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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을 앞둔 귀신고래들은 캘리포니아 반도 해변에서도 유독 리에브레 석호에 많이 모여듭니다.(…)새끼를 밴 암컷 귀신고래의 몸짓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기도 하고 부르르 떨기도 합니다. 새끼를 낳을 모양입니다. 다행히 기나긴 여행을 함께해 온 길동무가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포유류인 고래가 바다에서 새끼를 낳는 일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새끼를 낳을 때 흘러나오는 피 냄새를 맡고 상어들이 몰려들기도 하고, 갓 태어난 새끼 고래가 숨을 쉬지 못해 죽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도우미의 역할이 무척 중요합니다. 암컷 두 마리가 함께 이동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윽고 암컷 귀신고래의 몸부림이 잦아들더니 몸에서 작은 머리가 나옵니다. 보통 고래는 어미 몸에서 나올 때 꼬리부터 나오는데 귀신고래는 특이하게 머리부터 나옵니다.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몸통전체가  주르르 미끄러지며 빠져나옵니다. - <대이동, 동물들의 위대한 도전>에서

<대이동, 동물들의 위대한 도전>(정승원 지음. 창작과 비평사 펴냄)은 생존을 위해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며 살아가는 몇몇 동물의 목숨을 건 대이동의 이유와 비밀을 들려주는 책이다.

출산 후 미역 먹는 귀신고래 보고 산모들도 미역국 먹었다?

<대이동, 동물들의위대한 도전> 겉표지
 <대이동, 동물들의위대한 도전> 겉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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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은 시베리아로부터 우리나라까지 장장 4천km를 날아 해마다 10월에 금강호로 찾아와 세계유일의 군무를 펼쳐보이는 가창오리를 비롯하여, 꽃잎처럼 작고 여린 날개로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장장 5천km를 이동하는 제왕나비, 순록, 바다거북, 누, 귀신고래 등이다.

이중 귀신고래의 출산장면과 생존을 위한 이동 과정은 좀 특별하게 읽혔다. 새끼고래를 가운데 두고 보호하며 이동하거나 어른고래 두 마리가 이동할 경우 암컷과 수컷 즉 고래부부일 거라 생각해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와 달리 임신을 한 암컷 고래와 임신을 하지 않은 암컷 고래 두 마리가 생존을 위해 서로 유대를 맺는다는 것, 그리하여 1만 5천km 혹은 3만km를 서로 분신처럼 붙어 도와가며 이동한다는 것, 그중 한 마리는 훌륭한 출산도우미 역할은 물론 베링 해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는 베이비시터(?)까지 한다는 사실이 좀 의외였기 때문이다.

기진맥진한 어미 귀신고래는 마지막 힘을 모아 소용돌이치듯 몸부림을 쳐 탯줄을 끊습니다. 열두 달 동안 어미 뱃속에 있던 새끼 귀신고래는 난생 처음 어미와 떨어져 바다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따뜻한 바닷물 속은 어미 뱃속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지며 심장이 죄어듭니다. 탯줄로 공급받던 산소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을 기다리던 어미의 친구는 가라앉는 새끼고래를 얼른 등으로 받아 업은 뒤 물위로 오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새끼고래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물 밖으로 올려 첫 숨을 쉬게 해야 합니다. 리에브레 석호는 다른 바다에 비해 염분이 높아 몸이 물에 잘 뜹니다. 덕분에 갓 태어난 새끼고래가 물 위로 오르기가 한결 쉽습니다. 푸우 푸, 작은 물기둥이 솟아올랐습니다. 성공입니다. 새끼 귀신고래가 첫 번째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대이동, 동물들의 위대한 도전>에서

위에 인용한 글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인데, 갓 태어난 아기에게 첫 숨을 쉬라고 엉덩이를 살짝 때려 울게 하는 우리의 출산장면이 떠올라 뭉클한 감동이 일었던 부분이다.

귀신고래의 크기는 12~15m, 몸무게는 30~40톤, 수명은 약 70년이란다. 이들이 주로 먹는 것은 크릴새우나 조개 등. 우리나라에서 산모들에게 미역국을 먹이기 시작한 계기가 고래들이 출산 직후에 어김없이 미역을 먹는 것을 보면서란다. 그렇다면 그 주인공 고래가 아마도 한국계 귀신고래가 아니었을까?

귀신고래는 크게 북대서양에 사는 것과 북아메리카 해변을 따라 북태평양 동쪽에 사는 캘리포니아계 그리고 우리나라 동해를 비롯하여 북태평양 서쪽에 사는 한국계가 있는데, 한국계 귀신고래는 겨울이면 울산 앞바다에까지 내려와 지냈고, 그리하여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질 정도로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 함께 해온 고래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남획으로 현재 130여 마리 남아

놀랄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귀신고래-책속 설명
 놀랄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귀신고래-책속 설명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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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는 사람을 무척 좋아해 사람이 탄 배 가까이 다가가 사람들의 손길을 받을 정도란다. 책속에는 배위 사람들이 귀신고래를 쓰다듬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이 사진을 보며 '아마도 북대서양 귀신고래가 인간들의 남획으로 18세기에 멸종하고 만 것이 귀신고래의 사람 좋아하는 이런 습성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좀 씁쓸해지기도 한다.

