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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공간사옥은 SBS 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사옥 고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공간사옥은 SBS 주말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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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공간사옥은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던 지난 7월 중순 (주)공간건축사무소에서 발간하는 <월간 공간>(이하 <공간>)은 자금난을 겪었다. 모회사에서 매년 5억 원 주던 지원금이 이달 초부터 끊겼기 때문이다.

<공간>은 고 김수근 건축가가 1967년 11월 창간한 국내 최장수 예술·건축종합잡지로 문화계와 건축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간>을 거쳐간 기자, 편집장 등은 현재 문화예술계의 원로로 활동하며 문화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46년간 <공간>은 우리 사회에 무엇이었을까?

기자는 <공간>의 산파 역할을 했던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70)와 <공간>의 모회사 공간건축사무소의 소장을 지낸 신언학 토우건축 대표(63)를 만나 우리 사회에서 <공간>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들었다.

건축가 김원 "<공간> 안 보면 지식인이 아니었다"

김 소장은 <공간>의 전성기를 이끈 산증인이다.
▲ <공간>의 창간호부터 글을 쓴 김원 소장(건축환경연구소 광장) 김 소장은 <공간>의 전성기를 이끈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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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공간>에 나왔다 하면 화제가 됐다. 1970 ~ 80년대에는 <공간> 안 보면 지식인이 아니었다. <공간>의 필진은 당대 최고였고 영향력도 컸다"

<공간>의 산증인 김원 대표의 말이다. 그는 창간호가 발간된 1967년부터 1980년대까지 별다른 직책 없이 <공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기자는 지난 9일 대학로에 있는 김 대표의 사무실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김 대표는 <공간>의 성공이유를 두 가지 꼽았다. 첫째는 탄탄한 전문성을 가진 필진, 둘째는 성역 없는 비평이다.

문화·예술분야의 쟁쟁한 인물들이 <공간>에 글을 썼다. 최순우 중앙박물관장, 사진작가 고 임응식, 극작가 이근삼, 미술사학자 정양모, 미술평론가 이구열, 신영훈 큰목수, 철학가 소흥렬 등이 힘을 모았다.

"김수근 선생이 나한테 와서 '우리 예술가들이 뛰어놀 운동장이 될 잡지를 만들자'라고 했다. 그 말대로 우리는 원 없이 글을 썼다."

<공간>은 건축계의 굵직한 사안에 목소리를 냈다. <공간>은 1967년 법주사 팔상전을 재현한 중앙박물관 계획안을 두고 "양복 입고 두루마기 걸친 꼴"이라고 비판했다. 1975년에는 국회의사당 디자인이 군사정권의 간섭으로 졸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간>의 비판에 발행인 김수근도 예외일 수 없었다.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부여박물관은 1967년 완공되자마자 '왜색논란'에 휩싸인다. 해방한 지 20년이 갓 지날 때여서 반일감정이 심했다. 건물 하나가 사회적 논란으로 번졌다. 결국 문화재청은 김 선생에게 개작을 권고했고 김 선생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김원 대표는 스승을 비판했다.

"나는 <공간>에 '개작에 동의하는 자는 젊은이들의 우상일 수 없다'는 제목으로 김수근 선생을 비판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김 선생이 훌륭한 사람이다. 자기 부하직원이 자기를 비판하는 글을 자기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리게 한 것이다. 바로 그런 정신 때문에 <공간>은 큰 성공을 거뒀다"

1975년의 김수근 "등사판을 미는 한이 있어도..."

신 대표는 건축학과 2학년이었던 1970년부터 <공간>을 읽은 '오래된 독자'다.
▲ 고 김수근 선생과 <공간>에서 일했던 신언학 토우건축 대표 신 대표는 건축학과 2학년이었던 1970년부터 <공간>을 읽은 '오래된 독자'다.
ⓒ 이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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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서초구 서래마을에 있는 토우건축 사무실에서 신언학 대표를 만났다. 그는 지난 2006년 건축학과 2학년인 기자를 가르친 은사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사옥에서 김수근 선생과 함께 일했지만 잡지 제작에는 관여하지는 않았다.
신언학 대표는 "김수근 선생이 '도둑질만 빼놓고 다 할 줄 알아야 건축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김수근 선생 생전의 <공간>도 건축 이외의 예술분야를 주로 다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김수근 선생은 1977년 안국동 공간사옥 지하에 소극장 '공간사랑'과 갤러리를 만들었다. 이곳은 1970 ~ 80년대 장안의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구실을 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이곳에서 사물놀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냈다. 지난달 작고한 공옥진 여사의 '병신춤'도 이곳에서 정식 데뷔를 했다. 현대 무용가 홍신자도 이곳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그게 결국은 모든 예술이 한 원류라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문화계의 양분을 섭취해야 건축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잡지도 그렇게 만들었다"

신 대표는 건축학과 학부 2학년인 1970년부터 월간 <공간>을 읽었다. 그해 조교가 "1969년부터 연재된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을 보라"며 그에게 <공간>을 권한 것이다. <공간>이 국내에 처음 소개한 <건축예찬>은 훗날 단행본으로 나왔고 지금도 건축학과 학부생들에게 필독서로 손꼽힌다.

1967년 11월에 나온 <공간> 통권 1호부터 2009년 7월호 <공간> 500호까지 <공간>이 총망라되어있다.
▲ <공간> 통권 500호 기념 포스터 일부 1967년 11월에 나온 <공간> 통권 1호부터 2009년 7월호 <공간> 500호까지 <공간>이 총망라되어있다.
ⓒ (주)공간건축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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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대표가 조교의 권유로 <건축예찬>을 읽은 지 36년이 지난 2006년 신 대표의 추천으로 기자도 <건축예찬>을 읽었다. 그뿐일까? 기자 역시 사물놀이 공연을 봤고 유홍준 전 청장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읽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공간>이 마련한 문화적 토양에서 한 시절 살았는지도 모른다.
순수 문화·예술을 지향한 <공간>의 자금난은 일상이었다. 오죽했으면 1975년 9월호 100호에 김수근 선생은 '등사판을 미는 한이 있어도'라는 제목의 글을 기제 했을까.

그 글은 "설사 등사판을 미는 한이 있더라도 <공간>은 계속 발행하겠다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꼭 <공간>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건축전문잡지, 예술잡지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과 건축의 대중화를 위해 <공간>이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 <공간>이 만들 미래가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이규정 기자는 <오마이뉴스> 16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공간지, #공간,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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