이에 꽤 깊숙이 자리 잡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부터 숲 속엔 맹수가 많았고, 알 수 없는 독충들도 있었으며,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웠다. 게다가 세상살이가 팍팍해지면 산적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코지하던 곳이 바로 숲 아니던가.

숲을 상징하는 건 나무였으니 사람들은 나무를 무서워하고 때론 숭배했다. 그건 오랫동안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지녀온 태도였다. 나무는 사람이 지닌 한계를 벗어난 놀라운 생명이었다.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훨씬 높이 자랐다. 나무에 대해 우러러보는 마음이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나무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기꺼이 자기 몸을 내주었다. 사람들은 나무로 집을 짓고, 밥을 했으며 각종 도구들을 만들었다.

정자나무는 마을 입구나 언덕에 있었다. 어디서나 잘 보였고, 그래서 정자나무 아래 있으면 마을을 두루 살필 수 있었으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모였다.
 정자나무는 마을 입구나 언덕에 있었다. 어디서나 잘 보였고, 그래서 정자나무 아래 있으면 마을을 두루 살필 수 있었으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모였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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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洞口)밖이나 언덕에 있던 정자나무는 사람들이 가장 가까이 느끼는 자연이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만나고 쉬었으며, 굿을 하고, 신에게 기원들 드렸다. 때로는 강보에 싸인 아기를 내려놓는가 하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삶을 마감했다. 정자나무가 마을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는 건 상징이 아니라 실제였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있어 마을 사람이면 매일같이 소식을 주고받았으니 정자나무 아래선 쉼 없이 뉴스가 거래됐다.

어릴 때 전라남도에 있는 외가에 가면 동네 입구에 큰 정자가 있어 항상 어른들이 쉬고 있었다. 정자 주변엔 큰 나무가 있어 깊게 그늘을 드리웠다.

외삼촌과 면사무소가 있는 시내에 가서 먹을 걸 사오거나 강에 가서 다슬기를 잡아오면 항상 정자나무 아래 멈춰서야 했다.

외삼촌이 머리가 허연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친구를 만나 동정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내가 누군지 놓치지 않고 물었고, 그 때마다 어른들에게 배운 예절에 따라 인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 앞에서는 성 뒤에 '씨'가 아닌 '가'를 붙여야 하고, 성과 이름을 한 자씩 떼어서 분명하게 발음해야 한다는 점은 매번 곤혹스러웠다. 아버지나 어머니 함자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그래 몇 대손이고"라는 질문이 나오면 어쩔 줄 몰라 했다.

해서 그 시절에는 일부러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 입구 대신 먼 길을 '빙' 돌아서 갔던 것 같기도 하다.

무섭고 고맙던 정자나무, 새마을운동 시기 마구 베어져

쑥쑥 잘 자라고 자란 뒤에도 풍채가 시원해 정자나무로 인기가 있었던 건 느티나무였다. 실제 2010년말 정부가 지정한 보호수 1만3374본 가운데 느티나무는 7331본으로 절반이 넘는다. 느티나무에 정자나무란 별명이 붙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골목을 다니면서 꽤 많은 정자나무를 봤는데, 이야기들을 많이 품고 있어 흥미로웠다. 고양시 덕은동에 있는 430년 된 향나무는 임진왜란 때 대피소가 돼 마을 주민들을 구했다. 공주시 정안면에 있는 500년 된 정자나무는 큰 불로 날아갈 수 있는 동네를 구했다. 어느 날 옆 마을에서 큰 불이 붙었다. 당시엔 집이 모두 초가라 한 번 불이 붙으면 손쓰기가 어려웠다. 그 때 갑자기 벼락이 쳐 나무가 쓰러지면서 옆 마을로 번지는 걸 막았다. 마을 사람들이 두고두고 고마워한 이유다.