캘리포니아계 귀신고래 역시 북대서양 귀신고래처럼 인간들의 지나친 고래사냥으로 수백마리 정도만 남았는데 1946년부터 꾸준하게 보호, 지금은 2만여 마리 가량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계 귀신고래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남획으로 현재 130여 마리 남아있는 정도라고 한다.

귀신고래의 정식명칭은 쇠고래. 그럼에도 귀신고래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나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 재미있게도 귀신고래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여하간 귀신고래는 여러 고래 중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고래로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귀신고래는 먹고 살 길을 찾아 1만 5천km를 이동하는 캘리포니아계 귀신고래다.

몸집이 워낙 크기 때문에 크게 위험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누군가의 천적인 동시에 희생자다. 귀신고래도 마찬가지. 사람들과 포악하기로 소문난 범고래가 귀신고래의 최대 천적인데, 비교적 영리한 편인 범고래는 캘리포니아 반도에서 출산을 한 후 새끼를 데리고 베링 해로 돌아가는 귀신고래의 길목에서 귀신고래의 새끼들을 노린다. 그것도 새끼가 지치기를 기다리며 은근한 압박을 가하며 추격하는 방법으로.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지난해 10월에 베링 해에서 출발할 때부터 동행하며 수많은 위험을 함께 넘어 캘리포니아 반도에 함께 도착한, 그리하여 어미 귀신고래의 출산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어미 고래의 친구인 귀신고래의 도움과 역할은 커지고, 그럴수록 둘의 유대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둘의 유대 덕분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대체 귀신고래는 왜 새끼가 희생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걸까? 이동하는 두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동행하는 암컷 귀신고래는 무엇 때문에 두 달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는 희생을 자처하는 걸까? 어떻게 해마다 왔던 길을 정확하게 되돌아 갈 수 있는 걸까?

책은 해마다 10월에 베링 해를 떠나 12월 멕시코 해변(캘리포니아 반도)에 도착하는 두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1만 5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귀신고래의 여정과, 그렇게 도착한 캘리포니아 반도에서 지내다 1~2월에 출산을 한 후 3월에 멕시코 해변을 출발, 두 달 후인 5월에 베링 해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과 여정을 가능하게 하는 암컷 귀신고래 두마리의 끈끈한 유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솔직히 전혀 모르는 두 암컷 귀신고래의 생존을 위한 끈끈한 유대와 그 여정은 장엄한 감동, 그 자체다. 그리하여 한편의 장엄한 생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했다고 할까? 눈으로 읽는 글들이 마치 내레이션처럼 와 닿으며.

가창오리가 우리나라에서 겨울 지낸 것은 일본과 중국 밀렵꾼들 때문

이야기 끝마다 주인공 동물의 현재 상황과 보호 정책 등을 실었다.
 이야기 끝마다 주인공 동물의 현재 상황과 보호 정책 등을 실었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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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가창오리는 무리를 지어 날아갈까요? 앞서 가는 새의 날갯짓에서 생기는 상승기류(대기 중에서 위쪽으로 향하는 공기의 흐름)를 타면 힘을 덜 쓰고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승 기류는 새의 날개 끝에서 만들어지므로, 그 덕을 보려면 앞서 날아가는 새의 날개 끝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한 새의 날개 끝에 다음 새가, 또 그 날개 끝에 다음 새가 따라가다 보니 하나의 커다란 무리를 이루게 되지요. 가창오리들이 4천km가 넘는 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서로의 날갯짓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철새들도 마찬가지입니다.-<대이동, 동물들의 위대한 도전>에서

8월 말에 시베리아를 출발, 4천km를 날아 10월에 우리나라 금강호에 도착, 겨울을 나고(현재 전 세계 가창오리 90%가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남. 겨울을 나며 먹이 활동 등을 하며 펼쳐 보이는 군무는 세계에서 유일하다)  이듬해 4월에 다시 시베리아로 출발하는 가창오리는 194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는 중국과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였다고 한다.

이런 가창오리가 우리나라로 와 겨울을 지내게 된 것은 일본과 중국에서 밀렵꾼들 때문에 집단 떼죽음을 당하면서부터. 생존의 위협에 우리나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이다. 가창오리의 이런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 반대로 우리나라 새였으나 남획하거나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우리에게서 등을 돌려버린 새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취지 중 하나는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에 대한 제대로의 관심과 바람직한 공생 추구 아닐까? 이야기 끝마다 주인공 동물들이 처한 위기나 현실, 보호 정책 등 (궁금해요, 가창오리!)을 실은 것도 이 책의 장점. 이 책 <대이동, 동물들의 위대한 도전>을 훨씬 가치 있게 하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대이동, 동물들의 위대한 도전>l 저자:정승원|그림: 김대규|감수:권오길| 출판사:창비(창작과비평사) | 2012-07-27 |정가:11000원



대이동, 동물들의 위대한 도전

정승원 지음, 김대규 그림, 권오길 감수, 창비(2012)


태그:#귀신고래, #가창오리, #바다거북, #제왕나비, #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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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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