천연기념물 299호인 남해 왕후박나무. 오래된 나무엔 자연과 사람이 남긴 이야기가 새겨지는데, 때때로 영웅 이야기가 곁들여져 경외감과 친근감을 느끼게 만든다.
 천연기념물 299호인 남해 왕후박나무. 오래된 나무엔 자연과 사람이 남긴 이야기가 새겨지는데, 때때로 영웅 이야기가 곁들여져 경외감과 친근감을 느끼게 만든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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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군 면천면에 있는 은행나무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을 품고 있다.
 당진군 면천면에 있는 은행나무는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과 관련된 전설을 품고 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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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전설에 영웅 이야기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다. 마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 부부가 어느 날 큰 고기를 잡았는데 뱃속에서 이상한 씨앗이 나와 뿌린 게 지금 왕후박나무가 됐다. 이 이야기에선 외국동화 <잭과 콩나무>가 떠올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이 나무엔 이순신 장군이 흔적을 남겼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이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고 쉬었다 하니 훗날 쉬는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자리에서 쉬는 호사(?)를 누린다.

당진군 면천면에 있는 은행나무와 관련있는 영웅은 고려 개국공신인 복지겸이다. 면천에 내려온 복지겸이 병을 얻어 앓아 누웠는데, 아무 약도 소용이 없었다. 딸이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두 가지 계시를 내렸다. 아미산 진달래꽃과 안샘물로 술을 빚고, 집앞에 은행나무를 심은 뒤 정성을 드리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대로 했더니 복지겸의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다. 나무를 빌려 효를 강조하려던 당시 사람들 마음이 느껴져 재미있었다.

정자나무가 손자 응석 다 받아주는 할아버지 같기만 했던 건 아니다.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500년된 측백나무는 나무를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을 전한다. 나무 속에 큰 뱀이 살고 있다는 전설 속엔 나무를 손대면 안된다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을 테다. 부천시 소사본2동에 있는 1000년이 넘은 향나무 또한 드러난 뿌리에 흙을 덮으면 마을에 질병과 화가 미친다는 전설을 갖고 있으니 사람들은 정자나무가 고마우면서도 한 편으론 무서웠다.

복과 화를 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정자나무와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더불어 살았다. 근대화가 진행되기 전까진 말이다. 과거 유산이 미신이라며 손가락질 받던 시절이다. 서낭당, 무당, 점집 같은 것들은 사라져야 할 것들이 돼버렸다. 정자나무 또한 비슷한 신세로 전락했다.

기존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대립한다. 새로운 가치를 대변하는 건 돈이었다. 큰 돈을 만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도시에 고급주택을 짓기 시작한다. 집을 그럴 듯하게 짓기 위해선 그럴 듯한 나무로 겉과 안을 둘러야 하는데 정자나무가 제 격이었다. 목재상들이 전국 마을을 훑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한 그루당 가격은 15만 원 정도였다.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당시 마을 사람들이 보기엔 정자나무가 거추장스러웠다. 대로에서 집까지 직선으로 길을 뚫어야 하는데, 한가운데 놓인 정자나무가 방해됐다. 나무를 팔면 새마을사업 자금에 보탤 수도 있었다. 그렇게 꽤 많은 정자나무들이 사라졌다.

때마침 정자나무와 정자나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악습으로 모는 일들도 벌어졌다.

"27일 상오 11시30분 경남 거창군 마리면 하고리 부락 앞에 있는 600년 된 정자나무가지가 부러져 그 밑에서 놀던 이 마을 신중목씨의 3남 중찬군(7) 신용순(29)씨의 맏딸 은정(5)양 신양범(50)씨의 6녀 영희(12)양등 3명이 숨지고 신중목씨의 맏아들 용구(5)군 등 2명이 경상을 입었다. 부러진 정자나무의 높이 8m 되는 곳에 직경 50cm의 가지가 부러져 매달려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은 정자나무에 손을 대면 해를 입는다는 전설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가 이날 나무아래서 놀던 어린이들이 변을 당한 것이다." - <경향신문> (1972년 7월 28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정자나무가 많이 사라졌다. 마을길을 넓히는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또는 마을을 고치는 데 쓸 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목재상들에게 팔려나갔다. 사진은 1970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잘살아보세'(2006)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정자나무가 많이 사라졌다. 마을길을 넓히는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또는 마을을 고치는 데 쓸 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목재상들에게 팔려나갔다. 사진은 1970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잘살아보세'(2006)
ⓒ 영화'잘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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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젊은 사람들은 과거를 극복하고 싶어 했고,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정자나무를 없애는 건 과거와 단절하는 상징이 됐다.

부랴부랴 정부에서 정자나무를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한 번 돈맛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정자나무의 효험을 믿지 않았다. 정자나무가 시원한 건 알았지만 대체물이 있었고, 도시는 계속 커져야 했다. 무엇보다 돈이 부처고 예수인 시대에 정자나무가 돈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댐을 지으면서 마을과 정자나무가 동시에 수몰됐고, 하수도공사로 뿌리가 노출되면서 말라죽었다. 도로를 닦고 나무 주위를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덮으면서 죽어간 나무가 부지기수다. 그렇게 <전설의 고향>도 옛일이 됐고, 정자나무도 먼일이 되는 듯했다.

2003년 대전 진잠초등학교에 발령받은 이한규 교장은 잎도 나지 않고 까맣게 가지가 말라가는 고목 한 그루를 발견했다. 300년 된 팽나무였다. 살리기 위해선 돈 2000~3000만 원이 필요했다. 교육청과 총동창회, 학부모회 등에 지원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돈으로 학생용 건물을 짓거나 교육자재를 사는 게 낫다는 답변이었다.

이런 반응은 1972년 새마을운동 와중에 이미 있었다. 당시 마구잡이로 잘려나가는 전남 화순 지방의 느티나무를 구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최경영씨가 겪은 반응이 그랬다. 최씨는 벌목을 막기 위해 경찰과 도청에 고발했다. 반응은 차가웠다. "새마을사업에 방해된다" "시끄럽게 굴면 재미없다"는 반응은 동네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부암동 무계정사 앞 은행나무. 2010년 5월 23일 땅주인에 의해 잘려나갔다. 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 이 은행나무는 당시 보호수로 지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서울 부암동 무계정사 앞 은행나무. 2010년 5월 23일 땅주인에 의해 잘려나갔다. 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된 이 은행나무는 당시 보호수로 지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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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나무는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함을 줬으나, 사람들이 정자나무에 대해 생각하는 건 딱 그 정도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오로지 제 한 몸 사리지 않고 뛰어다닌 선구자들 덕분이었다. 최경영씨의 노력은 성과를 얻어 느티나무를 베도록 허가한 관계공무원과 도벌군에 대해 구속이 이뤄졌고, 2005년 대전시는 예산을 확보해 진잠초등학교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했다.

과거에 비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살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듯하다. 그 덕분에 골목을 다니며 꽤 많은 도심 속 나무들이 '보호수'란 이름으로 관리받는 풍경을 봤다.

물론 그 가운데 서울 부암동에서 본 큼지막한 은행나무가 다음해 찾았을 때 사라진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 소리 없이 사라진 나무 또한 여전히 많은 듯하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타임캡슐 묻은 나무가 사라졌다면...

2010년 여름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다 한 정자나무 아래 앉았다. 자전거도 쉬고 사람도 쉬었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한가롭게 구경했다.
 2010년 여름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다 한 정자나무 아래 앉았다. 자전거도 쉬고 사람도 쉬었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와 사람들을 한가롭게 구경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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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줄곧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정작 정자나무가 주는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처음 제대로 느낀 건 1990년 초반 대학교 농촌활동을 가면서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일은 고됐고, 저녁을 먹은 뒤엔 평가회라면서 밤늦도록 골치 아픈 이야기를 했다. 평가회가 끝난 뒤엔 당연히 막걸리가 나왔는데, 술을 잔뜩 마신 뒷날에도 어김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나가야 했다.

술자리가 꽤 길어진 다음날 새벽일을 나가야 했고,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일을 하다 머리가 아파 가까이에 있던 정자로 비틀비틀 걸어가 드러누웠다. 주변은 나무였고, 정자는 빙글빙글 돌았다.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몸을 흔드는 누군가가 있었다. 밥 때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꽤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몸이 회복돼 있었다. 배가 고팠다. 그 때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어도 큰 나무 아래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꽤 시원하고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겪어봐야 보인다고 정자나무를 본 기억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서 본 속리산 정이품송이다. 엄청나게 큰 나무였지만 철창 안에 갇힌 나무에선 아무런 감흥을 얻을 수 없었다. 큰 나무에 대해 옛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나무가 품은 전설을 이해하기엔 자라면서 지나치게 겪은 바가 없었다.

수학여행 때 본 것이나 농촌활동 때 겪은 기억은 곧 잊혀졌다. 일상에서 정자나무를 보거나 겪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넘어 사진기를 메고 골목을 다니면서부터 하나둘씩 동네 속에 숨은 큰 나무들을 보게 됐다. 보호수란 이름으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큰 그늘 아래 사람들이 쉬어가게 한 정자나무들이 있었다.

보호수란 존재는 도심 속 크고 오래된 나무들이 꽤 많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사진은 충주시 관아공원 안에 있는 540여년된 느티나무.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보호수란 존재는 도심 속 크고 오래된 나무들이 꽤 많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사진은 충주시 관아공원 안에 있는 540여년된 느티나무.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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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란 존재는 도심 속 크고 오래된 나무들이 꽤 많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을 품 안에 받아들일 만한 나무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서울 용문동에서 본 정자나무는 시장 입구에서 오고가는 주민들을 맞이했다. 과거 동구(洞口)밖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던 정자나무 위치와 비슷했다. 삼거리는 정자나무를 가운데 두고 갈라졌다.

나무 아래선 할머니 한 분이 잡곡과 고춧가루를 팔았다. 중년 남성과 여성 한 분은 그늘에 앉아 쉬었다. 때는 더운 여름이었고, 일행과 나 또한 나무 아래 자전거를 눕히고 쉬었다. 그늘이 시원했다.

서울 옥인동에서 본 나무는 지금은 사라진 옥인아파트 입구에 있었다. 큼지막한 나무는 사람과 자동차 몇 대를 가리고도 남았다. 갈 때마다 사람들이 나무에서 쉬는 모습을 봤다.

밀양 삼랑진읍에서 본 정자나무 두 그루 또한 오고가는 사람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낙동강과 시내를 가르는 갈림길에 있었으니 나무는 동네에서 가장 잘 띄는 위치였다. 나무는 꽤 커서 몇 사람이 그 아래서 과일을 팔았고, 한 쪽에선 어르신 10여 명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장기를 두었다.

어떤 마을을 떠올릴 때 입구에 위엄있게 서 있던 정자나무는 마을 풍경과 함께 떠오르곤 한다.

오래전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선 종종 나무 아래서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나무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을 것을 알기에 이뤄진 약속들이었다. 만약 순식간에 나무가 사라지고 그 자리가 훼손된다면 그 약속들 또한 지켜지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은 영화 '엽기적인그녀'(2001)
 오래전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선 종종 나무 아래서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나무가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을 것을 알기에 이뤄진 약속들이었다. 만약 순식간에 나무가 사라지고 그 자리가 훼손된다면 그 약속들 또한 지켜지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은 영화 '엽기적인그녀'(2001)
ⓒ 영화'엽기적인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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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보면 주인공이 큰 소나무 아래에 타임캡슐을 묻고 2년 뒤를 기약한다. 미국영화 <쇼생크탈출>에서는 먼저 교도소를 탈출한 앤디 듀플레인(팀 로빈스)이 뒤이어 출소하게 된 레드(모건 프리먼)에게 다시 만날 장소와 돈을 나무 아래 묻는다.

두 영화 모두 언덕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약속의 장소로 등장한다. 두 나무를 떠올리면서 만약 묻어둔 쪽지를 파내기 전에 나무가 있는 곳이 개발로 사라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마 영화가 해피엔딩이 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자나무에 <엽기적인 그녀>나 <쇼생크 탈출>의 그 사람들처럼 자기들만의 사연과 기억을 고이고이 묻어두었을 게다.

만약 그 나무들이 어느 날 사라진다면 어떨까. 나무 나이만큼이나 긴 역사 한 자락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실제 <쇼생크 탈출>에 나온 참나무는 2011년 7월 29일 폭풍으로 부러졌다. 그 영화를 기억하며 나무를 보러온 많은 영화팬들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네 정자나무에 사연을 묻은 많은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돈과 우리 기억을 맞바꾸는 게임을 지금 끈질기게 벌이는 중인지도 모른다.


태그:#나무, #정자나무, #보호수,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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